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 역사
태조-연산군/ 중종-경종/ 영조-순조
태조 (1335 - 1408)
출 생 : 1355년 이자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대담하였으며, 특히 활을 잘 쏘아 20세가 되기 전에 명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성격은 과묵하고 책임감이 누구보다도 강하였고 부하를 아끼고 사랑하였다.
당시의 시대적배경 : 북으로는 14세기 중반에 일어난 명나라가 원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대륙은 혼란하였고, 남으로는 왜구들의 끊임없는 노략질로 백성들이 많은 피해를 보고있는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성계의 등장과 활약상 : * 고려말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힘입어 최영장군과 함께 원나라 군사를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워 이를계기로 태조 이성계는 세력을 넓혀갔고 전라도 일대의 왜구를 격퇴시켰을 뿐만아니라 오랑캐를 무리치는 등 승승장구함. 이같은 활약상으로 벼슬이 높아지고 명성이 나라안에 자자함.
위화도 회군 : 명나라를 공격하여 요동땅을 되찾으라는 우왕의 명령에 '4불가론'을 내세우며 말머리를 개경으로 돌려 회군함. 이로 인하여 이성계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력들의 추대를 받아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계기를 마련함.
4불가론 :
1)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치는것은 불가능함,
2)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함,
3) 요동으로 군사를 일으키면 왜구가 침공해 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
4) 장마철이라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며 군사들이 전염병에 시달릴 염려가 있어 불가함.)
태조가 되다 : 1392년 4월 정도전, 조준,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를 받아 새나라의 임금이 됨. 걸림돌이 되었던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를 이방원이 제거함으로 인하여 임금으로서의 위치를 다짐.
민심안정책 : 국호를 단군조선을 이어간다는 뜻에서 조선으로 함. 서울을 한양으로 옮길것을 계획함. (풍수지리설과 무학대사의 조언) 정도전을 비롯한 학자들에게 법제 정비를 서두름. (조선경국전)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펴나감.(향교 건립 및 사찰정리)
태조의 가족관계 : 부인 8명, 자녀 8남 5녀 신의 왕후 한씨에게서 6남 2녀를 두었는데 이중 둘째 아들 방과(정종), 다섯째 아들 방원(태종)임.
왕자의 난 :
*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도와 가장 많은 공을 세운 방원이 왕세자 책봉에 불만이 많았고 정도전의 세력이 커가는 것을 지켜볼수만은 없었다. 그리하여 난을 일으켜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함.(1차 왕자의 난)
* 박포라는 사람과 함께 이방원의 형 방간이 왕위에 욕심을 내어 군사를 일으켜 방원의 세력을 축출하고 왕위를 얻으려 하다가 싸움에서 패하자 유배를 떠나고 박포라는 사람은 사형을 당함.(2차 왕자의 난)
咸興差使 :
* 왕자의 난을 계기로 태조 이성계는 옥새도 내주지 않고 강원도 오대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태종 이방원이 그를 설득하여 옥새를 얻고 궁궐에서 지내도록 많은 차사를 보냈지만 그곳으로 갔던 차사마다 소식이 끊김.(심부름을 가도 사람이 오지 않을 때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
* 결국에는 이방원을 임금으로 인정하고 무학대사와 함께 불교에 정진하며 1408년에 세상을 떠난다.
태조의 주변의 인물들 :
1) 최영 : 태조 이성계와는 다르게 명문 가문 출신으로 반원세력에 앞장서는 뛰어난 명장이었다. 최영은 이성계와는 다르게 군사의 성격도 보병위주였으며, 이성계가 개혁파임에도 불구하고 훈구파의 성격이 강했다.(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이성계와의 관계가 갈등의 최고조에 이르렀고 이성계를 먼저 제거하려고 하지만 결국 먼저 죽음에 이른다.
2) 정몽주 :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도와서 조선을 세운 역성혁명론자라면 정몽주는 고려왕조를 유지하면서 혼란함을 벗어나고자 개혁을 주장하는 고려개혁론자였다. 하지만 이성계의 세력에 의하여 선죽교에서 죽음을 당한다.
3) 정도전 : 보잘것없는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총명하고 영리하였다. 끊임없는 공부를 통하여 실력을 쌓은 후 이성계의 명성을 듣고 이성계와의 관계가 시작된다. 위화도 회군에 이성계가 성공하자 이성계를 반대하는 일파를 몰아내기 위하여 힘을 기울였고, 조선이 건국되자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하여 법전을 편찬하였고 서울을 옮기도록 건의하였으며, 유교 사상을 확립시켰으며 그밖에 이성계를 위하여 많은일을 하다가 1차 왕자의 난을 통하여 이방원에게 죽는다.
4) 무학대사 : 일개 장군인 이성계에게 '당신도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준 사람으로 출신성분이 보잘것 없다는 이유로 불도에서 따돌림을 당하자 방랑생활을 하다가 이성계를 만나서 이성계의 서까래 꿈을 해몽하여 이성계가 후에 왕이 될 것을 장담하였다고 함. 풍수지리에도 능하여 이성계가 서울을 옮길때 한양(지금서울)으로 옮길것을 주장함.
태조의 능에 관한 이야기 : 태조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으며 (동구릉) 능 이름은 건원릉이다. 태조의 능은 지금도 갈대가 깎기지 않은 상태로 있으며 이는 태조 이성계가 죽을때 고향의 갈대와 함께 하고싶다는 그의 유언 때문이다.
정종(1357 - 1419)
짧은 정치, 힘없는 임금 : 태조와 신의 왕후 한씨사이에서 2째 아들로 태어났다. (영안대군 방과) 태조의 장남인 방우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성계는 방과를 세자로 책봉했던 것이다. 여하튼 조선 2대 임금으로 추대되었지만 이방원 등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나라의 허수아비 임금에 불과하였다.
왕자의 난 : 2차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피비린내 나는 형제들간의 싸움에 그는 탄식을 거듭하였고 왕권을 계속 잡고 있을 경우에는 방원에게 죽음을 면치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동생 방원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아무런 걱정없이 인덕궁에 살면서 사냥과 온천을 즐기다가 세상을 떠났다.
정종의 치적 : 교지를 발표하여 새로운 정치제도와 그 제도를 시행하도록 명함.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하여 '분경금지법'을 만들었으며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쳐 정치와 군사에 관한 일을 분리시켰으며 수도를 한양에서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태종(1367 - 1422)
임금이 된 방원 : 두차례의 왕자의 난을 겪은 방원은 그 세력이 날로 커져만갔다. 정종은 아버지 태조를 설득하여 방원을 임금으로 인정하도록 하였고 드디어 방원은 조선 3대 왕이 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위로 상왕을 모시고 정치적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하였다.
태종의 업적 :
민본정치 - 백성의 살림살이 파악을 위하여 '경차관'을 임명하여 파견 (개혁) 억울한 일 해결을 위하여 궁성 문 앞에 신문고 설치
왕군강화 - 국가의 중요한 기관인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라고 명하고 문하부까지 합함 (입법과 행정이 한곳으로 합쳐지니 임금의 권한이 강해짐) 조정 대신들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노비변정도감' 이란 노비들의 호적을 관리하는 기관을 설치 정종때 옮겨졌던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다시 천도함. 대외정책 - 왜인들의 범죄가 잦아지자 '왜인범죄논결법'이라는 책을 만들어 다스림.
문화정책 - 책과 학문의 소중함을 알고 학자들을 귀하게 여겼으며 기술 교육을 위하여 10학을 설치 하였으며 나라의 일을 맡을 관리들을 능력과 실력 위주로 등용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절에 매여있던 노비를 공노비로 바꾸고 처녀로 중이 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고려시대에 나쁜점이 많았던 연등제와 초파일을 없앰과 동시에 일반 백성들 사이에 유행하던 참위설(음양오행설 등) 등 개인적인 신앙을 국가 신앙으로 이끌어 유교를 숭상하게 만듦.
원경왕후 민씨 : 조선초의 학자이자 높은 벼슬을 지내고 있는 민재의 딸로 왕비가 되기 위하여 스스로 노력했던 인물이다. 제 1차 왕자의 난 때에는 정도전 등이 남편 방원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알고 방원에게 주의를 시키는 한편 방원에게 감추었던 무기를 내놓는 등 민씨 덕택에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에게 승리할 수 있었다. 이런 민씨라 자신의 주장이 매우 강하였고 이로인하여 태종과 잘 다투었다.
세자책봉 문제 : 태종은 원경왕후 민씨와 4남 4녀를 두었다.(양녕, 효령, 충녕, 성녕대군) 장남인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으나 외척세력인 민씨 집안의 세도정치를 우려한 태종은 원경왕후 민씨의 형제자매를 모두 귀양 보내거나 평민과 결혼하게 하는 등 강력하게 외척세력을 견제하였다. 이로인하여 총명하고 학문에 성실하던 양녕대군은 세자의 행동에 맞지않는 이상한 행동을 계속하였고 이로인하여 1418년 세자에서 폐위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조정대신들과 합의하에 셋째 충녕대군이 세자로 재 책봉 되니 이자가 바로 조선 4대 임금 세종이다.
태종 때 기억할만한 일 : 신문고 제도 - 옛날 중국 송나라의 등문고 제도를 본따서 만든 제도이다. 신문고를 궁궐문 앞에 매달아 놓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치도록 하였다. 무조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신문고를 치는 것은 아니다. 부하가 상관을 고발할 때에는 오히려 벌을 주었다. 사소한 일로 신문고를 치는 자도 많아서 무질서한 현상을 낳기도 하였으며 연산군 때 폐지되었다가 영조때 부활됨. 의정부 설치 - 의정부의 사무를 이, 호, 예, 병, 형, 공조 등 육조로 나눠 보도록 하였으며 의정부에는 덕망이 높은 중신들이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때만 모여서 의논하여 임금에게 고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왕-의정부-육조 체제에서 왕-육조로 바뀌어 임금의 권한이 한층 강화된 것을 알수 있다.
세종(1397 - 1450)
예사롭지 않는 태몽 : 원경왕후 민씨가 셋째아들(세종)을 임신했을때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그 꿈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어느 화사한날 낮에 민씨가 마루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데 집터에서 여의주를 물고 용(龍) 한마리가 북한산 꼭대기로 승천하여 하늘로 날아갔다는 것이다. 그러고나서 민씨는 꿈이 상서롭지 않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총명한 왕자 충녕대군 : 충녕대군 (세종)은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공부하기를 매우 좋아하여 추우나 더우나 밤늦도록 독서를 하였고, 그의 아버지 태종이 밤늦게 독서하는 충녕의 건강이 걱정되어 오히려 밤에는 독서를 못하게 할 정도였고 나라에 큰일이 있을때마다 의견을 말하였는데 태종을 비롯한 대신들이 생각지도 못한 의견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다.
세종의 즉위 : 세자로 책봉된 양녕대군은 세종에 비하여 독서량도 많지 않았고 충녕과 비교되는 점도 많았다. 그리하여 태종은 양녕을 폐위시키고 충녕을 세자로 다시 책봉한다. 1418년 드디어 충녕이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임금이 된 세종은 동방의 요순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임금이었다. 물론 세종의 뒤에서 눈에 보이지 않은 태종의 보살핌과 지도, 재상들의 공적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세종의 치적 :
정치 - 끊임없이 노략질하는 왜구때문에 백성들의 피해가 적지 않아 이종무를 시켜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고 유동성있는 외교 정책을 펴나갔다. 김종서에게 명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정벌을 위하여 4군, 6진 개척을 하였다.
경제 - 조선초 공신들을 위주로한 토지의 집중현상이 보이자 '전제상정소'라는 중요한 기관을 두고 전제와 조세의 방법을 의논하였고 합리적으로 토지를 조절하고 백성의 조세부담을 덜어주는 한편 나라의 재정이 확보되었다. 농민들이 농사를 과학적으로 짓도록 하기 위해 깊은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농사에 관한 책을 편찬하도록 명하였고 그결과 '농사직설'이라는 책이 편찬됨.
사회 - '속육전', '경제육전등록' 등 법전편찬으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으며 삼강행실도를 통하여 유교의 으뜸이 되는 사상을 백성들에게 실천하도록 권장하였다.
문화 - 집현전의 학자들과 함께 피땀흘려가며 한글을 창제하여 우리말을 쓰도록 하였다. 측우기, 자격루, 혼천의 등 과학의 발달에 노력하였다. 이는 농업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일이었다. 박연을 시켜 궁중의 아악을 정리하도록 하였으며 조선왕조 문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종의 가족관계 : 영의정 심온의 딸 심씨와 결혼하여 8남 2녀를 두었고 5명의 후궁에게서 10남 2녀를 두었으나 세종도 또한 여러 아들을 두고 세자책봉 문제로 고민을 하였다가 결국은 몸이 허약한 첫째를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이후 건강이 약한 5대 임금 문종이 왕이 되기는 하지만.....
세종의 신하 :
황 희 - 18년 동안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노비나 첩의 소생들의 천역 면제 등 뛰어난 업적을 쌓아 칭송이 자자하였다.
맹사성 - 성격이 부드럽고 섬세하여 악공을 가르치거나 과거 응시자들의 학문적, 문화적 소양을 점검하였다. 세종의 신임을 받아 좌의정이 되었으며 평소 소타기를 좋아했다.
이종무 - 세종이 즉위한후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세종의 명을받아 대마도를 정벌 하였으며
김종서 - 용감하게 북쪽을 개척하여 종성, 회령, 경원, 경흥 등 4진을 설치하고 다시 두만강 근처에 온성진과 부령진을 두었다. 이것이 6진이다. 이로 인하여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으며 정치적으로 그의 입지가 커졌다.
장영실 - 천민의 신분으로 태어난 그는 손재주가 매우 뛰어나 세종의 부름을 받고 궁중 기술자가 되었다. 중국에서 새로운 문물을 배우며 천문기기에 매력을 느낀 장영실은 돌아와서 천문기구 등을 많들었으며 그는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자이자 기술자였다.
세종대왕 - 대왕이라는 칭호는 후세 사람들이 생각하여 그의 업적이 매우 뛰어났을때 부르는 칭호이다. 세종은 타고난 능력과 자상하고 부드러운 정치로 조선왕조에서 제일 훌륭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업적을 남기고 54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쳤고 세종의 업적은 후에 조선왕조가 500년 이라는 긴 세월동안 왕조를 유지하도록 하는 원천이 되었다.
문종(1414 - 1512)
문종의 즉위 : 1450년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8세때 왕세자로 책봉되어 29년 동안 왕세자로 머물러 있으면서 8년 동안 상왕의 대리로 나랏일을 하다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으니 조선 제 5대 임금 문종이다.
문종의 업적 : 문종은 언론에 대하여 관대하였다. 6품이상의 신하들은 돌아가며 임금에게 의견을 올렸으며 문종은 의견들은 나름대로 수렴하여 정치를 실행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후 정도전, 정초 등에게 명하여 편찬하고자 하였던 '고려사'를 완성하였다. 고려사는 고려 34왕 475년간의 역사를 편찬한 역사책으로서 고려 시대의 기록이 담겨있어 가치가 큰 책이다.
문종의 병세 : 문종의 건강은 어렸을적부터 좋지 않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언론을 존중하여 너그러운 정치를 펼쳐나갔던 문종은 병세가 깊어가 결국 왕위에 오른지 2년만에 세상을 뜬다.
세자 문제 : 문종은 건강이 약한 탓으로 인하여 자식도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 1남 1녀만을 두었다.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10세의 단종이 임금으로 보위되어야 하는 불운을 맞게 된다.
단종(1441 - 1457)
어린 세자 : 1441년 (세종 23년) 비극의 주인공으로 결말을 맺게될 홍위(단종)가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도 아들을 낳자마자 눈을 감았다. 그의 할아버지 세종은 그를 유난히도 귀여워 하였고 1448년 세종이 목숨이 얼마남지 판단되었을때 그를 왕세손 으로 책봉하였다.
단종의 즉위 :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곧바로 즉위 하였으나 문종은 재위 2년만에 눈을감고 말았다. 문종이 승하하자 12세의 세자가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비극의 인물 단종임금이다. 보통 임금의 나이가 어리게되면 가장 지위가 높은 후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당시에 그럴만한 사정이 되지 못했으며 수렴청정할 대왕대비도 이미 세상을 떠나서 단종은 더욱 외로웠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나랏일을 세종때부터 재상으로 지내던 황보인, 정본, 김종서 등이 주가되어 나랏일을 처리해 나갔다. 이렇다보니 단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하고 재상들이 나랏일을 마음대로 처리했다.
계유정난 : 나라의 형세가 어린 임금을 두고 이렇듯 돌아가자 문종의 동생들이던 안평대군, 수양대군 등은 각자가 이름난 학자를 모으고 스스로 힘을 길러갔다. 드디어 1453년 수양대군은 신숙주, 한명회, 권남 등과 함께 조정의 대신들이 어린 임금 단종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왕위로 앉히려 했다는 구실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가 죽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계유년에 일어났다고해서 '계유정난' 이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조정은 수양대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수양대군이 왕을 대신해서 나랏일을 처리하였다.
이징옥의 난 : 함길도 절제사 이징옥은 수양대군이 절제사를 다른 사람으로 임명하였다는 것이 수양대군이 처리한 줄 알고 난을 일으켜 수양대군을 죽이려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간다.
단종의 강등 : 수양대군의 동생 금성대군은 어린 조카 단종을 수양대군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하였지만 수양대군의 앞에서 모두 귀양을 가야 하거나 죽음을 당했다. 단종은 두려움에 떨며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내놓고 1455년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물려주고 말았다.
사육신 : 수양대군이 왕위를 차지하자 조정의 대신들은 단종의 복위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함께 거사를 도모하기로 한 김질이 배신하고 단종을 복위하려는 계획을 노출시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성삼문을 비롯한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은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들을 사육신이라고 하며 죽는 순간까지도 수양대군을 욕하며 단종의 복위를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死六臣)
생육신 : 김시습, 이맹전, 원호, 조려, 성담수, 남효온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적극 반대하였으며 사육신과 반대로 벼슬을 거부하거나 수양을 비난하는 등 살면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였던 사람이다. (生六臣)
세조(1427 - 1468)
수양대군 : 수양은 성격이 강하고 야심만만했으며 세력도 강했다. 안평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과 손을 잡게되자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세력을 키워가야 할 생각을 하였다. 1452년 명나라에서 단종의 즉위를 인정한다는 고명을 보내왔고 조선의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감사의 뜻을 전할 사은사를 보내야 했다. 수양대군 심복들은 상대세력의 커짐을 걱정하여 반대하였지만 수양대군이 이일은 종친의 의무이므로 가야한다고 겉으로 주장하였다. 그리고 명나라를 자유롭게 여행하는 동안 그는 자유롭게 정권을 장악할 계획을 세워갔다.
세조의 즉위 : 단종세력을 하나둘 제거하고 1453년 그는 7대 임금 세조로 등극하였다. 세조는 정치를 잘함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벗으려고 백성들을 잘 돌보았다.
세조의 치적 : 사치풍조를 없애고 궁궐의 문화까지 검소하게 만들었다. 그는 또한 단종때의 왕권약화가 미치는 영향을 거울삼아 왕권을 강화하여 의정부의 정책 결정권을 폐지시키고 6조의 직계제를 부활시켜 의정부의 기능을 약화하였다. 또한 국방력 강화를 위하여 호적, 호패제도를 부활 시켰으며 두만강 건너 야인소탕, 서북면 개척 등 국토의 균형있는 발전을 꾀하였다. 문화적으로 세조는 불교를 숭상하여 1461년에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간행토록 하였으며 일본까지 유통시켰으며 태조이래 4대 임금을 찬양하기 위하여 '국조보감'을 만들고 세종때 시작한 '오례의'를 완성
주변 인물 :
한명회 - 칠삭동이로 태어나 인물이 형편없어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자랐으며 과거에도 번번히 낙방하여 30세가 넘도록 할 일이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였으나 한명회의 친구 권남의 천거로 수양대군에게 소개되었고 그후 수양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오랫동안 세도를 누리면서 1487년 생을 마감한다.
권 남 - 한명회와 친구사이였던 권남은 과거에 세번 응시하여 세번모두 장원 급제하여 '삼장장원'으로 이름을 날렸던 뛰어난 인물이다. 그러나 출세의 길이 열리지 않아서 세상을 원망하였으나 수양대군의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그 능력이 인정되어 한명회와 함께 부를 채우며 5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신숙주 - 세조와 동갑내기로서 이해력이 뛰어난 학자이다. 1452년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은사로 갈때 동행하였는데 여기서 수양대군의 끈질긴 노력으로 친분을 맺게되어 비록 역사적으로 변하기 쉬운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기는 하였지만 '국조보감'을 편찬 하였으며 고전과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였고 특히 외교와 국방에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어서 세조의 오른팔이라고 불리울 정도였다.
가족관계 - 정희왕후 윤씨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고 둘째 해양대군은 8대 예종으로 오르게 된다.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죄책감에 많이 시달려야 했으며 결국 1468년 돌아올수 없는 길을 떠나게 된다.
예종(1450 - 1469)
세조의 고민 : 세조는 정희왕후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다. 세조가 즉위하자 18세의 의경 세자가 세자로 책봉되어 왕위를 계승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2년뒤에 아무런 이유없이 죽고 말았다. 그래서 해양대군이 세자를 계승하였고 이때 나이 19세 였다. 이가 바로 조선 8대 임금 예종이다.
예종의 즉위 : 나이어린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원상과 함께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으로 나랏일을 돌보았다. 정희왕후는 남자처럼 성격이 대담하고 결단력이 있어, 부드러운 예종의 성격과 조화를 이루어 나랏일을 무리없이 해나갈수 있었다. 1469년 삼포에서 왜와의 개별 무역을 금지시켰으며, 세조때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하였다.
남이의 옥 사건 : 남이는 의산군 휘의 아들로, 태종의 외손이다. 어려서부터 활을 잘쏘고 힘이 장사 였다. 남이는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그후 세조의 세력을 등에 업고 이시애의 난을 잠재웠으며 압록강 상류까지 원정을 가기도 하였다. 남이의 아래에 유자광이라는 갑사가 있었는데 유자광이었다. 남이가 벼슬을 얻어 승승장구 하는데 비교되는 것이었다. 유자광은 계략을 세워 남이를 제거하기로 하고 계획을 세웠으며 남이가 임금에 오르려 한다는 역모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으며 죽었다.
예종의 임종 : 1년 2개월 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왕위에 올라 있었으나 원상제도와 수렴청정으로 제대로 권력을 행사하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성종(1457 - 1494)
어려운 결단 : 예종이 죽자 왕위를 계승할 사람은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 이었다. 하지만 제안대군은 겨우 4세에 불과했다. 예종의 병세가 심해지자 정희왕후가 원상들을 불러들여 이야기르 꺼냈다. 세조의 첫째 아들인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군을 다음 임금으로 지목했으나 원상들은 월산군의 동생인 자을산군에게 뜻이 있음을 내비추고 종친들의 반발이나 부작용은 한명회를 비롯한 원상들에게 맡기고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자을산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성종의 즉위 : 자을산군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제 9대 임금으로 올랐다. 정희왕후는 다시 수렴청정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임금의 지목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바로 세조의 동생 임영대군의 아들 구성군을 두고 이른말이었다. 구성군은 출중한 인물이었으나 탄핵이 들어와 1470년 아무런 죄도없이 멀리 귀양가게 되었으며 또한 원상들은 종친들을 관료로 등용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시켰다.
성종의 치적 : 성종은 총명하고 온순하였다. 그리고 정이 많았다. 성종의 업적으로 단연 돋보이는 것은 바로 경국대전의 반포이다. 1백여년에 걸친 법전의 반포로 국가의 중앙집권 체제는 더욱 강화 되었다. 성종 즉위 후 7년동안 할머니이자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476년 수렴청정이 끝나자 임금이 직접 나랏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그 첫번째가 왕권강화 였다. 젊은 사람의 등용(사림파)으로 젊은 문신들과 기존의 훈구 세력들의 세력을 적당히 견제 함으로써 나라를 안정되게 이끌어 나갔다. 성리학에 심취한 성종은 유교문화를 강화하기 위해서 여러 정책을 펴 나갔으며 농업의 장려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성종은 국방정책도 훌륭하게 펴나가 두만강 방면의 여진족을 소탕하는 등 변방을 안정시켜 전쟁에 대한 위협을 없앴다. 성종시대에는 '문화의 황금기'라고 일컬을 만큼 문화정책을 폈다.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세상은 태평성대(太平聖代)에 이르렀다.
폐비윤씨 사건 : 춘추관기사관 윤기무의 딸로 뛰어난 미인인 윤씨는 어려운 생활을 하던중 후궁으로 들어왔다. 윤씨는 성종의 눈에 들어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1474년 왕비로 책봉된 윤씨는 그해에 아들을 낳아 그 기쁨이 두배에 달했다. 그러나 윤씨가 시기와 질투가 심하다는 이유로 성종도 은근히 그를 멀리하였고 그러던 도중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자국을 남겼다는 이유로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를 비롯하여 조정의 대신들도 윤씨를 폐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윤씨는 폐비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지만 주위에서는 윤씨를 원자가 자라나기 전에 죽여야한다고 하였고 그로 인하여 성종은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1479년 인생을 마감하였다.
사림파의 등장 : 성종은 학문을 숭상하고 도학 정치를 꿈꾸어 왔다. 성종과 같은 사상을 가지고 관계에 진출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사림파이다. 고려의 유신 길재가 은퇴한 후 고향인 영남에서 후진 양성에 힘쓴 결과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 사람들이 조선 시대의 유학의 큰 흐름을 이루었다. 이들은 한명회, 유자광, 이극돈 등과 같은 기존의 훈구 세력을 권세나 잡을 줄 아는 간사하고 도량이 좁은 사람들이라고 무시하였다. 성종은 김종직의 학문과 사상을 매우 좋아하여 그에게 형조판서의 벼슬을 주자 그의 제자들이 다시 몰려들어 기존의 훈구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사림파들은 '유향소제도'를 부활시켜 지방의 부정부패를 막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결국 성종은 사림을 중앙에 등장시켜 훈구와의 견제를 이끌면서 왕권을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성종의 임종 : 25년 동안 정치를 잘하고 호화롭게 살다가 1494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다음 왕의 자리를 폐비윤씨의 사이에서 태어난 연산군에게 물려준다.
연산군 (1476 - 1506)
어머니없는 세자 : 왕자 융은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융이 4세때 태어났으므로 융은 정현왕후 윤씨가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인줄 알고 자랐다. 융은 인수대비와 정현왕후 윤씨 사이에서 온갖 미움을 받으며 자랐고 그로인하여 융의 성격은 삐뚤어질 수 밖에 없었다. 걸핏하면 화를 내고 책을 집어던지는 등 변덕도 심했다. 융이 8세가 되자 조정 대신들은 하루바삐 왕세자르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성종도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인수대비와 상의한 끝에 왕세자로 책봉할 왕자가 융 밖에 없음을 알고 하는 수 없이 융이 왕세자로 봉해졌다. 그때부터 11년 동안 세자 수업을 받으며 왕위에 오를 준비를 했다.
폭군 연산군 : 1494년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19세의 세자 융이 왕위에 오르니 제 10대 임금 연산군이다. 성종이 정치를 잘하여 평화로운 세상이었기 때문에 힘을 들이지 않아도 나라의 질서는 잘 유지되었다. 연산군은 선정을 베풀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폐비윤씨의 죽음을 알게 되었고 또한 거기에 관여한 자들도 알아 버렸다. 그후 연산군은 폭군으로서 점차 바뀌어가게 되었다. 연산군은 권력을 쥐게 되자 문신들의 소리가 듣기 싫어 경연을 폐지하고 홍문관, 사간원도 없애고 각도에 채흥사, 채청사들을 파견하여 미녀들과 좋은 말을 뽑아 궁궐에서 즐겼으며 부처님을 모시는 원각사를 기생 양성소로 만들어 버렸다. 이로 인하여 나라의 살림은 말이 아니었다. 연산군의 이러한 폭정으로 그 밑의 권력을 쥔 신하들도 횡포가 심해졌다. 연산군의 폭정은 점점 극에 달했다. 자신의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문이 국문으로 올라오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했다.
무오사화 : 왕에게 학문을 하라는 등 여러모로 학문을 중요시하는 사림파를 연산군은 매우 싫어하였다. 그러던 중 성종실록 편찬시 김일손이 쓴 사초에 세조에 대한 비판의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고 그리하여 모든 것을 알게된 연산군은 김종직의 묘를 부관참시하고 세조를 욕되게 하였다는 이유로 사림파를 귀양보내는 등 사림파의 세력이 약해졌다.
갑자사화 : 무오사화로 언론기관이 없어지자 연산군에게 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도 없어졌고 조정에는 연산군의 비위만 맞추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그중 임사홍 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훈구파 세력을 몰아내고 남아있는 사림파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러던 중에 폐비윤씨가 후궁의 모함을 받고 죽었다고 고해받쳤다. 이로인하여 화가 끝까지 치밀은 연산군은 인수대비를 머리로 받아 그후 인수대비는 병석에 누워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였으며 폐비윤씨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찾아내어 복수를 자행하였다.
중종반정 : 연산군은 재위 12년만에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학자들을 죽이고 경연과 대제학을 폐하였다. 더 기막힌 사실은 기생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이런일을 참지 못해 바른 정치를 하라는 상소를 올렸지만 연산군은 훈민정음을 상소나 하는 일로 쓰지 못하게 하여 언문이라고 하여 쓰지 못하게 하였다. 연산군의 이러한 폭정에 대해 몇몇 사람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새로운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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