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내다 죽은 사람(누가복음 11:42-44)
- 이근호 목사
(눅 11:42,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눅 11:43,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눅 11:44,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화 있을진저’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신겁니까? 바리새인보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이라 아니라는 의식 때문에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안일해 하시겠지만 마태목음 5:20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니 우리 자신들이 이미 바리새인의 일부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하는 자들입니다. 십일조를 철저하게 한 대가로서 돌아온 게 고작 “저주가 너희들에게 주어질 것이다”는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를 할까 말까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결국 이런 평판이 쏟아질 것이 뻔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대중들을 선동하면서 내세운 구호가 바로 “말씀의 생활화”입니다. 말씀을 지식으로 알지 말고 생활속에서 실천해서 말씀의 열매를 맺어야 하나님께서 영광받고 기뻐하신다는 주장을 펼친 겁니다.
과연 인간들 중의 최고의 선을 점령하는 자들의 정신자세답지요. 하지만 그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라는 선고를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에게 직접 듣게 되는 걸요.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들의 대표자되는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싫어하는지를 직접 그들 손에 의한 흔적을 지니게 됩니다. 그 십자가 흔적으로 인해 영원토록 인간 세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라는 저주를 내릴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축복받는 길이라고 여겨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하나님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반대 결과를 낳게 됩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날이 이 부부는 죽습니다. 2명 사망입니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바로 헌금을 내 것이 화근이 된 것입니다. 이야기에 끝부분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10-11절) 바로 이 대목을 주의깊게 봅시다. 아니니아와 삽비라가 왜 죽었는지 이유가 나옵니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두려움’ 때문입니다. 아나이아 삽비라가 졸지에 죽는 곳에 대해서 안 놀란 사람은 베드로 밖에 없습니다. 다른 이들은 다 놀랐다는 점에서 실은 다른 사람들도 아니니아 삽비라 생각과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음이 들통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새삼 놀란다는 것이 참으로 수상한 이야기입니다.
당연한 일을 놀라고 있다는 것은 평소에 그들이 자신의 두려움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했다는 정황이 포착됩니다. 하나님의 무서움을 돈으로 매수해서 무서운 저주 줄기가 자기 쪽으로 오는 것을 차단시키려 하고자 한 겁니다. 이것은 곧 ‘교회’ 자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교회란 저주가 없는 곳입니다.
요한복음 6:37-39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인간들은 구원을 자기 일로 생각해서 자신이 기획하고 설계하고 그 과정까지 자신이 짐작한대로 관여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런 시도를 철저하게 배격하는데 그 배격의 과정 속에 들어가는 언급들이 바로 ‘화 있을 진저. 십일조 하는 너희들 화 있을진저’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헌금정신이란 이처럼 돈으로 새삼 하나님을 매수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이미 사단을 이기신 그 결과로 인한 기적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은혜없이 헌금하지 말라’는 고린도후서 8장-9장의 정신입니다. 십일조란 실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기적이 개입된 헌금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간 곳은 그냥 보통 땅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들어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기거하시는 방식으로 땅에서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변화라는 것이 바로 추수의 잘됨 여부입니다. 인간의 애씀으로 곡식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애쓰심으로 땅에서 곡식이 나기에 하나님의 백성은 그 곡식에 대해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현실적으로 드러나나요?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의 중심에 제사장에 의해서 진행되는 제사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제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되면 그 땅은 복을 받게 되어 있고 제사가 원활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인간들이 노력해도 저주로서 되돌아오게 되어 있는 땅입니다.
따라서 전 백성들은 자신의 농사법과 투자된 노동보다 땅이 없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하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성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축복과 저주는 그들에 의해 결정됩니다. 바로 이런 제사에 충당되는 비용들이 하나님의 일이기에 하나님에게서 제공되는데 하늘과 땅은 여기에 호응하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백성들과 그 경과가 투입됩니다. 즉 제사에 필요한 비용이 인간의 주머니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주어진다는 사실에 전 백성들이 동참케 해서, 이 약속의 땅에서의 ‘생명’이란 자신들의 노동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제사가 하나님께 받는 여부에서 결정남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마치 불이 났을 때, 동네사람들이 저수지에게 퍼올린 물양동이를 전달, 전달하면서 물 이어주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쓰여지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이 평평한 무덤 속에서 살고 있는 시체나 귀신에 불과함을 인정하면서 의미가 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들은 그저 무덤 속에 들어 있는 무능력한 귀신”에 불과하다는 것은 언급하시는 것은 귀신이 자기 멸망을 두려워해서 해보는 몸부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란 인간쪽에서 찾아가면 그냥 빈 벽에 불과합니다. 신이 있었다는 현장에는 아무 것도 없이 그저 인간의 낙서만 그득할 뿐입니다. 이처럼 참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자기 긍정으로 인하여 피해받는 모습으로 오십니다. 이 오심이 곧 ‘자기 사람을 일체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긍정적이고 만족한 작업의 정상적 활동이 됩니다.
누가복음 11:42-44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화 있을찐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화 있을찐저, 화 있을찐저.’ 연거푸 계속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반드시 저주받는다.’ 하는 뜻이고 ‘너 같은 인간이 저주받는다.’는 이야기인데 예수님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심판주입니다. 심판주가 ‘너는 저주받아야 돼.’라고 누구를 지목해서 이야기하면 우리들의 시선이 그리로 쏠립니다. 주께서 저주받으라, 한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기 마련인데 그게 잘못이에요.
주께서 저주받으라고 한 바리새인에게 시선을 돌릴 것이 아니고 저주받으라는 그 소리가 바로 우리 자신한테, 나한테 하는 소리구나, 그렇게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들은 우리 인류의 대표자들이지요.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이 우리 생각이 터무니없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을 통해서, 그 바리새인 안에 그 바깥에 있는 예수님을 다시 한 번 분석하고 해석해야 돼요. 바리새인 벗어나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말고 바리새인 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봐야 됩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이 오늘 본문에 보니 뭐 하는 사람이냐, 십일조를 하던 사람이에요. 십일조를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라고, 하나님도 사랑하고 십일조도 행하라.’고 했으니까 하나님도 사랑하고 십일조를 행해 보세요. 해 보게 되면 바로 우리 자신이 바리새인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하는 그 보답이 30배, 60배, 100배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화 있을찐저.’로 돌아오지요. 얼마나 멋있는지 몰라요. 십일조 했는데 ‘화 있을찐저.’ 십일조를 안 하면 나에게 돌아올 ‘화 있을찐저.’가 없어요. 십일조를 안 하니까 화 있을찐저, 이것을 받는 기회를 놓쳐 버립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이야기냐, 하실 겁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나옵니다. 이 부부가 초대교회에서 상당히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뭐냐,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헌금을 했는데 헌금을 한 당일에 둘 다 죽었어요. 헌금을 한 그 순간 둘 죽었습니다. 헌금을 했는데 헌금 잘못했다고 죽은 겁니다. 그래서 이 대목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보라고 놀릴 겁니다.
우리 같으면 헌금 안하고 안 죽었어요. 헌금을 하면 죽는데 미쳤다고 헌금합니까? ‘헌금 하니까 헌금 잘못했다고 죽이는구나. 그렇다면 애초에 헌금 안하면 내가 죽을 이유도 없는 거예요. 꼭 바보 같아! 집구석에 가만있으면 될 것을, 교회 안다니면 ‘화 있을찐저.’ 같은 듣지 않을 이야기를 교회 굳이 가서, 게다가 자진해서 헌금 했다가 ‘헌금 떼먹었지’라는 소리 듣고 졸지에 저주받아 죽어버렸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일어난 교인 두 명이 사망한 이 사건으로 인해서, 사도행전 5장 11절에 아주 중요한 말씀으로 나오는데,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문제인거예요. 헌금을 잘못하니 하나님께서 치셔서 내외간이 둘 다 죽었습니다. 남편에게 ‘헌금이 이게 다냐?’ ‘다입니다.’ 하자마자 죽어버렸어요. 아내에게 ‘헌금이 이게 다냐?’ ‘다입니다.’ 하자 아내도 죽어버렸어요. 이걸 듣고 온 교회 교인들이 다 두려워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교회에서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어요. 베드로밖에 없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자기 내부의 두려움을 돈으로 메꿔 보려는 시도를 한 거예요. 인간이 갖고 있는 원초적인 공포, 두려움, 그 두려움을 돈을 바치면 그 두려움이 소멸될까하는 생각에 헌금을 했는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 통하지 않더라는 겁니다. 두려울 것 같으면 애초부터 헌금을 하지 말았어야 되지요.
‘헌금 하면 이번 달에 10만원이 날아가는데 곤란하다.’ 이렇게 두렵거든 헌금을 하지 말아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두렵기 때문에 헌금을 하는 것은 부흥사들의 전형적인 수법이에요. 부흥사들이 ‘여러분 사도행전 5장 읽어보셨습니까?’라고 시작하지요. 항상 목요일에 헌금하게 하지요. 목요일 날 헌금 거두어서 금요일에 먹고 튀어야 되니까.
‘여러분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작정헌금을 절반밖에 안 해서 죽은 것 알지요?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분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헌금 제대로 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식으로 그들의 약점인 공포심을 자극하니까 사람들이 그 공포심에 헌금을 하는 겁니다. 학개서에 보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너희들은 좋은 집 짓고 살고 주님은 초라한 집에 사니 이게 말이 되느냐? 그러니까 너희들이 장사든 뭐든 일을 벌이면 벌이는 족족 안 되고 고부간에 갈등생기고 애들은 공부도 못하고 집안에 우환이 끓고 원인 모를 질병에 시달린다. 그러니 그 원인을 생각해 봐라. 그것은 하나님 보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돈을 쓰니 그렇다. 그러니 이제는 여러분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우선으로 하고 나머지 돈으로 여러분이 사시기 바랍니다.’라는 식으로 부흥사들이 여러분의 공포심에 호소를 한다니까요.
이 이야기를 하니까 내가 속이 다 시원하네요. 인간이 그 공포심을 잠재우기 위해서 헌금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탄의 역사입니다. 악마의 역사에요. 헌금이란 예수님께서 우리가 갖고 있는 원초적인 공포심이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해소된 것을, ‘너희에게는 축복만 주어지지 저주가 없다.’라는 것을 안 결과의 효과로 주어지는 것이 헌금이지요.
헌금에는 뭐가 없어야 되느냐, 헌금해서 공포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헌금을 한다는 자체가 이미 ‘돈으로 살아야 된다는 걱정근심이 사라졌습니다. 웬 기적입니까?’라고 표시하는 것이 헌금이어야 되지요. 이것이 고린도후서 8장에 나오는 헌금 이야기입니다. 헌금 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의 양만큼 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적도 없는데 뭘 냅니까? 은혜를 받은 적이 없으면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이고 두려움이 생기면 교회 가서 어찌되었든 간에 하나님 앞에 저주를 커버하기 위해서, ‘주의 힘으로 저주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 힘으로 저주를 없애는 방법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나님의 손에 듬뿍 돈 쥐어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올 저주도 하나님께서 봐 줄 수 있다.’ 이런 인간 대 인간의 인위적 계산에서 헌금을 하는 거예요.
입 째져라 좋아할 인간 목사밖에 더 있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을 마치 우상 사귀는 조로 한다는 말이지요. 근본적으로 여러분에게 두려움이 있고 공포심이 남아 있거든 헌금 안하면 돼요. 하지 마세요. 헌금 하는 것 속에 교회 오는데 들어가는 비싼 기름 값, 리터당 1980원씩 하는 그것도 포함되거든 아예 교회 안 오면 되고.
요새 인터넷 발달되었잖아요. 얼마 전에 우리교회 방송 손도 봤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KBS 보는 것 같다고까지 하시고……, 집에서 보시면 되잖아요. 오늘 마라톤도 한다고 하지요. 차도 막힐 텐데.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한테는 이야기를 잘 안했어요. 제자들한테 이야기 할때도 있지만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바리새인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화 있을찐저.’ 사람들에게 바리새인을 칭찬 아닌 칭찬을 해 버렸어요.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듣는 바리새인 기분 좋았습니다. 주께서 성적순을 내버렸습니다. 천국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바리새인밖에 없다고 했으니까 바리새인들이 최고인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이야기할 때는 바리새인이 기분이 아주 좋았지요?
나중에 뭐라고 하느냐, 창녀가……, 요새 말로는 마사지 걸, 안마시술소 종업원이 너희보다 먼저 천국 간다, 그렇게 하시지요. 뒤에 가면 ‘너희가 보기에 가장 사악하고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하는 돈만 밝히는 세리가 오히려 의인이고 네가 바로 죄인이다.’ 했습니다. ‘이레의 십일조를 하고 금식하고 가난한 사람 돌보고 구제, (요새 말로 바자회)까지 했습니다.’ 하니까 ‘네가 바로 지옥 갈 인간이다.’ 합니다.
듣는 바리새인이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처음부터 칭찬을 안 해줬으면 좋았는데 처음에 띄워주고 나중에 밥그릇을 엎듯이 해버리니 그 바리새인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 바리새인 마음을 우리가 헤아릴 줄 알아야 됩니다. 헤아리고 자실 것도 없어요. 우리가 바리새인이니까 예수님 말씀을 들으면 다 알아요.
교인들 뜻은 그렇습니다. ‘제발 진실을 이야기하지 말라. 제발 거짓을 우리에게 말해 달라.’ 왜, 너무 물이 깨끗하면 고기가 못살아요. 천국에 가기가 힘든가 하는 것을, 교회 오기가 얼마나 힘든가 하는 것으로 제대로 보여줘야 됩니다. 교회 가는 것이 너무 시시하고 쉬워버리면 안되지요. 천국 가는 것은 교회 가는 것에 비교할 바가 아니거든요. 엄청나게 어렵지요. 왜, 너무 깨끗하니까.
너무 진실하니까. 하나님이 찾아오면 숨이 막힙니다. 서울 가서 새 가정 꾸려서 신접살림 들여놓고 ‘자기 사랑해.’ 이런 문구들 냉장고니 세탁기니 살림살이에 붙여놓고 알콩달콩 사는데 눈치도 없이 촌에서 농사짓던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시커먼 작업복 입고 올라왔는데 이것저것 시장가면 다 살 수 있는 것들 바리바리 싸 왔어요.
그렇게 들이닥치면 숨이 막히지요. 촌에 있으면 그냥 돈 몇 푼 보내주고 말면 되는데 왜 직접 맞닥뜨리냐 하는 거지요. 멀리 있으면 돈 보내주면 효자 소리나 듣지요. 직접 와 버리고 한 이틀 뒤에 갈 줄 알았더니 안가면서 ‘이왕 온 김에 동생 결혼식이나 보고 갈란다.’ 하면 동생도 없는데 무슨 결혼식? 아예 눌러 살겠다는 뜻인지.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숨이 막히고 기가 막히고 너무 멀어지면 자기 신앙의 티를 내는 열정이 식어버리니 거리를 적당하게 조정하는 거예요. 미팅합니까? 인간들은 항상 요령을 부립니다. 그런데 이걸 아셔야 돼요. 신앙생활 몇 년 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것을 알지만 신앙생활 오래도록 한 사람들, 목회 한 4, 50년씩 하고 나이 70되고 80된 목사님들, 이들은 이제 알지요. 하나님은 대지라는 것, 절벽이라는 것, 하나님 계시다고 여겼던 그 현장에 가보면 그냥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목사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있다고 가정하고 갖가지 설교를 했지만 막상 본인에게는 본인뿐만 아니고 어느 누구에게도 하나님은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감추기에 급급합니다. 그것을 네 글자로 ‘바리새인’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또 다른 말로 하면 ‘개혁주의(신학)’라고 합니다. 없는 하나님을 교회 질서와 사회 안녕과 발전과 선함을 위해서 신이라는 개념을 집어넣은 거예요.
유치원 애들보고 ‘기도하세요.’ 하면 기도 잘하는 것처럼 이 가정에 하나님을 집어넣으면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이 착하고 선하게 돌아갈 줄로 작업을 한 겁니다. 그러나 본인은 전혀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이 없어요. 하나님을 생각해 본적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화 있을찐저 너희들이 바로 저주받아야 돼.’ 하는 것은 바로 그 당시에 인간적인 측면에서 최고로 수준 높은 신앙생활을 한 거예요.
바리새인의 원칙(모토)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생활화 하자.’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말씀은 그냥 지식이 아니고 행동으로써 나와야 한다, 이 구호 이 모토가 그 당시 바리새인이 사두개인과 대결하면서 주장했던 거예요. 사두개인들은 성전중심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사람들인데 그들의 주장은 ‘성전만 있으면 복이 온다.’는 주장이에요.
바리새인은 그게 아닙니다. ‘성전이 아무리 있더라도 그 사람이 말씀의 생활화가 되고 말씀의 열매를 맺으면서 향기를 내야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성도다.’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것을 백성들이 다 알고 있고 제자들이 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바리새인처럼 의롭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씀을 하신 겁니다.
누가 감히 바리새인들을 따라 붙어요? 바리새인들은 전문가인데요. 말씀대로 살아서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에 대해서 실제로 실적을 내놓는 전문가집단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보고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말씀을 평생 생활하려고 애쓰는 것은 다 너희가 돈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너희 하나님은 마귀다.’라고 이야기한 예수님의 그 하나님은 바리새인과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추상적인 개념의 하나님하고 달라요.
같은 하나님으로 나와도 예수님 쪽의 하나님이 저쪽 하나님을 칠 수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하나님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는 전혀 하나님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보내주고 예수 보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비로소 발생이 되고 예수님의 행하심을 통해서 비로소 알려지는 그 하나님이 아니면 이 세상 어떤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인거예요.
예수님의 하나님밖에 없어요. 다른 하나님은 원래 없었던 겁니다. 없지만 사람들은 사회 질서를 위해서, 교회 질서를 위해서 하나님을 도입시켜야 되는 겁니다. 그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이냐, 나의 착함을 장려하고 격려하고 말씀대로 살았느냐, 안 살았느냐, 그래서 복 받느냐 혹은 저주받느냐를 양으로 열매를 탐색해서 ‘아, 착하구나.’ 하고 측정이 가능하고 경쟁이 가능한 그런 하나님을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간직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부터 십일조가 뭔지를 이야기 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서론이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할 때 두려워하지 않는 분은 누구밖에 없다고 했습니까? 베드로 밖에 없다고 했지요. ‘헌금 잘못해서 교회에서 죽는 것, 당연한 것 아니야? 그게 뭐가 이상해.’라고 베드로는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두려운 가운데 헌금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헌금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헌금 했다는 이유로 죽어버린다면 세상에 어느 인간이 하나님에게 죽기 위해서 교회 오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베드로보고 한탄하듯이 물어요.
살려고 교회 오는데 교회 와서 죽어버리면 어느 인간이 교회에 오겠나, 그 말이거든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나는 내 양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린다.’고 했지요. 분명히 예수님께서 이야기 했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생생하게 살고 있는 인간을 더 살게 하기 위해서 왔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교회에서 죽음을 제공해 버리면 그 다음부터 우리는 교회 올 마음이 싹 가시는 거예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거예요. ‘제발 그럴 것 같으면 좀 가 줘. 너희들이 살려고 하는 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가 줘야 그 때에 주님께서 자기 양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긍정적으로 살아난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자꾸 가짜들이 모여서 하는 말이 ‘목사님, 제발 진실을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거짓을 좀 이야기해 주세요. 우리가 밥 먹고 살기도 힘든데 거기다가 진실을 말해버리면 우리가 가짜인 것이 드러나 버리면 우리가 어떤 식으로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발 대충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슬쩍 넘어가 줘야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신다면 복음을 아는 목사님들이 하는 것은 한 소리 밖에 없지요.
‘그래도 주님은 자기 양을 버리지 않습니다.’ 자기 양을 버리지 않는 방법 중의 하나가 제발 교회 나와서 설교만큼은 오직 복음, 오직 피, 오직 진실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장사가 안 되고 교회 문 닫는다고 할지라도. 서울의 ‘하나교회’ 지금 문 닫는다고 공고 냈습니다. 시설 잘 되었으니 누가 인수해 가라고. 생각 있는 분은 인수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아니요.’가 아니고, 불평스럽고 불편스럽고 짜증스러운 일이 주님 보시기에는 하나도 일어난 적도 없는데 교인들은 교인들대로 교회 와서 하나님께 짜증내고 불평하고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은 안 나오는 사람들대로 ‘그 교회는 너무 복음만 이야기하더라.’ 하고 삐져서 안 나오고, 모든 것이 불평이라는 것은 뭐냐, 아직도 자기긍정을 못 버리고 있다는 거예요.
구원받는 능력이라는 것이 뭐냐하면, 자기 양을 마지막 날에 살리는 이 점에 대해서는 ‘주님께서는 실수한 적도 없고 착오를 일으킨 적도 없고 하자가 없습니다.’가 긍정적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그야말로 두려움 없이 교회 나올 수 있어요. 내 생각을 자꾸 가지니까 내 자존심을 따로 챙기니까 모든 것이 불평스러운 거예요. 같은 교인들도 꼴 보기 싫고. 우리 교인들 생각도 다 그래요. 꼴 보기 싫고 짜증나고, 또 그런 이야기를 하면 활짝 웃고……, 이게 무슨?
70, 80된 목사가 ‘결국 예수고 하나님이고 없다.’ 하는 그 극단적인 숨겨놓은 무신론을 미리 20대, 30대에 다 까발려져야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두려움, 공포가 어디서 나왔느냐? 주보를 보면 정리가 잘 된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십일조가 뭐냐, 그 당시가 농경사회입니다. 땅에 인간의 노동이 가미되어서 농사를 짓는다고 하는 것은 이방민족들이 하는 소리에요.
이방민족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고 약속의 땅의 특징이 뭐냐, 인간의 노동과 도구와 농사기술을 사용해도 땅 자체가 생산물을 꽉 쥐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법을 받으면 생산물을 내고 만약 하나님의 지시를 어기면 너는 저주받게 되어 있어.’라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 약속의 땅이에요.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인간을 통해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비를 내리고 땅에서 열매를 맺는 것이 인간과 관계없이 하나님과 한편이 되어서 그쪽끼리 이야기가 따로 통해요. 인간은 바보예요. ‘열심히 농사지었으니 결실을 이루겠지.’ 하면 땅이 있다가 ‘네 맘대로? 나는 인간지시 안 받아. 나는 하나님 지시 받아. 하나님이여, 올해 농사 좀 잘 되게 해 줄까요? …… 알겠습니다.’
하늘이 있다가 ‘하나님이여, 비 좀 내려 줄까요?’ ‘내려줘라.’ 그러면 비 오는 거예요. 약속의 땅은 하늘과 땅과 인간 전체가 축복이 오는 그 약속의 출처에 대해서 관련짓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연결 짓는 것을 두 자로 언약이라 하는데 그게 무슨 언약이냐, 제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언약, 모세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그냥 하늘이야 비오면 되고 땅은 비오면 곡식을 그냥 내면 되지만 인간은 그것보다 더 해야 돼요. 참새는 날기만 하면 되고 잡초는 자라기만 하면 되지만 인간은 그 나라와 의를 구해야 될 책임을 언약 속에 부여받습니다. 인간의 특수한 모습이에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제사를 초점인데요, 제사를 잘 드리면 이스라엘은 땅도 풀리고 하늘도 풀려서 농사가 잘 돼요. 그런데 제사에 대해서 관심들이 없으면 하늘도 땅도 다 닫혀서 가뭄이 들고 흉년이 들고 곡식이 잘 된다 해도 갑자기 이웃나라가 와서 다 빼앗아가는 일들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게 약속의 땅이라는 겁니다. 어렵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제사가 중요한데 그 제사에 들어가는 비용은 어디서 나옵니까? 제사를 주관하는 전문가들을 제사장이라 합니다. 매일 제사하는 것이 버겁기에 보조원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레위지파라는 거예요. 그 레위지파와 제사장의 특징이 뭐냐, 농경시대에 농사지을 땅이 없는 거예요. 상인에게 점포 없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공무원에게 임지가 없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래서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직접 하나님 앞에서 언약이 유지되면 축복이고 언약이 유지 못되면 저주가 되는 거예요. 그들은 개인적으로 아슬아슬한 겁니다. 다른 사람은 농사만 지으면 그만이지만, 지금 그들은 자기 집에 땅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직접 상대해서 하나님의 거룩과 의를 만들어내야 돼요.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만들어낸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사람에게 저주를 축복으로 전환하는 그 장치가 언약궤가 중심에 있는 제사하는 장소입니다. 그 제사장소인 거룩한 곳에 들어가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도 안 죽고 버티면 축복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대표자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고 사는 것은 누구에게 달렸느냐하면 제사장들의 제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느냐에, 그리고 제대로 비용이 충당되느냐, 거기에 달려 있는 거예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무지 초조하고 불안하지요. 한 달 동안 잘해도 그 다음날 못하면 죽는 겁니다. 해물 탕이 참 맛있는데 해물 탕 속에 든 미더덕을 입안에서 터뜨리면 그 뜨거움이 온 입안에서 폭발하잖아요. 안 먹을 수도 없는 그 뜨거운 것,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그 제사의 뜨거움, 거기에 온 신경을 쓰기 때문에 사적으로 자기의 생계유지나 돈 번다는 생각을 일체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만약에 제사장이나 레위 인들이 농사짓는 사람들처럼 자기 돈 버는 것에 신경 쓰면 그 제사자체가 ‘네 마음가짐이 엉망이다.’ 해서 안 되는 겁니다. 온 나라가 저주받아요. 그래서 그들이 전적으로 제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누가 돈을 주느냐, 하나님이 제사장과 레위 인에게 돈을 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돈을 주는 것을 가지고 십일조라고 하는 거예요.
사람이 주지를 않아요. 하나님이 직접 줄 수 있는데 하나님이 손이 없잖아요. 손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이겁니다. 제사의 성공여부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가 결정된다는 것을 제사장이나 레위인만 알지 말고 전 국민이 알게 하기 위해서 전 국민을 경유시켜서 그런 돈의 흐름으로 제사장과 레위 인에게 오도록 하기 위해서 십일조라는 율법을 준겁니다.
십일조라는 율법은 뭐냐, 땅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생산물을 내게 되면 이스라엘백성들은 노동으로 참여할 뿐이지 이것은 자기들 땅도 아니고 생산물도 자기 것이 아니에요. 농사 잘 된 것은 제사덕분이라고 농사에 신경 쓰는 것이 아니고 그 시선을 제사장이 제사를 얼마나 잘했는가, 제사장의 제사의 충실도에 두면서 십일조를 거기에 전달하는 식으로, 물동이 전달하듯이 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생산물을 다시 제사장에게 전달하는 겁니다.
그 경로 가운데서 십일조를 내는 일반백성들에게 나의 것, 나의 돈은 일체 없는 거예요. 내가 돈을 내는 것이 아니고 복이 저쪽에서 왔기에, 내가 축복을 주는 것이 저쪽에서 옵니다. 내가 제사장을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제사장 먹여 살리는데 제사장이 예뻐서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은 모세언약을 계속해서 가동시키기 위해서 그냥 일꾼들을 하나님이 불렀는데 하나님이 주신 생산물의 십분의 일을, 제일 좋은 것을 떼어서 그들에게 전달하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십일조라는 겁니다.
기본은 하나밖에 없어요. ‘내 것은 없다.’는 겁니다. 그냥 뭐가 지나가는 것 같아요. 뭐가 지나가는가? 하나님의 것이 나한테 와서 나도 먹이고 저쪽도 먹이고, 그런데 하나님이 먹이는 것은 나한테 직접 먹이는 것이 아니고 제사를 통해서 나를 먹이고, 그 제사가 신약에 와서 완성된 것이 십자가라 하는 겁니다.
한 번 드림, 영원히 의롭게 되는 것, 잃어버린 양을 영원히 잃지 않는 방법은 ‘하나님의 축복, 너를 구원했다.’를 계속 되풀이 하는 것밖에 없지요. 되풀이하는 그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직업과 생활 여건을 줘서 그 모든 축복은 나의 긍정이 아니라 주님의 일에 하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것을 증거 하라고 평생토록 우리에게 밥 먹여 살리고 있는 겁니다.
은혜 때문에 헌금하고 복음을 위해서 살고, 그런 겁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메일을 보냈어요. 늘 메일만 보내고 얼굴은 안 보이는 여자 분인데 ‘헌금이 뭡니까?’ 하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어요. 아마 전에 사기를 당한 적이 있는 모양인데 하나님한테 입이 약간 나왔어요. ‘헌금이란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 쓰는 것이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서 쓰시는 헌금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위해서 점심을 맛있게 먹는 그것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주신 헌금입니다. 그것은 당신 속에 예수님이 들어 있기에 그런 거예요. 우리 속에 예수님이 들어 있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에게 헌금을 하는 겁니다. ‘네가 얼른 챙겨라.’가 아니라 우리 속에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증거 하라고. 따라서 항상 우리 속에 내 것이라는 것은 없고 하나님의 것인 예수님의 것으로 우리는 하나의 껍질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는 이미 다 이루었는데 우리가 우리 힘으로 구원받지 못하기에 그것을 미리 아시는 주님께서 자기 피로서 우리를 저주에서 복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놓았는데 우리는 그것마저 내 것으로 여기지 않는지 돌아보게 해주시고 이제는 우리가 우리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 되었사오니 우리 속에 달성할 수 없는 기적을 우리 속에 이미 품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면서 평생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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