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 자료/신학 자료 모음

성령운동하는 종교 사기꾼들

구원의 계획 2010. 5. 6. 22:44

 

성령운동하는 종교 사기꾼들
 

박영돈 /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

 


한국교회의 근본문제는 메시아 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과거 유대인들 같이 지금도 많은 교인들이 십자가의 메시아가 아니라 엘리야처럼 큰 능력을 행하는 영광의 메시아를 원한다.

전에 오산리 기도원에서 한 목사가 이런 설교를 하는 것을 들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부자가 되어야 한다. 셋방에 사는 이는 70평 빌라에 살고, 티코 차를 타는 교인은 에쿠스를 타야한다.”

이런 기복적인 메시지가 십자가의 메시아보다 만능의 메시아를 선호하는 대중의 입맛에 딱 들어맞는다.

교인들의 궁극적인 관심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들의 메시아 관이 결정된다.

그들의 가장 큰 관심이 죄에서 자유하여 성결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형통하는 것이 될 때 그들의 메시아 관도 교묘히 변질된다.

여전히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지만 그들이 믿고 섬기는 대상은

더 이상 성경이 증거한 십자가의 예수는 아니다.

그것은 그들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욕망이 형상화된 우상이다.

현대 교인들은 그들의 옛 자아와 그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메시아는 질색하지만, 세상에서 그들의 빵문제, 질병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그들을 번영하게 해 줄 메시아는 대환영한다.

이렇게 세속화된 교인들의 욕망에 의해 변질된 메시아 관이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예수를 믿어도 삶에 변화가 없다. 믿노라 하지만 그들이 실제 믿는 대상은 십자가의 예수가 아니니 어찌 변화될 수 있겠는가?


한국교회의 성령운동과 집회가 이러한 거짓된 메시아 관을 퍼뜨리는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성령의 능력과 초자연적인 기사의 폭발적인 역사를 강조하는 성령집회는 만능의 메시아를 바라는 교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에 충분하였다.

성령의 기적과 초능력이 그들의 고난과 질병을 일격에 날려버리고 그들의 소원과 자아의 욕망을 성취하는 동력으로 무상으로 제공되니 어찌 그런 집회에 매료되지 않겠는가?

한국교회에 만연한 성령운동의 심각한 문제점은 십자가의 메시아에서 일탈한 운동이라는 점이다.

만약 성령운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그 분명한 포커스를 맞추지 않으면 복음은 현저히 왜곡되고 성령의 능력은 구원의 목적을 이루기보다 인간의 종교적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남용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성령운동의 문제는  기적이나 은사를 강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십자가에 대한  초점을 흐려지게 하는 데 있다.


한국교회에 초자연적인 현상들, 즉 기적과 병 고침, 방언과 예언의 은사들은 넘쳐난다. 한국교회에 이런 것들이 부족해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현상들은 광신적이고 주관적으로 치우치는 신앙의 혼란을 심화시킨다.

 한국교회에 가장 시급한 것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인해 우리 옛사람이 처리되고 거룩한 새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런 거룩함을 상실했기에 한국교회는 대사회적인 영향력을 상실하고 복음의 빛을 가리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성령은 성결의 영이다. 세상의 빛 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이 성령의 역사에 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은 아름다운 새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이다.

성령은 이 구속의 목적을 우리 안에 이루시기 위해 강력으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거룩함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거스르는 것이고 성령의 간절한 소원을 무시하며 그 역사를 방해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에 그렇게 많은 성령집회가 열리고 있지만 꼭 나타나야 할 성령의 열매는 희소하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일하고 기적을 행하며 귀신을 쫓아내도 이 열매가 안 나타나는 것은 분명한 거짓 선지자들의 사인이다.

이런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자칭 성령의 사역자라는 많은 사람들은 이 부류에 속하며, 대부분의 은사집회는 거짓선지자들이 활개 치는 잡신집회에 더 가까울 것이다.


진정한 성령집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가 바르게 전파되며 우리의 옛 자아를 죽이는 십자가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하는 곳이다.

아무리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외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증거되지 않는 곳에는 성령이 현저히 부재할 수 있다.

또한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외칠지라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도살당하지 않은 옛사람이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은근히 과시함으로 그리스도에게만 돌아갈 영광을 교묘히 가로채는 곳에 성령은 심히 근심하신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 자랑하며, 그 십자가에 육신의 욕심과 야망을 못 박은 사람만이 진정한 성령의 통로가 될 수 있으며, 그런 사람을 통하여 교회를 부흥케 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교만하고 부패한 옛사람이 십자가로 철저히 처리되지 않은 이들에게 성령의 능력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목회 성공에 대한 은밀한 야망이 죽지 않은 이들에게 성령의 능력과 은사는 자기실현과 성공을 위한 동력으로 남용될 뿐이다.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은 많은 경우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복음 사역자들의 야망의 산물이다.

성령의 능력까지 총동원하여 교회부흥과 목회성공을 이루어 보려는 집요하면서도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의 발로이다.

그런 동인에서 촉발된 성령운동은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거룩한 명분하에 교묘하게 인간의 헛된 영광을 지향한다.

그런 성령운동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부르는 바벨탑 운동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성령운동을 한다는 자들은 조심해야한다.

자칫 잘못하면 그들이 다루는 불에 자신들이 삼킴을 받을 수 있다. 요즘 한국교계가 사이비 성령운동으로 인해 너무도 혼란스럽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이용하여 부패한 인간의 야욕을 채우려는 자들이 많다.

성령을 팔아(빙자하여) 사기 치는 자들이 늘어가고 있다. 비둘기같이 온유하신 성령님을 진노케 하면 그 분은 무서운 사자로 돌변하여 그들을 찢으실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도 성령운동이라는 말을 그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편의상 사용하긴 했지만, 성령운동이라는 말 자체는 아주 잘못된 용어이다.

성령님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고 선전하는 운동을 하시지 않는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예수님의 이름과 사역을 증진시키는 일을 하신다. 곧 성령운동이 아니라 예수운동을 하신다.

 지금까지 전통교회에서는 이 예수를 드높이는 운동을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작금의 성령운동은 성령을 이용하여 인간을 높이는 운동으로 둔갑해버렸다.


  또한 성령운동이라는 말은 마치 우리가 우리의 뜻대로 성령을 작동하고 운행할 수 있을 것 같은 뉘앙스를 전달하기에 매우 부적합한 용어이다.

우리는 우리의 뜻, 목회성공을 위해 성령을 운동케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뜻, 예수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성령께서 우리를 사로잡아 운동케 하시도록 우리를 성령께 내어드려야 한다.

우리가 성령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편하게 사용하실 수 있게 해야 한다.

성령님을 우리가 마음대로 끌어당겨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고 순종해야하는 인격적인 대상으로 모셔야한다.

한국교회에 성령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의 야욕을 채우려는 이들은 많아도 성령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여 그분과 매일 인격적인 교제를 누리며 그분과 함께 걷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러기에 우리 교회에 열광적이고 신비적인 현상 같은 잎사귀들은 무성하지만 정작 주님께서 찾으시는 성령의 열매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발췌본문 :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은 많은 경우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복음 사역자들의 야망의 산물이다. 성령의 능력까지 총동원하여 교회부흥과 목회성공을 이루어 보려는 집요하면서도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의 발로이다. 그런 동인에서 촉발된 성령운동은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거룩한 명분하에 교묘하게 인간의 헛된 영광을 지향한다.          

선지동산 52 게재 / 성령의얼굴(2) / 박영돈 교수


'기독 자료 > 신학 자료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적 치유의 허구성  (0) 2010.05.07
양태론과 삼위일체   (0) 2010.05.07
구원론(救援論, Soteriology)  (0) 2010.05.06
기독론(基督論, Christrogy)  (0) 2010.05.05
인간론(人間論, Anthropology)  (0) 2010.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