목사의 금기사항 20가지
1. 즉흥적인 거절을 하지말라.
기도하겠다고 미루라.
성도들이 목사에게 요구하는 요구 조건은 참으로 많이 있다. 기도를 부탁하는일로 시작을 해서, 설교에 대한 부탁, 부부 간의 문제, 고부 간의 문제, 금전적인 문제, 애정의 문제, 자녀들의 교육 문제, 질병, 사업, 부부 생활에 대한 것들, 실로 성도들이 목사에게 상담하고 도움을 구하는 문제들은 인생의 전반적인 문제들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목사가 잘 대답할 수 잇는 것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문제들도 있다.
그런데 목사는 성도들의 이런 상담들을 들을 때 마치 자기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접근하는 일이 많다. 성도들에게 어떤 확신을 주고 안심시키고자하여 우선 확정적인 대답을 한다. 그러나 목사는 하나님도 아니며 세상 살이에 그렇게 뛰어난 성공자들도 아니다. 어떤 경우에 목사는 성도들 보다 훨씬 못미치는 실력과 경험으로 성도들의 문제에 접근하려다가 당황하고 실수를 해서 일을 그릇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런 일을 당하면 그 문제로 인한 손실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언제나 시간의 여유를 가지도록 성도들의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확실한 문제에 대한 대답은 즉석에서 해 줄 수도 있겠으나 모든 문제의 대답이 심사 숙고하는 것이 좋은 것이므로 일단 기도하자고 말하고 실제로 하나님께 물어 대답을 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기도를 하면서 기다리는 동안 대부분 문제들이 해결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 문제 해결을 위해 신경을 쓰고 마음을 쓰는 것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나도 남 못지 않게 성도들에게 친절한 목사였다. 성도들의 이사하는 일, 병원 다니는 일, 출산 하는 일, 취직 시험 보러 가는 일, 졸업식과 입학식 축하해 주기, 관공서에 가 서류를 뗀다거나 일을 대신 봐 주기, 심지어 아이들 돌 봐주기등등 이루 해아릴 수 없는 편의를 봐 주었지만 그것으로 성도들이 은헤를 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도록 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종으로써의 목사지, 성도들의 잡 일을 해 주고 세상 살이에 대한 조언을 해 주는 것으로써의 목사는 아니다.
2. 교인들에게 약속, 맹세, 서약을 하지말라.
나중에 지키지 못한 데 대한 추궁이 따른다.
성도들의 맹세를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목사의 약속도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목사의 약속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잘못 인식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병으로 죽을 사람을 방문했을 때, 가족들은 목사의 기도가 끝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는 경우가 많다. 목사는 그 환자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면서도 가족들이나 환자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곧 좋아질 것이라는 허언을 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경우는 억지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믿는대로 된다는 억지 믿음을 가지고 확언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믿음대로 움직이시는 우리들의 종이 아니시다. 그런데도 그런 터부니 없는 과대망성적 믿음을 발동시켜 [믿으면 살아 납니다. 기도했으니 좋아 질 것입니다.]라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말을 난발을 하고 병자가 죽던지 병세가 더 악화되면 그런 호언 장담을 한 목사는 아무 책임이 없고 믿음이 없는 환자나 가족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그런 경향이 있다.
사업을 새로 시작하는 경우에도 그런 짓을 하는 경우가 있다. 결혼에도 그렇게 한다. 믿음이 없는 성도들에게도 걸맞지 아니한 과도한 아첨성 칭찬을 해서 교만에 빠드린다. 이런 목사의 아무 보장성 없는 공 수표를 난발하는 언동이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실망을 주며, 목사에 대한 신뢰심을 잃게하는지 계산하고 대답하는 목사가 얼마나 될 것인가?
이런 허언을 남발하는 목사의 심리 속에는 옛날 선지자나 신약의 사도들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으니, 내 말도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겠다는 정말 기절 초풍할 심리가 깔려 있다. 이 말을 더욱 강력하게 묘사하자면 하나님께서 내 말을 들어 주셔야 한다는 상상할 수 없는 불충의 심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 건방지고 교만한 생각과 마음을 가진 목사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대하실 것인가?
솔직과 정직은 보장성이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고 잘못된 것은 솔직히 시인하여 사죄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뜨겁던지, 차던지' '예면 예요 아니면 아니다'라고 대답하라 하신다. 모른 것을 아는체 하고, 자신이 없는 것을 자신 있는체 하며, 큰 소리를 내면 큰 믿음을 가진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된다.
3. 책망은 부드럽게 하고, 칭찬은 크게하라.
나는 평생에 이 일을 잘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우리 아이들의 잘못를 책망할 때는 언제나 화가 난 상태에서 큰 소리로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잘못에 대한 큰 소리나는 책망은 신앙적으로나 교육적으로 아무 효과가 없다. 특별히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책망은 책망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잘 잘못을 고사하고 큰 상처를 주고 시험을 당하게 한다.
이런 일을 우리는 모세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민27:14)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제 너희가 내 명을 거역하고 그 물가에서 나의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물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니라"
성도들의 잘못에 대한 책망에는 신중한 처리가 따라야 한다.
우선 성경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교훈을 살펴 보자. "(마18:14-20) )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우선 잘못하고 있는 사람에 대하여
① 그 사람을 버리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② 1:1로 권면하되 듣지 않거든
③ 두 세 증인으로 증참케 하고 그래도 듣지 아니하면
④ 교회에 공개적으로 말하고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⑤ 포기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를 위해 쉬지 말고 기도를 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런 교회가 참 교회라고 하셨다. 내 경험으로는 성도들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 그 문제를 처리해 주시도록 맡기고 목사는 기도를 하고 인내하는 것이 좋을 것같다.
4. 표정 관리하기.
감정을 나타내지 말라. 중간 감정 표현이 좋다.
목사도 사람인지라 기분이 좋을 때는 좋은 얼굴을 할 수 있고 기분이 나쁠 때는 일그러진 표정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목사에게는 이런 인간의 기본적인 표정 관리가 자유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극도의 절제심을 가지고 표정 관리를 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좋을 때도 지나치기 감격적 표정을 짓지 말 것이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도 얼굴에 그 어려움을 나타내지 않아야 한다. 특히 목사는 설교 단상에서의 얼굴 표정 관리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모든 성도들의 눈이 집중되어 있고 모든 상도들의 귀가 신경질적으로 날카롭게 곤두 세워져 있는 바로 심판대와 같은 현장에서 얼굴 표정 관리를 어떻게 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내가 아는 목회를 잘 하시는 목사님이 있다. 그 분은 얼마나 표정 관리를 잘 하시는지 그 분의 이름을 말하면 가장 먼저 떠 올려지는 얼굴 표정이 온화한 웃음이다. 그 온화하심이 하도 감동적이여서 한 번은 우리들이 [목사님! 목사님의 얼굴 표정은 언제나 천사 같으신데 어떻게 그런 표정을 하실 수 있으세요]라고 물었다. 목사님은 예의 그 천사 얼굴을 하시면서
[그래요? 많이 좋아 보이는가 보죠.] [그럼요. 우리도 그런 얼굴을 가질 수 있으면 좋을 것같습니다] [고맙군요. 나도 처음에는 이런 얼굴이 아니였습니다. 우리 마누라가 내 얼굴은 성난 사자와 같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비디오로 설교를 하는 내 얼굴을 보고 나는 정말 깜작 놀랐어요. 저런 얼굴 표정에 성도들이 어떻게 은혜를 받을 것인가 할 정도였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은 이어졌다.
[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표정 관리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배우들의 표정 관리도 자세히 보게되고, 거울을 보고 내 얼굴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내 감정과 얼굴의 변화를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것들을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어려운 일이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표정 관리 때문에 설교에 지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목사로서의 가장 목사다운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노력을 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여러 목사님들과 같은 말씀을 듣게 되더군요. 그러나 무엇 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저 백에 백, 천에 천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욕심도 없애구요.]
5. 성도들이 감추고 싶은 것을 감추어 주라
우리는 교회를 개척하면서 성도들이 봉헌한 11조 봉투나 감사 헌금의 봉투를 일일이 뜯어 뒤집어 다시 사용한 일이 있었다. 글자 몇자 써진 봉투를 버리기가 너무 아까웠고 한달이면 그 봉투 값으로 나가는 재정도 수월찮은 것이였기 때문에 돈도 아끼고 자원도 아끼자는 의미에서 바쁜 시간에도 시간을 내서 나와 아내 둘이서만 이 작업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성도들이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특히 이런 일을 달가워 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는 떳떳치 못한 수입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교회 초등학교 교사 부부가 있었는데, 신앙 생활을 비교적 잘하는 사람들이였다. 교회 봉사도 잘하고 기도 생활도 잘했다. 그리고 그들 부부가 매달 드리는 11조는 초등학교 교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많은 헌금을 했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의 한 달 봉급이 얼마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 많은 11조가 모두 봉급의 11조인줄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들에게 [목사님, 거 봉투를 꼭 그런 식으로 뒤집어 제 사용해야 합니까? 우리 교회 제정이 그랗게 어렵습니까?]라고 힐난하는 것이 아닌가? 그 다음에 다른 이야기는 없었으나, 우리 부부는 그들의 말을 여러 가지로 분석해 보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선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드린 11조에 대해 다른 성도들이 알게되는 것을 꺼리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짐작해도 능히 아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만이 아니였다. 교회 안에 선생님들이 꽤나 많이 있었는데 대체적으로 봉투를 재 활용하는 일을 꺼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유는 내 수입에 대하여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을 싫어 하는 것이다. 그런데 봉투를 뒤집어 쓰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수입이 공개될 우려가 있고, 그렇게 자기 생활이 공개되는 것을 싫어하여 이런 항의를 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알고 곧 시정을 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목사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성도들이 지키고자 하는 자기들의 비밀을 자기들이 공개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에게 공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6. 성도들의 약점을 들추어 내지 말며, 아는체 말라.
목사에게는 성도들의 약점들이 너무 잘 보인다. 그 약점들은 세속적인 약점 즉, 공부를 많이 못했다던지, 돈이 없다던지 하는 따위의 것이 아니라 신앙 생활에서 오는 약점들이다. 기도 생활의 부족, 헌금 생활의 인색, 말씀 배우기의 게으름, 예배 불참하기, 전도에 대한 미온적 태도, 봉사 생활의 뒤 처지기, 쓸데없이 말 많이 하는 것, 참견하기 등등 수 없는 많은 약점들이 보인다.
그래서 목사들은 성도들을 만나기만 하면 그 성도에게 필요하다고 느끼는 신앙적 부족을 체우기 위해 많은 말을 하게 된다. 기도 생활을 게을리 하는 사람에게는 기도를 하라고 하고, 예배를 잘 드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예배에 빠지면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여 말한다. 가족들이 믿지 않는 성도들에게는 가족들을 전도하지 못하는 책임을 간접적인 방법으로 묻고 추궁한다. 그런 가르침과 설교가 몸에 배여 그런 말들이 듣는 사람에게 어떤 스트레스를 주는지 전혀 고려할 여지가 없다. 사실 목사가 그런 의식을 가지고 성도들을 타이르고 가르치고 설교를 한다는 것은 전혀 잘못이 없다. 그러나 상대를 긴장 시키고 약점을 들추어 내는 설교나 가르침이 어떤 효과를 가져 오는지 계산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듣는 사람이 목사의 말을 어떻게 받아 들이는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고 설교를 하면 기도하는 사람은 시험을 받지아니하지만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시험을 받는다. 전도도 마찬가지다. 11조도 마찬가지다. 목회는 믿지 않는 사람을 전도 하고, 믿는 사람은 더 잘 믿게 하며, 잘 믿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쳐 충성하도록 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게 하자고 한 일들과 말들이 듣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고 시험을 받게 한다면 목회를 잘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나는 주님의 막달라 마리아 대하시기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주님께서 마리아를 보셨을 때 어떤 점을 보셨을까? 그리고 마리아를 돌로 쳐 죽이려던 사람들은 그녀의 어떤 것을 보았을까? 그리고 주님께서는 왜 땅에 글을 쓰셨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여러분들은 너무 잘 아실 것이다. 사람들은 마리아에게서 음란한 죄악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흥분했다. 그들의 흥분과 주장은 매우 성경적이며 정당했고 당연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과 달랐다. 주님은 마리아도 회개하면 하나님의 훌륭한 자녀가 되고 아브라함의 정숙한 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 그리고 그 일은 바로 주님 자신이 하실 것임을 의심치 아니하고 믿으셨다. 즉 죄인에게서 하나님의 딸을 보신 것이다. 삭게오도 그렇게 보셨다.
주님은 흥분한 군중들도 그렇게 보셨다. 그들의 흥분은 당연하지만 그들의 흥분을 가라 앉히시고 주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도록 유도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마음을 가지기까지는 역부족이였다. 군중들은 손에 들고 있던 정의의 돌, 구약의 율법을 실천할 그 돌을 던졌다.
목사들의 충고와 격려와 설교들이 혹시 의분심을 가진 군중의 돌이 아닌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많이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그렇게 넘치게 받은 그가 그렇게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하고 교회 일에 소극적이며 만인이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인색을 떨다니----' 하며 주님이 가지시지 않는 쓸데없는 의분심을 가지고 설교하고 충고한 일은 없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목사는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해도 그 속에 역사하시는 살아 있는 겨자씨의 믿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죄인을 보고 흥분이 되거든 막대기를 들어 길에 앉아 글을 쓰라.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의분'도 '분'은 '분'이여서 죄다.
기도 못하는 사람, 11조 안하는 죄인, 전도 못하는 못난 성도, 말썽만 일으키고 목사를 괴롭히는 신앙의 망난이들을 인내와 사랑으로 기르지 아니하면 목회에 실패를 한다. 목회는 어자피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올바른 자녀 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못하는 부분을 대신 기도로 체워야 한다.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좋은 성도가 되도록 일하실 것이다.
7. 말씀만 전하고 은혜 받은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라.
목사가 성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 대하여 많은 목사들이 큰 착각을 하고 있다. 바울의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한다.
억지로 은혜를 강요하지 말라. 시험에 든다. 모든 일에 시기가 있듯이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 시기가 있으며 그 시기는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그들의 영 육이 아울러 복되게 되기 위해 진력할 뿐이다.
농부들이 농사를 지을 때 온갖 정성을 다해 물을 대며, 거름을 주고, 해충을 잡아 준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농산물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내가 사람을 변화되게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죄인을 구원한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종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며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이시다.
8. 언제나 단정하라. 마음. 몸가짐. 환경
목사의 24시간은 그야말로 긴장에 긴장의 연속이다. 마음도 긴장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몸 가짐과 환경도 긴장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긴장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요즘 직장인들이 겪는 긴장 보다야 견디기 쉬운 줄 알아야 한다. 우선 마음 가짐이 단정할 것이다. 마음이 단정하다는 말은 언제 누가 내 마음을 들여다 본다고 해도 험 잡을 곳이 없는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 가짐을 말한다.
몸 가짐을 단정히 하라. 언제나 정장을 할 것이며 그것이 불편함이 없는 일상복 차림이 되어야 할 것이다. 환경도 단정해야 한다. 주변이 단정하지 않고서는 마음이 단정할 수 없으며, 바른 설교가 될 수 없다. "(고전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라신 말씀은 교회의 질서 뿐만 아니라 목회자 자신의 마음이나 생활에도 적용되는 말씀이다.
9. 미리 아는체 말라.
목회를 하다 보면 성도들의 말 한마디로 그의 모든 것을 간파하는 통찰력이 생긴다. 즉 그 성도의 마음을 꿰뚤어 볼 수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도가 어떤 사정을 말하는 동안에도 중간 중간 그의 말을 막아 가며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앞질러 말하게 되고 목사의 통찰력에 놀라는 성도에게 '사랑하면 다 이렇게 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통찰력의 지나친 사용은 성도들의 경계심을 불러 일으킨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라. 당신이 누구에게 조금 말했는데 듣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알아 듣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미리 미리 말한다면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목사에게 있어서 통찰력은 목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크나 큰 역효과를 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 알지만 모른체 하는 것이 아는 것을 들어 내는 것보다 훨씬 더 유익하다.
▲ 목사들의 주의 할 점
10. 성도와의 상담
성도들과의 상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도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것보다 성실하고 진지한 태도로 성도의 모든 말을 한가지도 놓치지 아니하고 들어주는 성실한 경청에 있다. 성도는 자기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 자체로도 고민과 괴로운 문제를 해결 받는다.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목사에게 자기의 사정을 낱낱이 말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도하는 것이 기독교 상담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목사와 상담을 한 성도들 가운데 일부는 자기들의 그런 고민과 어려움과 치부들을 목사에게 말한 후에 크게 부끄러워하거나 후회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른 상담자인 목사가 성도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아도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성도들과 상담한 후 꼭 따라야 하는 마무리가 잘 되지 않았기 대문에 그런 일이 생긴다. 즉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고의적이던 실수든 간에 목사가 사석에서나 공석(설교, 도는 예화든) 그들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입에 담았을 때에 성도들의 이탈 현상이 생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안 다른 성도들은 목사에게 상담을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상담 후에 목사가 그들의 일에 무관심하고 상담을 의례적인 관습으로 해 주었다는 느낌이 들면 성도들을 상담을 한 일을 후회하게 된다. 목사가 자기들의 말을 듣고 지나치게 자기 문제들에 개입을 하면 싫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목사는 성도들과 상담 후에 그 상담의 결산을 매우 지혜롭게 해야 할 것이다. 그 결산은 상담을 한 성도마다 상황과 성격과 이해에 달리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대체적으로 성도들을 상담하는 목사는 다음과 같은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다.
①. 상담이라는 것을 아주 쉽게 생각한다.
나는 목회를 잘 해 볼 심사로 어느 해 여의도 어디에서 개설한 상담 전문 학원에 등록을 해서 6개월 동안 상담이라는 것을 배워 본 일이 있었다. 그 학원에 출강하는 강사는 우리 나라에서 내노라 하는 유명한 대학 교수들이 많았고 배우는 과목들도 노인 심리학을 비릇하여 그럴듯한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6개월을 배운 후에는 상담사 자격증을 주어 상담소를 개설할 수 있는 조건도 갖추어 주었다.
매주 3-4회씩 나가 6개월을 배운 후에 나는 몇 가지 특별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상담에 대한 내 무지였으며, 그 무지로 인해 아무라도 상담을 하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쓸데없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상담학이나 심리학이라는게 종잡을 수 없는 학문이라는 점이였다. 그것은 그 학문의 깊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심리가 근본적으로 체계화 될 수 없고 획일화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곳에서 자격증을 얻은 어떤 동창생들이 시내에 상담소를 개설했는데 상담 료를 받기커녕 찾아오는 가난한 사람들의 강제적인 도움 요청에 혀를 내 두르며 문을 닫아 버렸다. 목사들이 성도들을 상담하기 위해서는 7-8년의 상담학 공부를 하던지 아니면 (우리 나라에서는 그렇게 상담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교가 없는 것으로 안다) 인간의 심리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상담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목회 상담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상담에 대한 한 나는 너무나 무지하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상담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상담의 방법이나 기술이 아니라, 상담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그 목사의 만용에 가까운 상담에 대한 자신감이 상담한 성도들을 부끄럽게 해서 교회를 떠나게 하는 불행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②. 상담 자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대개 목사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기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해답을 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쯤으로 착각을 한다. 그래서 상담을 하러 온 성도들에게 무엇인가 확실한 대답을 주러 단숨에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그런 생각이 상담자의 말을 경청하지 못하게 만들고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하게 해서 상담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후회를 하게 한다. 이럴 경우에 상담자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경험을 말하며 목사의 의견과 생각을 상대방이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즉 문제의 해답을 목사가 하려 들고 상담자는 목사의 생각대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되면 다시는 그 성도는 목사에게 아무것도 의논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지 아니한 목사를 찾아 신앙 생활의 방랑을 떠나려 할 것이다.
③. 상담을 여상한 목회의 일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즉 심방이나 기도나 설교와 같은 수준의 목회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른 상담도 목회 중의 한 부분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상담은 특별한 목회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성도 개개인의 생각과 생활과 습관과 시간에 접촉되는 사안들이기 때문이다. 많은 성도들이 동시에 한 자리에서 듣는 설교와 다르며,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하나님 말씀 공부와도 다르고 기도와도 다른 성격을 가진다. 목사의 상담은 우리 나라의 경우에 대체적으로 심방 중에 많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일반적인 형태의 심방에서는 깊이 있는 상담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따지고 보면 우리 나라 목사의 목회 생활에서는 거의 상담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④. 상담을 성도의 약점 잡기로 생각하지 말라.
어떤 사람들은 카톨릭의 고해 성사는 사제들이 성도들의 약점을 이용해 그들을 지배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도구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상담을 하다 보면 목사의 심리에 이런 이상하고 요상한 마음이 생긴다. 이런 파렴치하고 이성을 잃고 목사의 양심을 저버린 상담에 대한 목사의 간악한 심리는 하나님 앞에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11. 가정사에 너무 깊이 개입하지 말라.
성도들의 가정 사에 너무 깊이 개입해서는 안된다. 가끔 어떤 목사는 자기의 사명을 지나치게 오버하여 성도들의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며 지나치게 개입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그와 같은 일에 흥미를 가지며 마치 자기가 성도의 대부가 된 양 처신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자세는 목회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성도들은 자기들의 생활이 자기들의 세계에서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 즉 목사나 다른 어떤 사람들이 자기들의 생활을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더욱 더 팽배해져서 오늘의 도시 교회 성도들은 목사가 예고 없이 자기 가정을 심방 하는 일도 싫어하고 젊은 성도들은 심지어 봄가을의 정기적인 심방도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대한 것도 알려지기를 거부하며 그 외의 모든 가정사에 대하여 간섭이나 충고를 받지 아니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그들은 목사가 설교나 성경 공부 시간에 제시하는 하나님의 말씀도 자기의 입맛에 따라 취사 선택하여 받을 것과 거부할 것을 스스로 결정하려 든다.
목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잘 지도하되 그들의 생각과 생활을 바르게 변화시켜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을 가진다. 그것은 매우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신앙을 빌미로 자기들의 사고 방식이나 생활 습관이나 가정 사에 개입하여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거부한다. 즉 자기들의 신앙을 자기식으로 하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목사의 영향력은 점점 약화되고 변화되지 아니하는 성도들의 모든 것에 대해 무력감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다.
이런 무력감과 성도와의 거리감을 해소할 수 잇는 방법은 한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목사가 성도들이 요구하는 생각과 생활을 철저히 감수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목사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기들은 정직하지 아니해도 목사는 정직할 것이며, 자기들은 세속적이여도 목사는 거룩할 것이며, 자기들은 돈을 좋아해도 목사는 물질에 초월하고, 자기들은 좋은 집에서 잘 살기를 바랄지라도 목사는 청빈과 가난을 친구로 하여 살 것이며, 자기들은 좋지 아니한 생활 습관에 젖어 있지만 목사는 언제나 천사와 같고 그리스도와 같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자기들은 기도하지 않아도 목사는 자기들을 위해 24시간 기도를 해 주고, 자기들은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 생존 경쟁을 하지만 목사는 죽더라도 하늘의 이슬만 먹고 살기를 바란다.
성도들의 목사에 대한 요구는 하나님이 되라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에 자기 목사가 얼마나 하나님 비슷하게 되었느냐에 따라 목사를 존경하고 목사의 말에 순종하려 든다. 그들의 요구가 충족되지 못한다면 절대 순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목사 내몰기나 목사 떠나기를 시도할 것이다.
이제 목사들은 한가지 타협할 수 없는 취사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하나님 같은 목사가 되느냐 아니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되느냐이다. 성도들에게 카리스마적인 지배력을 가지지 못한 목사는 언제나 "목사님"이라고 불리지 못하고 "목사"라고 불리며 어떤 경우에는 "목사 새끼"라고 불리게 된다. 우리 모두 "목사님"이 되자. 아무래도 목사가 "목사 새끼"라고 불리면 안 될 것 같다. 나도 수 없이 "목사 새끼"라는 말을 듣고 살았다. 그들의 비웃음과 조롱과 분노로 가득 찬 얼굴들과 핏빛 어린 눈들과 입에서 터져 나오는 "목사 새끼"라는 말을 등뒤로 들으며 하나님과 같이 되지 못하는 내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얼마나 좌절을 많이 했는지 모른다. 30여년의 목회 생활이 거의 이 지경이였다. 참으로 회한의 가득찬 세월이 아니였던가?
12. 목사의 속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같다고 착각하지 말라.
목사가 생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생각이다라는 사고 방식을 경계하라. 목사가 성도들이나 신앙 생활에 가장 어려운 점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각하고 처신하기'일 것이다. 하물며 다른 사람인 성도들에 대하여 어찌 목사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런데 목사들은 기도하는 가운데 어떤 성도에 대한 특별한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 목사의 생각이 곧 그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즉 목사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대신 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는 식의 사고 방식이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뜻의 계시라기 보다는 평소에 그 성도에 대한 목사의 생각일 수가 많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성도들이 목사의 말에 따르지 아니하면 불순종했다고 하여 그를 멀리 대하는 경우가 생기고, 목사의 말에 따르면 순종 잘하는 자기 사람쯤으로 생각하여 가깝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순종심은 목사의 지시에 응하고 안하고에서 찾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서 찾아야 한다.
한가지 실속없는 실례를 들어보겠다.
어느 날 친구 목사에게 어느 기도원에서 한국 교회를 위해 평생 기도만 한다는 권사가 한 사람 찾아 왔다. 그 권사는
[목사님, 제가 기도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목사님에 대한 계시를 해 주셔서 받아 왔습니다.] 친구는 어안이 벙벙해서
[아니 무슨 기도를 받아 왔는데요]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크게 쓰시려고 40일 금식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목사가 40일 금식 기도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일이다.
그래서 친구는 [그래요. 40일 금식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왜 권사님에게 말씀하셨지요? 나도 매일 기도를 하고 있으니 내게 말씀하셨으면 좋았을텐데요.] [글쎄요. 아마 목사님의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닐까요?] [고맙군요. 앞으로 그런 일이 있거든, 박목사에게 직접 말씀하시라고 부탁 좀 드려 주세요] 하나님께서 목사가 아닌 성도 본인에게 직접 무엇인가 말씀하시고 지시하시는 일이 있지 아니할까? 그것이 목사가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지 아니할 때 어떤 결과가 생길 것인가?
13. 교회를 떠난 성도들에 대한 미련을 속히 떨치라.
목사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이 사랑하는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일일 것이다. 멀리 이사를 가서 떠나는 일도 속이 상한데 바로 옆에 있는 교회로 교회를 옮겨 다니면서 목사를 비방하고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자기의 교회 떠남을 정당화하는 성도들을 대할 때 목사는 정말 견딜 수 없는 좌절감과 비애를 함께 느끼게 되고 당장에 목회를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일어난다. 그런 몹시 속 상하는 일을 당하면 목사는 자제력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떠난 그가 남긴 목사에 대한 허위 사실을 해명하고 변명하기 위해 설교 시간에 그에 대하여 공격적인 말을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이건 정말 목사가 스스로 함정을 파고 그 속으로 뛰어 드는 것과 같은 실수가 된다는 것을 알라.
나는 지금까지 자연스럽지 못한 방법으로 교회를 떠난 성도들에게 왜 교회를 떠나야 하는지의 이유를 속 시원하게 들어 본 적이 없다. 그가 교회를 떠난 이유를 혼자 갖은 고민을 하며 추측을 할뿐이다. 그런데 이런 내 나름대로의 추측을 강단에서나 사석에서 말하므로 써 말한 나나 떠난 성도나, 그 말을 듣고 있는 성도들에게 덕이 되지 못한 일들을 수없이 경험했다.
이런 어리석은 짓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실수가 된다.
①. 그런 사람을 생각하고 설교를 하면 남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상처만 받는다. 들어야 할 사람은 여기 없다는 것을 알라.
②. 떠난 성도가 목사를 비방한 사실을 모르던 사람들이 목사의 해명성 발언으로 인해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더 큰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목사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을 한 사람에게도 일리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목사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에 대한 순수한 생각이 오염되는 것이다. 그렇게 성도의 목사에 대한 생각을 오염시키는 것은 목사가 비방하고 떠난 성도들의 말에 대하여 해명을 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았으면 목사를 사랑하는 성도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 혹 알더라도 목사가 해명하는 것보다 더 목사를 이해하고 동정할 것이다.
③. 교회를 떠날 마음을 먹은 성도들은 어느 땐가 반드시 교회를 떠나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둘 것이다. 교회를 떠난다고 말하고 다니는 성도를 목사가 설득하고 회유하여 떠나지 못하게 했다고 해도 그가 평생 교회를 잘 섬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는 그가 교회를 떠난다는 말에 대하여 목사와 성도들이 자기를 어떻게 잘 대해 주었으며 어떤 반응을 했는가를 알기 때문에 조그마한 불만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면 다시 그 일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성도들은 교회 생활에서 목사와 다른 성도들에게서 받은 은혜는 오래 동안 기억하지 못하고 섭섭했던 일들이나 시험을 당해 고통스러웠던 일들은 절대 잊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그렇게 잊어버릴 수 없는 일들이 세월이 감에 따라 자꾸 누적되고 폭발하는 때가 있다. 사실 교회 생활에서 받은 은혜와 격려와 위로가 훨씬 큰 것인데도 그것과 이것을 상쇄한다 던지 은혜를 더욱 강조해 기억하는 경우에는 교회를 떠나지 않지만 불평이 쌓인 경우에는 교회를 떠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은혜를 망각한 버릇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다.
④. 떠난 성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라. 와도 못쓴다. 다시 시험에 든다.
교회와 목사를 근심하게 하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여기 저기 다녀 보다가 다시 교회를 찾아오는 일이 있다. 목사는 그를 반기며 기회도 그를 반겨 그의 원래의 위치를 회복시켜 주고 한 가족으로 대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다시 돌아 온 그는 회개하고 돌아 온 탕자가 아니라, 불평과 불만을 마음속에 지우지 못하고 물위에 겉도는 기름 꼴을 하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기회가 다시 주어지면 전에 했던 그 반역적인 일을 다시 해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목회에 지장을 주는 반역을 한다. 이런 대체적인 경향을 간파하고 있는 목회에 노련한 목사는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⑤. 자기가 섬기던 교회를 떠난 성도들을 자기 교회 교인을 만들어 사역하게 한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 계셨다. 그 분은 이미 작고하신 분인데 한남동의 산 위에 있는 모 교회를 담임하셨다. 원래 그 목사님은 대구 지방에서 목회를 하셨지만 70년대에 서울로 올라 오셔서 그 때 당시에는 아주 약한 작은 교회인 그 교회를 담당하셨다.
그런데 그 목사님에게는 아주 특별한 달란트가 있었다. 서울 시내에 있는 교회에서 무슨 무슨 일로 목사와 교회를 버리고 떠나 방황하는 장로들이나 집사들을 자기 교회로 데려와 정말 모범적인 성도들이 되게 해서 교회를 섬기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목사님은 그들과 함께 지금의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고 성전을 건축했으며 그 옆에 교육관까지 잘 건축해서 성경 학교를 유치하기도 하고 아주 유명한 부흥 목사를 배출하기도 했는데 그 분이 한얼산의 이천석 목사님이셨다. 나는 그 목사님이 어떤 달란트로 그런 버린 자들을 거두어 좋은 하나님의 일군 되게 했는지 잘 모른다. 오로지 신비하고 놀라울 뿐이다. 이는 마치 다윗이 악한 자들과 비류들을 모아 다윗 왕국을 세운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삼상30:22) 그 목사님은 성씨가 임씨 셨다
14. 스트레스 푸는 방법을 개발하라.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요새 말로 하자면 우리 주님께서도 스트레스 때문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해야 할 것이다. 목사의 스트레스는 아무데 서고 풀 길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목사들이나 장로들이 만나면 많이 싸운다. 쌓인 스트레스를 풀려고 그러는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다. 만날 때마다 싸울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떤 목사들은 고스톱을 하는데 이 고스톱이라는 게 건강에도 나쁘고 또 다른 스트레스를 가져온다고 한다. 바둑을 두는 목사도 있다. 심지어 어떤 성도는 말하기를 술을 마시는 목사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목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스트레스 푸는 방법은 아마도 여행일 것이다. 목사들의 여행에는 한가지 특징이 있다. 가급적이면 부부 동반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목사들이 가정에서도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가급적이면 목사들끼리 여행을 하려 한다.
그래야 벌거벗은 심정으로 피차의 긴장된 심정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행을 가서 하는 일들이 가관이다. 밤이 세도록 화투를 친다. 아니면 목사가 아닌 것처럼 객소리들을 지껄이면서 여행지의 이곳 저곳을 배회하면서 마치 술취한 취객의 흉내를 내 보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 가는 곳은 볼링장에 가 내기 시합을 한다. 그리고 온천장으로 가서 발가벗고 목욕을 한다. 아침에도 하고 저녁에도 하고------
단독 여행을 즐기는 목사도 있다. 혼자서 하염없이, 정처 없이, 목적 없이 차를 몰아 발 가는 데로 마음가는 데로 돌아다니는 것이다. 가다가 쉬고 싶으면 아무데고 들려 먹고 쉰다. 이것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아에 세계 여행으로 간다. 그럴 때 언제나 교회에 내 놓는 여행의 목적은 해외 집회 인도나 회의 참석이다.
불신자들이 스트레스를 푸는 가장 손쉬운 방법 중의 하나는 노래방에 가 노래를 싫도록 부르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술을 한잔 걸치면 거나해져서 신바람 나게 뛰고 노래를 부른다. 남녀가 어울려 부르기도 하고 혼자 부르기도 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뛰고 노래를 부르고 나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친구 목사들이나 노회 목사들과 노래방에를 가 본 일이 있다. 그런데 정말 재미가 없었다. 그것은 노래를 부를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선곡들 가운데 부를 줄 아는 노래는 겨우 찬송가나, 이런 자리에서 분위기에 영 어울리지도 않는 산타루치아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나는 내 나름대로 스트레스라는 것을 푸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것은 글을 쓰는 일이다. 감정이 격해졌을 때 나를 격동시킨 그 엄청난 흥분을 있는 그대로 컴퓨터의 아래 아 한글에 마구 기록을 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의 욕도 쓴다. 하나님께 말씀 드릴 수도 없고 목사의 체신 때문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어려운 일들도 14인치 컴퓨터의 모니터에서는 모두 표현할 수 있다. 그러면 화가 풀리기도 하고 나중에 써진 글들을 통해 내 자신의 잘못을 발견할 수도 있다. 나는 내가 터득한 방법이 대단히 좋다고 생각을 한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내 자신의 그 때 그 감정이나 스트레스를 받게 한 일들과 사건들도 다시 돌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목사는 자기 스트레스는 스스로 푸는 방법을 터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도와 함께 어울린 스트레스 푸는 방법은 절대 금물이다.
어떤 목사는 성도와 함께 여행을 하기도 하고 목욕을 하기도 했다. 바둑도 함께 두고 고스톱도 함께 하는 목사가 있다. 인간적으로 가까워 질 수 있고 친구가 되어 속마음을 털어놓고 동무 삼아 함께 세상살이 동반자가 될까 싶어서다. 그러나 이런 목사의 생각은 정말 큰 착각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목사와 성도는 친구가 될 수 없으며 인생의 동반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종으로 만난 것일 뿐이다. 이런 목사의 하나님의 종 의식의 결여로 말미암아 결국 목사도 시험을 당하고 그 성도도 시험을 당한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하여 나는 항상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진다. 목사가 목사이니 만큼 목사가 받는 스트레스를 기도하고 찬송하며 예배를 드려 풀어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속물인 모양이다. 이런 신령한 방법으로 스트레스가 풀리기는 한다. 그런데도 가끔 여행을 가고 싶기도 하고 극장에 가서 신나게 두드려 부수는 영화를 보면서 쾌감을 느끼기도 하며 객쩍은 이야기들을 써서 많은 사람들이 보아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아무래도 계속 성화되어야 할 죄인을 벗지 못한 모양이다. 하여튼 목사는 어떤 스트레스든 신속히 푸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죄가 아닌 다음에야 하나님께서 과히 나무라시지는 않을 것이다.
15. 성도나 부 교역자에게 폐를 끼치거나 무료 봉사를 시키지 말라.
"(딤전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목사는 가급적이면 누구에게 도움을 받지 않고 사는 것이 좋다. 그것은 목사의 직책이 남에게 도움을 받기보다는 도와주는 직분이기 때문이다. 교회 무료 봉사를 강요하거나 유도해서는 안된다.
나는 컴퓨터를 오랫동안 가지고 있지만 컴퓨터의 기계적 내용은 잘 모른다. 그런데 우리 전도사 가운데 한 사람이 상당히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연히 그에게 교회나 내 소유의 컴퓨터를 만지게 했고 나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내 컴퓨터를 손보아 주면서 나와 아주 각별한 친구가 된 양 착각을 하기 시작을 했다. 이 일로 그는 목사에 대한 어떤 존경심을 잃어 버렸으며 내가 컴퓨터를 잘 모르는 것이 목회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으로 확대 해석이 되어 교회의 모든 일을 자기와 의논해야 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그는 이런 착각 속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교회 사역에 대하여 성도들을 상대로 비판하는 일이 있었으며 나중에는 자기 의견을 수렴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노골적인 반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리고 자기가 무능해서 성장하지 못하는 학생부에 대한 책임도 교회의 책임으로 돌려 원망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결국 나에 대한 책임 전가이며 원망 이였던 것이다. 결국 나는 그를 교회에서 내 보낼 수밖에 없었고 그런데 인해 나도 상처를 받고 그도 상처를 받아야 했다.
이런 일도 있다. 여름 수련회를 위해 학생들을 수송해야 하는데 차가 없어 성도의 차를 빌렸다. 차를 빌려 학생들을 수송해 준 집사는 기꺼이 그 일을 잘 감당했지만 이 일로 인해 그는 자기가 학생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데 대단히 큰 일을 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즉 그가 학생들이나 성도들에게 어떤 특별한 일을 했음으로 그만한 대우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제직회의 발언권이 강해지고 결국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가 교회에 시험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거르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목회를 하다 보면 이런 사소한 일로 인해 자기의 섬김을 과대 평가해서 교회에 큰 누를 끼치고 목회에 큰 지장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이다.
거의 모든 친구 목사들은 교회 차를 운행하는 집사들이나 성도들에 의해 피해를 당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처음에 기꺼이 봉사하겠다고 나서지만 어찌된 일인지 한결같이 그 봉사의 결과가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다. 우리 교회에서도 주일마다 교회 차를 운행하는 집사들이 여러 명 있었는데 한결같이 그 결과가 좋지 아니했다. 한 사람은 나를 이단이라고 욕하며 교회를 떠났고, 한 사람은 나를 쫓아내기 위한 주동자로 변신했으며, 한 사람은 다른 차 운전하는 집사와 크게 싸워 교회를 상처 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생기는 것은 그들의 교회 섬김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한 때문이다. 자기들의 봉사가 교회에 대단한 유익을 준다고 생각하고 그에 따른 대접이나 인사를 기대하고 그 기대가 목사에게 집중되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가 그들의 섬김에 대하여 과대 칭찬을 할 수 없는지라 그저 고맙다는 인사 정도로 끝이 나는데 이에 대한 반감이 점진적으로 누적되어 터무니 없는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비단 차 운행뿐이 아니다. 목사에 대한 개인적인 어떤 봉사나 섬김, 또는 교회의 섬김에 대해 대체적으로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
그러므로 차를 운행할 경우에 그에 따른 적절한 금전적 보상을 하는 것이 좋다. 한 때 나는 교회 차를 주일만 와서 운전해 주는 대리 운전을 시킨 일이 있었다. 그 사람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 였는데 주일이 되면 아주 정확한 시간에 와서 대기하고 있다가 정확하고 친절하게 성도들을 수송했으며 나에 대해서도 각별한 예우를 해 주었다. 그것은 그에게 수고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사가 차를 무료 봉사로 운행하면 목사가 상당히 그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사태가 생긴다. 아무래도 세상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구속력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것보다도 얼마의 수고비를 지불하는 것이 더 힘이 있는 것 같다.
목사들은 성도들에게 이름도 없고 빛도 없고, 값도 없는 봉사를 강요하거나 유도하지 말라. 처음에는 잘할지 모르나 사람이 언제나 한결같지 않는지라 결국 그 무료 봉사로 인해 시험에 들어 사람을 잃게 되고 말 것이다. 정말 무료 봉사를 시킨 양이면 한 달이던 두 달이던 시한을 두고 적당한 때에 명예롭게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넘길 수 있도록 장치를 해 놓아야 한다. 그리고 수고에 대한 영광된 명예를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교회를 위해 봉사를 하고 그런 영광을 받아도 되는 것인가? 과도한 칭찬을 사람을 교만하게 하여 못 쓸 사람이 되게 한다. 그래서 아에 무료 봉사를 유료 봉사로 바꾸는 것이 나중에 뒷 탈을 없에는 좋은 방법이다.
교회 차 운행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차를 타고 다니는 성도들의 입에서 온갖 이야기들이 나오며 교회의 파고를 조절하는 장치가 차를 운전하는 집사의 입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차장 관리, 교회 청소, 성도들과 교역자들의 식사 대접하기등 모든 봉사에 지혜롭고 슬기로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을 오래 시켜서는 안된다.
16. 성도들의 이윤 추구를 존경하라.
"(롬13: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목사들은 성도들을 거의 천사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성도들도 목사를 그렇게 생각하며 존경한다는 큰 착각을 한다. 그리고 성도들을 목사인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스스로 단정한다. 그래서 성도들 가운데 상인이 있으면 몇 가지 생각들이 종합되어 성도의 가게에 가 물건을 사고자 한다. 또 우리 교회를 나오지 않더라도 소개를 받아 신앙 생활을 아주 잘한다는 성도의 가게에 가 필요한 것을 구입하는 경우가 있다.
우선 상인인 성도는 적어도 목사를 속이지 않을 것이며, 좋은 물건을 다른 곳보다 더 값싸게 팔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물건을 속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돕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목사의 생각에 맞도록 잘해 주는 성도들이 많이 있을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정말 기대한 것보다 더 목사를 사랑하고 존경해서 잘 해 주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 다수의 성도들은 성도이지만 상인이기 때문에 그런지 목사인 나의 생각에 훨씬 못 미치는 상술을 목사에게도 적용했다.
에어컨을 한 대 사서 방에 설치를 했다. 친구 목사가 자기 교회 성도의 대리점을 소개해 주어 두 말하지 않고 그 집사가 소개하는 물건은 달라는 값을 다 주고 샀다. 아주 잘 해 주는 것이라고 해서 매우 만족하게 생각을 하고 구입을 했다. 그 집사는 목사님 댁이기 때문에 설치비는 받지 않을 것이고 하면서 친절하게 설치도 해 주었다. 나는 그 집사를 친구에게 치하하고 그런 좋은 집사를 소개해 준 것에 감사해서 점심을 샀다. 그런데 우연히 용산에 가 같은 물건을 알아보았더니 적어도 20만원은 더 비싸게 구입했다는 것을 알았고 에어컨을 구입할 때에는 의례 설치해 준다는 사실도 알았다. 정말 입이 씁씁했다.
친구들과 아울러 남쪽으로 여행을 했다. 고추장이 유명하다는 순창에 들려 친구가 잘 아는 집사인 사람에게 고추장을 샀다. 아주 싼값으로 가장 좋은 것을 구입했다고 모두 좋아했다. 그런데 서울의 이 농수산물 센터에서 똑같은 고추장이 우리가 산값보다 적어도 몇천원 이상 싼값으로 팔리고 있음을 알고 농수산물 센터에 가 고추장 값을 본 것을 후회했다.
이런 경험들은 목사들에게 얼마든지 있는 일이다. 상인은 어디까지나 상인이다. 그 분들은 이익을 남기는 것을 원칙으로 세상을 산다. 그런데 목사들은 자기가 목사이기 때문에 상인인 성도들이 자기에게는 이익을 붙이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이익을 붙였다는 것을 알면 서운해하고 그 성도를 나쁘게 생각한다. 그것은 목사의 잘못된 생각이다. 성도의 장사에 이익을 남겨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상도의를 존경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목사가 성도들의 가게를 이용할 때는 물건을 선택할 때 그들이 추천하는 것을 사게 되고 물건값을 흥정할 수 없어 부르는 대로 지불할 수밖에 없고 나중에 바가지를 썼는지 안 썼는지를 저울질하게 된다. 다른 목사님들은 어쩐지 몰라도 나는 그런 일을 몇 번 당하고 나서 그런 못된 버릇이 생겨 버렸다. 그래서 나나 아내는 목사들이 소개해 주는 성도의 가게를 찾지 않는다. 모르는 상인을 찾아가서 물건값도 흥정하고 흥정해 놓고도 이리 저리 다니면서 더 싼 물건을 찾아다니면서 가장 좋은 물건을 가장 싼값으로 구입한다. 그랬더니 아주 마음이 편안했다. 시험받을 일이 없는 것이다.
목사가 아직 덜되어 그렇다. 정말 주님의 마음을 가진 목사라면 성도가 운영하는 가게에 가 그가 그 물건을 팔아 가장 적절한 이윤을 가지도록 도와주면서 거래를 하고 그가 적절한 이윤을 남긴 것에 대하여 그와 같은 마음으로 기뻐해야 할 것이다. 그런 거룩한 마음이 생기지 않거든 성도인지 아닌지를 모르는 사람의 가게에 가 물건을 사라는 말이다. 그래야 편하다.
17.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지 말라(1)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히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목사들이 범하는 잘못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나는 한 동안 이 문제로 깊이 기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지 않기를 기도했는데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인지를 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죄를 범했다. 그러나 살다 보니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어 여기 기록한다. 성경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 화를 당한 사람이 많이 있다. 모세는 자기가 하나님인양 물을 달라 하는 사람들에게 분노 해 화를 당했고(민20:8-10), 사울은 자기가 하나님인양 스스로 높아져 버림을 받았다.(삼상15:22, 28:18)
목사는 흔히 자기도 모르게 이런 사특한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죄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런 사람이 였다. 이런 짓은 대단히 두려운 일이다. 종이 주인이 받아야 할 영광을 가로챈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짓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 영광의 겉자락도 욕심 내서는 안된다.
우리 교회에 신앙 생활을 시작한지 2년쯤 되는 송집사라는 여집사가 있었다. 그 남편은 믿지 않는 사람으로 송집사의 열심 있는 신앙 생활을 마땅치 않게 여겨서 늘 핍박을 했다. 송 집사는 하나님과 가정 사이에서 방황하고 믿음의 생활이 늘 흔들렸다. 나는 송 집사가 믿음에 굳게 서서 남편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일상적인 신앙 생활을 통해서는 가정의 어려움을 극복할 만한 신앙으로 성장하기에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판단되어 남편이 출장을 간 어느 여름에 이천석 목사님의 한얼산 기도원으로 데려 갔다. 30여명의 성도들을 부 목사에게 잘 보살피도록 당부를 하고 나는 교회로 돌아 왔다.
그런데 목요일 저녁에 급한 전화가 왔다. 송집사가 집회 중에 난동을 부려 기도원 전체가 야단법석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송집사에게 특별한 은혜 체험을 주신 것으로 확신을 했기 때문에 별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급히 차를 몰아 기도원에 도착을 했다. 기도원에 가 있던 우리 교회 성도들과 다른 방의 성도들은 여기 저기 모여 웅성거리며 수군거렸다. 내가 보니 송집사는 너무나 강력한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마치 정신 이상이 된 사람처럼 정신을 잃고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반쯤 가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언제부터 이런 상황입니까?]
[저녁 집회 중에 통성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몸을 뒤틀더니 쓰러졌어요]
[기도원 목사님은 오셨다 가셨나요]
[예, 한 시간 전쯤 다녀 가셨는데요]
[무엇이라고 하시던가요]
[걱정 말라고 하시던데요. 기도원에서는 흔히 있는 일로 좀 특별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내가 볼 때도 송집사는 사귀가 들렸다거나 정신 이상이 되었다거나 할 수 없는 아주 건강한 은혜 체험을 했으며 정신이 들면 모든 것이 새로워 질 것이라고 확신되었다. 감히 그런 능력 있는 예배 중에 마귀가 성도들을 농락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 집사는 밤새 깊은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났다. 그리고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첫 사랑에 감동된 성도가 되어 기쁨과 은혜가 넘쳤으며 기도원에서 돌아 와 교회 섬기기와 말씀 읽고 듣기에 총력을 기우리고 가정에서도 남편과 신앙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아니하고 참고 견디면서 승리해 나갔다. 결국 일년쯤 뒤에 송집사는 그 남편과 친정, 시부모님들을 모두 하나님께 인도하는 놀라운 결실을 맺었다. 특별히 시 보모님들은 며느리를 통해 은혜를 받고 넓은 아파트를 선물로 사 주기도 했다.
그 후에 송집사는 나를 끔찍이 존경하고 사랑했다. 순종을 잘했다. 아주 적은 정성이지만 정성을 다한 선물도 가져 왔다. 그렇게 은혜를 받고 착하게 신앙 생활을 잘하는 송집사를 나는 정말 특별한 정을 느끼며 아꼈다. 그리고 송집사가 나에게 그렇게 잘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은혜를 받도록 인도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송집사가 나를 서운하게 했다. 우리 교회가 있던 교회에서 차로 15분 정도 되는 곳에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을 때 남편을 핑계로 교회를 떠난 것이다. 남편의 친구 목사가 시무 하는 근처의 다른 교회로 다녀야겠다는 것이 였다. 나는 다른 성도들의 그런 말 보다 송집사의 그 말에 너무 실망을 했다. 그러나 결국 송집사는 교회를 떠났고 그가 남긴 상처는 오랫동안 아물지를 못했다.
그러나 지금 송집사를 생각하면 내가 잘못 생각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내게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닌데 내가 그에게 은혜를 주었다고 생각하여 나는 그에게 신앙적인 은인이라고 스스로 나를 생각한 점이다. 그런 잠재의식 때문에 송집사는 절대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을 했고 나를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 한가지는 송집사가 나에게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사랑에 그렇게 강력히 감동이 되어 온 식구들을 구원할 수 있었으니 나를 자기들의 식구들, 특히 남편보다도 더 사랑하고 의지할 것이라고 착각을 했다.
이런 착각은 참으로 놀라운 착각이 였다. 아무리 목사가 성도들에게 큰 은혜를 끼쳤다고 해도 스스로 성도들의 남편이나 아내 보다 더 나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귀하게 생각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나는 당시에 그런 착각에 빠져서 송집사가 절대적으로 남편의 말을 따르지 않고 남편을 꺾고 교회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송집사가 남편을 따라 교회를 떠났다. 나는 그 일로 송집사에 대한 실망감은 견딜 수 없었고 이로 인한 상처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이런 상처와 괴로움은 순전히 내 잘못된 탓이다.
설혹 목사가 어떤 성도들에게 신앙적 은인이라고 해도 가정을 더욱 소중히 생각하도록 지도해야 하는 것이며 목사보다도 부모님을 더 공경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나는 그것을 당연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 가족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고통을 당했으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교만하며 자만한 목사였는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종일 뿐이다. 나의 인도로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았다고 해도 그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사랑하셔서 주신 은혜이지 내가 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만일 그런 사고 방식을 가지고 목회를 한다면 그는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과 치하를 도적질하는 자가 되어 결단코 목회가 잘 되지 않을 것이다.
18.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 말라.(2)
"(시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훔치는 일 가운데 이런 일들도 있다. 내가 안수를 해서 장로나 안수 집사나 권사로 세운 사람, 결혼 주례를 해서 부부가 되게 한 사람, 개업식에 참석해서 축복 기도를 해 주었더니 장사가 잘된다고 생각하는 경우, 장례식을 해 주어 그 집안에 잊을 수 없는 큰 은혜를 끼쳤다고 생각하는 경우, 내가 세례를 베푼 사람 등등--- 목사의 매사에는 "내게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 대한 스스로 '은인 의식'이 깔려 있다.
많은 목사들이 성도들에게 견딜 수 없는 배신감을 느끼고 고통을 당하는 것은 이런 '은인 의식' 때문일 수가 많다. 다시 말하면 이런 '은인 의식'이 없으면 전혀 고통을 당하지 않을 일도 이 의식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는 말이다. 이런 '은인 의식'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철저한 종의 의식을 망각한 때문에 생긴다.
그래서 주변의 친구들이나 내 경우에 흔히 "내가 장로로 세웠는데, 그 놈이 나를 배신해????"라는 말을 듣는다. 어떻게 목사가 성도를 장로로 세울 수 있다는 말인가? 장로는 성도들이 투표를 하고 절차에 따라 인수를 해서 장로가 되게 하는 것이며 이 일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알아 하시는 일인데 목사 자기가 장로를 세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혼 주례도 마찬가지며 장례식도 마찬가지다.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변화되면 목사들은 흔히 "내 설교에 은혜를 받고 변화가 되었으니 나는 그 성도의 영적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내가 그 기도원에 데려다 주었으니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해서 변화되니 성도의 대부 정도로 스스로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성도들에게 무례한 생각을 하게 되고 자기를 그 성도의 지배자 내지 평생 나에게 은혜 갚아야 하는 사람쯤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은혜 받은 성도가 자기와 상관이 없는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신앙 행위를 하게 되면 큰 배신감을 느끼고 고통을 당한다.
친구 목사가 교회에서 쫓겨나게 되었을 때
[내가 그 사람을 장로로 세웠는데 그럴 수가 없는 일이다]
[내가 그 사람을 주례해서 결혼시켰는데 그럴 수가 없는 일이다]
[내가 그 아버지 죽었을 때 어떻게 했는데 정말 사람으로서는 그럴 수가 없는 일이다.]
[내게 세례를 받은 사람인데-----]
이런 말들을 흔히 들었다.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훔치는 도적들이나 하는 말을 목사들은 아무 양심의 가책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이 지껄이는 것이다. 그런 사고 방식과 행동을 하고 있으니 교회에서 쫓겨 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라. 한가지도 목사가 한 일은 없다. 설혹 무엇을 했다고 해도 그 일이 그렇게 되기까지의 모든 일에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일부분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종으로 심부름을 한 것이지 목사가 한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거대한 빌딩을 건축하는데 삽질을 하며 일군이 되어 일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 빌딩은 내가 지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실없는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장구한 섭리와 역사 하심의 극히 일부분에 잠깐 무엇인가를 해 놓고 마치 자기가 그 성도의 모든 것을 해 준 것인양 은혜 운운하며 그 하잘 것없는 일로 인해 그 성도가 평생 자기의 신복이나 되는양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미련한 착각인가를 생각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목사들에게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들인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착각이요 정신 이상이 아닐 수가 없다.
[내가 기도해서 그 사람의 병이 고쳐졌는데 그럴 수가 있는가?]
[그렇게 사랑을 해 주었는데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자식 같고 누이 같고 친구 같았는데-------]
[평생 그렇게 기도를 해 주었는데 그럴 수가 있는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한 도적 목사들이 받아야 마땅한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벌을 너무 많이 받았다.
▲ 목사의 금기 사항
19. 어떤 경우에도 돈 이야기하지 말라.
"(마24: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뇨"
"(막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오늘의 모든 사람들은 돈에 대하여 예민하고 민감한 반응을 나타낸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목사가 성도들에게 돈에 대한 말씀 즉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는 없다. 가르쳐 바르게 순종할 수 있도록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한 설교나 가르침은 대단히 신중하게 해야 한다.
우선 성도들에게 돈 이야기를 하지 말라. 11조도 말하지 말고,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대해서도 특별히 힘을 주어 광고를 하지 말고 아무리 굶어 죽게 생겼어도 성도들에게 돈을 꾸어서는 안된다. 여하튼 돈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는 않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백배 더 낫다. 특히 교회 재정이 건축이나 다른 일로 어려울 때 돈을 빌려 달라고 직접 말하지 말라.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목사의 목회 생명을 스스로 단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11조는 교회 생활을 몇 달만 해도 잘 알게 된다. 특별히 광고를 하고 설교를 하지 않아도 매 주일 드려지는 11조에 대한 기도로 인해 아주 쉽게 알려진다. 성도가 11조를 하게 하기 위해서는 말 보다 11조를 할 수 있는 믿음을 그에게 주십사 하는 목사의 기도가 우선이다. 기도만 하고 기다려야 한다. 11조, 기도, 전도, 교회 섬김의 기초적인 교회 생활을 강조했을 때 시험을 당하는 사람은 그런 일들이나 다른 성도의 의무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1조를 말했을 때 시험을 받는 사람은 11조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11조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럼으로 그가 그런 기초적인 의무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목사는 기도를 해 주며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말하고 가르치려면 같은 입장에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가르치게 하라. 11조를 드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하고 기도나 전도를 해서 받은 바 은혜를 간증하게 하라. 그리고 동행하게 해서 가르치는 것이 좋다.
나는 성질이 급하고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원색적이여서 돈 이야기가 성도들에게 해롭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흔히 강단에서 11조나 기도에 대하여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하곤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기대와 정 반대였다. 성도들, 특히 그런 하나님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는 어린 성도들은 모두 시험을 당하여 교회를 나오면서도 죄인 인양 얼굴을 들지 못하고 결국 교회를 떠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되 고도의 지혜를 가져야 한다. 죽을 먹고 우유를 먹어야 하는 어린아이에게 맛이 있다고 오징어를 먹이고 불고기를 먹이면 탈이 나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롬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라고 하셨고 "(고전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라고 하셨다.
성도들의 경조사에 대해서도 지나친 광고와 강요는 절대 금물이다. 성도들은 자기와 경조 사를 당한 성도와의 개인적 관계에 따라 경조사에 참예를 한다. 그런데 목사가 자기를 표준하여 경조사 참여와 도움을 강요한다면 성도들에게 무례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목사가 그렇게 강요하지 않아도 개인간의 관계에 따라 더욱 잘하는 사람도 있고 무심한 사람도 있다.
목사는 성도들에게 돈 이야기를 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나는 교회를 개척하다 보니 그런 일들이 많았다. 교회가 어떤 일로 긴급한 자금이 필요한데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 돈 이야기를 할 것인가? 그래서 광고 시간에도 돈 이야기를 하고 개인에게도 돈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목사에게 돈 이야기를 듣는 성도의 입장을 한 번 생각해 보라. 집에 돈이 있는 사람은 자기 집에 있는 돈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가 어렵다고 하는데 그것을 안 내 놓을 수도 없고 내 놓을 수도 없는 갈등을 겪게 된다. 그리고 혹시 하나님의 일을 돕기 위해 돈을 교회에 꾸어 줄 경우에 이자를 받을 수도 없고 안 받자니 아깝고------ 더 나아가서는 그 돈을 회수하자니 죄 짓는 것같고 헌금을 하자니 헌금하기는 너무 힘이 들고----- 그래서 시험에 든다.
우리 교회가 재정적으로 많이 어려울 때 목사의 광고를 듣고 사업 자금을 급히 돌려 가져 온 집사가 있었다. 그것도 그 집사의 아내가 남편에게 강요해서 가져 온 돈이 였다. 그렇게 해 좋고 그 돈을 메꾸기 위해 남편은 상당히 고생을 했다. 나는 그들 부부 사이에 이 돈 문제로 사소한 다툼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얼마 후 그 돈을 상환하려 했을 때 남편은 이자 없이 원금만 달라고 했는데 아내는 그 돈을 헌금하겠다고 했다. 이 일로 그 부부는 대판 싸움을 벌렸고 나는 그 돈을 돌려주기는 했지만 정말 미안하고 괴로웠으며 그 착한 부부와의 사이에 영 아물지 않는 상처가 생겨 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그들에게 돈 이야기를 부탁하지 못했다. 꼭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지만 결국 그들은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나 버렸다.
목사가 만부득이 성도들의 돈이나 성도들이 보증을 선 돈을 쓸 경우에는 반드시 그 성도가 교회에 꾸어 준 돈 때문에 근심하지 않도록 미리 미리 은행의 이자 보다 더 좋은 이자를 지불하고 약속한 날짜와 기한 내에 반드시 상환해야 한다. 그럴지라도 아에 말하지 않고 꾸어 쓰지 않는 것만 못하다. 나는 교회에 돈을 꾸어 주고 시험을 받지 아니하는 성도를 거의 보지 못했다.
성도들에게 돈을 꾸어 하나님의 일을 할 바에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셔서 하도록 하실 때까지 기다리라. 아니면 우리 교회 성도가 아닌 사람에게 돈을 꾸어 쓰도록 하라. 만일 기한 내에 못 갚아 욕을 얻어먹는 일이 있어도 교회는 지장이 없다. 목사 개인이 욕을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20. 목사인 자기와 같이 되라는 요구를 하지 말라.
"(빌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눈 높이 교육이라는 것이 있다. 대단히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자기 자세를 어린아이만큼 낮추어야 교육적인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말이다. 내가 대학원에서 설교학을 배울 때 설교학을 가르치는 목사님이 설교의 수준을 초등 학교 4학년 정도로 낮추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 무식한 할머니 권사가 설교를 듣고 이해하는 수준의 설교가 아니면 그 설교는 실패한 것이라고도 했다. 설교 뿐 아니다. 목사의 모든 목회 사역들이 교회 안에 가장 어린 성도들의 수준에 맞도록 자세를 낮추는 지혜와 슬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정말 어렵다. 그리고 그렇게 자세를 낮추지 아니하면 절대 목회에 성공할 수 없다.
나는 이 점에 있어서도 남 못지 않은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이 문제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조언이나 충고를 듣지 못했다. 목회가 어려울 때마다 그 원인을 분석하고 찾아보았지만 마치 미궁을 헤메이는 것같아 답답하기만 했었는데 이제사 지세를 낮추지 못한 것이 목회의 어려움을 가져 온 하나의 중요한 이유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알아 얼마나 목회에 적용할 수 있을까? 거의 일손을 놓고 있는 것을-------
우리 부부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11조만큼 또는 그 보다 더 많은 헌신 예물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것은 레27:2-8에 말씀하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 너의 정한 값은 이십 세로 육십 세까지는 남자이면 성소의 세겔대로 은 오십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그 값을 삼십 세겔로 하며 오 세로 이십 세까지는 남자이면 그 값을 이십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십 세겔로 하며 일 개월로 오 세까지는 남자이면 그 값을 은 오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그 값을 은 삼 세겔로 하며 육십 세 이상은 남자이면 그 값을 십오 세겔로 하고 여자는 십 세겔로 하라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너의 정가를 감당치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의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라는 말씀에 따라 정성을 다한 서원 예물이 였으며 아이들을 위한 날마다의 기도와 모든 예배 참석시키기 등 온갖 정성을 다해 믿음으로 양육하고 키웠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 여서 과히 이를 말이 아니였다. 이런 자식들이 축복을 받는 일에 대한 비결(?)을 우리 성도들이 듣고자 했다. 특히 과외도 한 번 시키지 않았는데 어떻게 대학에 들어갔는가를 궁금해 했다. 그래서 나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이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기르는 방법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하여 설명했는데 이를 듣다 못한 한 집사가 내게 [목사님 그런 이야기 그만 하십시오. 목사님은 하셨을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아주 기분 나쁘게 말했다. 나는 우리 성도들의 자녀들이 공부 잘해서 대학 들어가는데 근심이 없으라고 우리 아이들 이야기를 했던 것인데 그런 소리를 듣자 몹시 기분이 나빴다.
그 말에 대하여 서운해하는 나를 본 다른 집사가 [목사님 서운해하지 마십시오. 목사님의 말씀이 다 바른 말씀 인줄을 알지만 그렇게 못하는 성도들은 하기 싫다기 보다는 할 수가 없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십시오.] 내가 어리석었다. 집사들만도 못했다. 감당하지 못할 요구를 계속 강조하니 듣는 성도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지만 하지 못해 시험에 들고 믿어지지 않으니 자기 믿음 없음에 낙심한다는 사실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목사가 아닐 수 없다. 자기 교회 성도들의 신앙 수준을 그렇게 몰라서 어떻게 성도들을 양육하며 성장시킬 수가 있다는 말인가?
만일 주님께서 당신의 입장과 수준에서 우리들을 보셨더라면 인간은 한 사람도 구원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수 백번 설교하고 그 은혜에 감격해 하면서도 목사라는 인간이 자기를 낮출 줄 모르고 모든 성도들에게 자기 수준이 되어야 성도가 되는 것처럼 자기를 표준 해서 그렇게 되기를 강요했으니 그 말과 그 가르침을 듣는 성도들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양을 모르고 양을 치는 목자 ― 양들에게 사람이 되라고 한다.
고기를 모르고 고기를 잡는 어부 ― 고기들을 보고 그물을 찾아 들어오라고 한다.
성도를 모르는 목사 ― 목사인 자기와 같은 성도가 되라고 강요한다.
기도도 나와 같이 하고 헌금도 나와 같이 드리고 예배도 나와 같이 드리고 전도도, 헌신도 내가 하듯이 해야 한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성도들은 얼마나 신앙적 좌괴감과 좌절을 받았으며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아니면 목사님은 목사님이니까 의례하는 말씀이고 우리는 우리들대로 신앙 생활한다는 겉돌기식 말씀 듣기를 했을까? 그러면서도 얼마나 괴로웠을까?
나는 처음 주님을 영접했을 때 11조를 드렸던가? 주님을 영접한 후 3년만에 새벽 기도를 나가기 시작을 했고 5년만에 11조를 드리기 시작했으며 전도는 평생 부담스럽고 하기 싫은 일이 였다. 그런 인간이 이제 겨우 신앙 생활 한지 1년도 안된 성도들을 불어 모아 전도를 시키고 헌금을 하라 하고 기도를 나오지 않는다고 질책하고 예배에 빠진다고 책망한다. 마치 그들이 아주 큰 죄를 지은 죄인인양 몰아 세우는 것이다.
그럴 일이 아니다. 어린아이를 기르듯, 어린양을 돌보며 키우듯 사랑해 주고 아껴 주며 위해 기도해 주며 가르쳐 은혜를 받도록 해야 한다. 자라서 어른이 되면 사랑할 줄도 알고 섬길 줄도 알며 하지 말라고 말려도 11조도하고 기쁨으로 전도도 잘한다. 성도들이 성장해서 성전 건축을 감당할 수 있으면 스스로 알아 성전 건축을 하자고 하고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릴 것이다. 이와 같이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심고 가꾸는 정성이 필요하다. 그것은 간과하고 속성으로 양육하여 슈퍼 성도를 만든 후에 일을 시키려고 하면 그 양이 죽어 버린다.
목사는 하나님의 종으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지만 성도는 그렇지 않다.
목사는 세상에 다른 직업이 없는 전문직이지만 성도들은 그렇지 않다.
목사는 목회가 생업이요 교회가 삶의 터전이지만 성도는 그렇지 않다.
목사는 성경의 지식이 많고 하나님의 일에 많은 생각을 하지만 성도는 그렇지 않다.
목사는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사역적 소명)을 받은 사람이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목사는 교회를 자기 집으로 생각하지만 성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집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어느 교회든 목사 보다 더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이 드물다. 목사는 특별한 경우의 성도가 아닌 일반적인 성도들보다 훨씬 더 많은 헌금을 드리면서 자기 수준의 헌금을 하도록 성도들에게 말하고 요구한다. 목사가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은 교회가 바로 자기 생명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다. 특별히 목사가 교회를 개척했을 때 그 교회에 가지는 애착은 절대적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교회가 있어도 자기 교회 이외의 교회에 대해서는 한눈을 팔지 않는다. 즉 자기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를 다닐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목사가 자기 교회 사랑하고 잘되기를 위해 기우리는 노력과 정성은 가히 필사적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헌금도 하기 때문에 목사는 전 재산이나 모든 소득을 아낌없이 하나님의 교회 즉 자기 교회에 바치지만 성도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도들은 목사와 같이 교회를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교회는 자기들의 신앙적인 터전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다니던 교회가 마땅치 아니하던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 다른 교회를 선택해서 신앙 생활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목사가 이 점을 몰라서 모든 성도들이 자기와 같은 정도의 신앙 생활을 요구하고 헌신을 요구한다면 성도들은 매우 부담스러워 하고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바울은 모든 성도들에게 자기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
목회 30년 주님앞에 내어놓을것 없는 박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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