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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케 하는 사람의 복

구원의 계획 2011. 9. 25. 10:07

화평케 하는 사람의 복(마태 복음 5:9)
                                                              - 하원식 목사


금번 가다피 라고 하는 독재자가 통치하는 리비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또한 그것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는 인간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모든 나라 특히 UN에서 동족을 향하여 피의 숙청을 하는 모습을 보고 가다피를 향하여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 하는데 저 북쪽의 정신나간 인간들은 리비아가 핵을 포기했기 때문에 저렇게 당했다고 한다. 참으로 정신병자다. 지금 일본이 비상이 걸린 이유가 무엇인가 ? 원자력 발전소가 어떻게 될까 해서 노심초사하는데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는지 정말 걱정된다.

 

마태복음 5장에서 산상수훈이 시작되는 서두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누릴 8가지 복을 말하고 있다. 그들 여덟 가지 복들 중에 일곱 번째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 말씀에서 "화평케 하는 자"란 말을 다른 말로 풀어 이해하자면, "평화를 만들어 내는 자"란 뜻이다. 자신이 평화를 누리는 자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고난을 당하고 불이익을 기꺼이 당하는 자를 일컫는다. 오늘 본문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했다.

 

먼저 和平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和'는 입 속에 밥이 있다는 뜻이며 '平'은 심장 두개가 나란히 공존한다는 뜻이며 '평화의 이념'을 의미하는 뜻으로 '경제적 평화'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렇게 더불어 산다는 공동체정신이 곧 평화의 출발점이 된다고 본다.

 

오늘 본문의 화평 '에이레네 포에오에' 라고 하는 말 중에 ‘포에오에’라고 하는 말은 실천한다는 뜻이다. 원문대로는 '평화를 실천하는 사람, 평화를 행하는 사람' 그런 뜻이다. 이것을 영어 성경에는 'Peace Maker' 라고 번역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화평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안되고, 화평을 실천해야 되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내가 화평을 만들어야 된다. 요즘처럼 서로 불신하고 대립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꼭 필요한 사람이 바로 이 '화평케 하는 자' '피스 메이커'인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트러블 메이커(Trouble Maker)'가 너무나 많다. 공연히 이 사람 저 사람 건드려서 불안하게 만든다. 평화로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트러블 메이커'가 많아서는 결코 평화 할 수 없다. 지난 토요일이 천암함 폭침 1 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사회단체라고 하는 인간들이 아직도 첨안함의 폭침이 북한의 소행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며 지내오며 사회적인 트러불 메이커로 자리잡고 있다. 자기들이 하는 일은 전부가 다 옳고 이명박 정권이 하는 것은 전부가 아니라고 하는 이상한 인간들!

 

그런데 '화평케 하는 자', 즉 그런 화평케 하는 피스 메이커가 되려면 먼저는 자기 자신이 아주 겸손해야 되고 욕심도, 사심도 없이 마음을 비워야 된다. 내 욕심을 챙기고 내게 돌아오는 이권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은 절대로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가 없다. 완전히 내 욕심은 버려야만 된다. 그 동안 인류의 역사를 회고해 보면 수많은 전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묘한 것은 어느 누구도 전쟁을 원치 않고 평화를 원한다고 한다. 그런데 세상은 갈등과 분쟁, 테러와 폭력, 전쟁이 그치지를 않는 것이다. 단순히 평화를 원하는 수동적인 자세 보다 성경은 평화를 만드는 적극적인 자세를 요구하신다. 평화를 가져오도록 평화를 위해서 일하라는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1. 화평케 하는 자는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본문에는 화평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 않고, 화평케 하는 자 즉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가 복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화평케 하는 것은 단순히 평화를 사랑하는 그 이상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평화를 만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다. 화평케 하기 위해 아픔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화평을 주기 위해 나의 이익을 포기해야 한다.

 

예수님은 화해를 위해 폭력을 쓰지 않으셨다. 오히려 죄인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조롱과 비난과 핍박을 당하셨고 마침내는 십자가의 형틀에 달리셔야 했다. 베드로전서 2장 22절에서 24절에 보면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현대인의 특징가운데 하나가 되는 대로, 안일한 그대로 살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고난 없는 영광을 얻으려고 한다. 십자가 없는 부활을 요구하고 있다.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축복을 받으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고난에 동참해야만 교회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화목케 될 수 있다.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고집을 피우고, 따질 것 다 따지는 그 곳에는 은혜가 임하지 않는 법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화평을 위해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여유와 고난도 감수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평화라 할 때는 전쟁과 반대의 개념으로 생각한다. 전쟁의 반대, 핵무기 폐기 운동, 반 독재 투쟁 등을 평화 운동이라 생각하는 것이 평화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다. 그러나 산상수훈 일곱 번째 복에서 말씀하는 평화는 그렇게 제한된 의미만이 아니다. 평화는 인간의 온갖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좋은 것을 향유하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이러한 평화의 개념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평화 애호가들이 아니며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다. 평화 애호가와 평화를 만들 어가는 사람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평화 애호가는, 고통스러운 세상을 도피해가면서 사는 도피주의자이거나 정치적 독재자도 될 수 있다. 인류역사 무대에 등장한 역대 독재자들이 내세운 슬로건이 인류의 평화다. 그들은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라는 명목 하에 남의 영토를 짓밟고 인권을 유린하고 많은 무고한 생명을 죽였다.


산상수훈 일곱 번째 복인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자기 중심, 자기 이익에서 초월해야 한다. 자신의 이익에 집착하거나 자기 중심이 되어서는 평화를 이루어 갈 수 없다. 동기가 순수해야 한다. 복잡한 정치적 동기를 가지고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없다. 화평케 하는 자란 정치적 의미보다는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이 건강하지 못하고는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온전한 평화의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온전한 평화의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다. 평화는 인간의 속성이 아닌 거룩한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에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영원히 살게 하셨다. 본래 에덴 동산에는 하나님, 그리고 아담과 하와, 모든 생물들이 함께 평화롭게 살았었다. 그러나 죄를 범한 인간은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동산 숲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평화가 깨진 것이다. 결국 인간은 평화의 동산, 에덴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추방당한 아담과 이브의 큰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인간과 인간사이의 평화도 깨어지고 말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므로 이제 인간과 자연사이의 평화도 사라지고 말았다. 동물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살벌한 생존원리가 지배하게 되었다. 오늘날 인간 사회도 어느 정도까지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류는 에덴 동산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도 에덴 동산의 평화를 소망하며 그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6-9)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세상에 충만할 때" 평화가 이룩된다는 것이다.

 

 

이사야서에 묘사된 평화의 현실은 주관적인 체험에서만 볼 수 있는 환상의 세계가 아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성취되지 아니한 하나님 나라의 미래다. 이 평화의 현실은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으로 시작되었고, 앞으로 다시 오심으로 역사 안에서 완성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심으로 이미 평화가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평화보다는 불화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 때문에 아비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남편과 아내가 불화 하는 사건이 빈번히 발생할 뿐만 아니라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간에도 전쟁이 발생하곤 한다. 예수를 자신의 주로 모시고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 가운데는 이 불화의 갈등과 고통을 견뎌내지 못해 신앙 생활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님 때문에 불화가 발생되는 것은,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 아닌 불화의 주인공이기 때문이 아니다. 평화의 왕 예수께서 오심으로 평화를 싫어하는 적대 세력들의 도전으로 거짓된 평화, 위장된 평화가 깨어진 상태가 그러한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참된 평화를 싫어해서 불화를 만드는 자들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화해를 싫어한다. 그리고 이웃과의 화해를 싫어한다. 삶의 의미를 서로 나누어 갖지 않으려고 한다.

 

언제나 좋은 것을 자기 혼자 독점하려고 한다. 평화 대신에 분열․분노․적대감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해가려고 한다. 그래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게 된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 자산에게 평화를 창조하는 능력이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참 평화가 없다. 이런 평화가 없는 인류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요,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살인적인 행위는 일찍이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인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세상은 화해가 아니라 분열이요, 용서가 아니라 복수와 분노로 가득 차 있다.

 

여러 가지 국제적인 기구들이 있지만 전쟁과 분쟁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지구촌 구석구석에서는 나라와 나라간에, 종족과 종족간의 싸움은 쉴 줄을 모르고 있다. 더욱 이상한 현상은 사람들은 전쟁을 하면서도 항상 평화를 위하여 싸운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짓밟고 나만 평화를 누린다면 그것은 위선이지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서 이 평화의 문제가 절실하다.

 

2. 하나님과의 평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차대전 때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원자폭탄의 위력은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1945년 8월6일 아침 그 때 마침 서쪽 하늘에서 재빠르게 소리도 없이 다가오는 비행기가 있었다. 다가온 비행기는 상공을 두어 번 선회하더니 시꺼먼 물체 하나를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히로시마 시민 30만 명의 생명과 재산이 잿더미가 되고 만 것이다.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가? 그 원자폭탄 제조의 총 지휘를 맡았던 '로버트 오펜 하이머'씨가 국회에 출석해서 증언했다. 의원들이 묻기를 "그 무기를 방어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는가?" 고 질문을 했다.

 

그는 대답하기를 "네, 분명히 있습니다" 위대한 과학자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평화입니다" 라고 오팬 하이머 박사는 정숙하게 대답을 하고 심각하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청중을 바라보았다. 원자 폭탄을 방어하기 위하여 더 위력이 센 폭탄을 만들려는 사상이 일반인들의 사고인 것 같다. 그러나 그 방법은 더 큰 불행과 파멸을 가져 올 뿐이다. 최고 위력의 무기는 "평화"다. 이 평화는 곧 화목으로만 이루어진다. 화목이 깨지면 원자폭탄보다 더 무서운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하나님과의 화평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우리가 평화를 얻는 첫 걸음이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 평화를 체험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화평케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사야 48장 22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인생에게 있어서 모든 문제, 모든 불화는 결국 하나님과의 불화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죄인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만 문제가 해결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신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라고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죄인들과 화평키 위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시키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시며 우리와 화목케 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신 목적은 바로 평화를 주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을 주시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바 되었다. 죄로 만신창이가 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화평을 구체적으로 이루시기 위해 자신을 던져 십자가에 희생의 제물이 되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릴 평화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평화요, 하나님 안에서의 평화다.

 

죄를 지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는가? 인간의 죄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는 평화가 존재할 수 없다. 지난 3000년 동안의 인류의 역사에 3500번이 넘는 전쟁이 일어났다. 지진, 홍수, 가뭄, 태풍 등 의 자연재해는 지금도 계속되는 가운데 인류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있다. 세계 평화를 위한 인간의 부단한 노력가운데도 불구하고 좀처럼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첨단을 달리고 있는 과학과 의학이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다. 월등한 경제 이론이나 정치이념이 인간에게 평화를 안겨주지 못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평화는 이 땅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하나님 없는 평화는 없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평화다. 그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 누가복음 2장14절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하늘의 천군 천사가 찬송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했다.

 

다시 말해 인류의 평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14:27) 과연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인류 평화를 위해 행하신 일은 바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었다.

 

성경은 이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로새서 1:20)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4-18)

 

이제 인간은 평화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한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한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시한 평화의 길이다. 예수 십자가가 없는 곳에 인류의 평화는 없다.

 

인류 평화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시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러나 지금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눅 19:41-42)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평화의 길을 받아들이지 않고 며칠 뒤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그들을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인간이 사는 길은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평화의 길을 트게 하신 십자가의 예수를 거절할 것을 미리 아시고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고난을 받으셨다. 주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잔을 나누어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과 피이므로 너희도 성찬을 받을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다.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내 몸 속에 넣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이룩하신 뜻대로 내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다는 뜻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바로 십자가의 예수를 전파하여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드는 자들을 말한다. 인류의 평화는 예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로마서 5장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하였다. 하나님과의 참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기쁨을 의미한다.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과 반목하는데서 시작한다.

 

하나님과 반목하며, 하나님께 대적하는 인간은 결코 평안을 누릴 수 없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결코 안전할 수 없다. 이 모든 인간의 불행을 극복하자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이 깊은 반목의 죄악을 청산하고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는 은혜로 증언한다.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평화를 이루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 자가 되신 것이다. 오늘 세상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원리를 잊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한다.

 

3. 화평케 하는 자의 복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축복
화평케 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새롭게 된다는 것이다. 곧 양자 됨의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경험한 자는 하나님을 닮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게 된다. 여기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는 '인정을 받을 것이다', '~의 신분을 받게 될 것이다', '~으로 여김을 받을 것이다'라는 히브리식 표현법이다. 평강의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성도들에게 나타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화평을 만드는 하나님의 평화의 사도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현장에서, 그 곳이 교회이든, 직장이든, 상점이든, 동네이든지 간에 모든 이들을 화평케 하는 축복의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여기 일컬음을 받는다는 말은 인정을 받는다, 지위와 명예를 얻는다, 존귀한 자로 간주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예수님과 같은 존귀와 명예를 얻는 축복을 말한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워 진다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 대해서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권세"라고 하셨다.

 

주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이다. 자녀는 부모를 닮는다. 여러분들의 가정을 보면서 자녀들이 어쩌면 그렇게 부모를 꼭 빼 닮았는지 감탄할 때가 많다. 마찬가지로 평화를 이루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란 말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평화롭게 살아갈 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우리의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라는 말씀을 듣는 것은 귀한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앞으로 누구에게서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가시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 보면 "그리스도인이란 평화로운 자이며, 평화를 만드는 자"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평화는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서 평화를 이루어 가는 사람들이 되자.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되는 길이다. 십자가는 인류가 서로 하나되는 길이다.

 

우리는 자기를 십자가 못박는 정신을 가지고 서로가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십자가로 하나되는 것, 인간과 인간이 십자가로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평화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십자가로 우리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고후 5:18) 그러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지 못하면 평화의 세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화평케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사이, 인간과 인간사이, 민족과 민족사이, 인간과 자연사이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랑으로 희생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마음속에 평화를 체험해야 한다. 자기 마음속에 십자가를 통한 평화, 자유, 해방을 체험함이 없이 다른 사람에게 평화, 자유, 해방을 가져다 줄 수 없다. 예수께서 가시면류관에 찔리시고, 채찍에 맞으시며,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시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평화, 인류의 평화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체험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나아가서 예수를 전파하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기 바란다.


원자탄을 개발한 미국의 뉴멕시코 주에 있는 '로스앨러모스' 라고 하는 연구소가 있다. 거기에 '브래드 버리'라고 하는 과학 박물관이 있고 그 정문에 이러한 큰 글이 쓰여져 있다. 원자탄이 터지는 큰 버섯 모양의 그림을 그리고 이렇게 거기 쓰여져 있다. "만약에 평화가 강대국간의 전면전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면 1945년 이후의 이 세상에는 평화가 올 것이다. 이 평화는 바로 원자탄이 주는 평화다." 지금 원자력이라고 하는 엄청난 힘으로 무기를 만들어 놓고 강대국은 싸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제 세계 전면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전쟁이 일어났다 하면 너 나 할 것 없이 다 죽으니까요.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다. 결국은 원자탄이 주는 평화다. 그런데 정말로 세상은 그렇게 평화스럽게 되어 가고 있는가? 2차 대전 이후에 세계의 평화가 있는가? 큰 전쟁이 없다고 평화로운 세계에 살고 있는가? 세계가 조용하다고 평화인가?


이게 평화인가? 북한은 언제 봐도 조용하다. 데모도 없고 파업도 없다. 조용하다. 그것이 평화인가? 이러한 힘의 논리에 의한 평화, 이것을 평화라고 할 수는 없다. 2011년은 국제연합 유엔이 66년 되는 해다. 21세기에 들어와 온 인류가 가장 많이 들어왔던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평화"라는 단어일 것이다. 평화란 모든 인류가 참으로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제가 제일 많이 듣는 뉴스는 전쟁의 소식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평화를 원하지만 늘 전쟁이 이 땅에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세상에 왜 전쟁이 있는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했던 동서 냉전의 시대가 지나간 오늘에도, 전쟁은 어째서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인가?

 

오늘 세계의 문제가 무엇인가? 우리는 어째서 21세기에 이 많은 전쟁을 보게 되는 것인가? 전쟁의 위협과 이 모든 불행과 불화는 어째서 있는 것인가? 성경이 말하는 해답은 단 하나, 곧 "죄"다. 우리 인류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사람의 정욕과 탐욕과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성이다. 개인과 개인사이든, 어떤 단체와 단체 사이든, 국가와 국가 사이든, 모든 불화와 갈등의 원인은 바로 사람의 정욕과 이기주의다.


세상은 평화가 필요하다. 오늘의 세계는 화평케 하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 그러면 화평케 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사람들은 평화라고 하는 말을 전쟁의 반대말로만 사용한다. 전쟁이 끝났거나 일시적으로 중지가 되면 평화가 왔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은 멈추었지만 땅이 황폐해지고, 시가지와 가옥은 폐허가 되고, 사람들은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면 결코 평화라고 말할 수 없다. 한순간의 고요함 그것은 위장된 평화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화평케 하는 자란 그냥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평화스럽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단순히 평화스럽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거저 별탈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들로서 어려운 일이나 위험한 상황을 피해 조용히 살려는 소극적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겐 진정코 평화가 없다. 도리어 소외감과 불안감과 적대감이 있다. 화평케 하는 자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을 말한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평화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평화를 만들기 위하여 고통과 싸움의 현장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다.

 

여러분들은 지금 위장된 평화 속에 속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들에게 참 만족과 기쁨이 없고 번영과 행복이 없는 고요함은 참 평화가 아니다. 샬롬은 텅 빈 고요함이 아니라 완전함으로 가득 찬 상태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샬롬의 세계다. 화평케 하는 자란 평화 애호가가 아니라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다.

 

평화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샬롬이란 말이다. 히브리어에서 샬롬이란 말에는 2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행복과 복지를 뜻한다. "다른 사람을 행복케 하고 이웃의 복지를 위하여 애쓰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샬롬이란 말의 두 번째 뜻은 바른 관계란 뜻이다.

 

이 바른 관계는 4가지에서의 바른 관계를 말한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다. 둘째는 이웃과의 바른 관계다. 셋째는 자기 자신과의 바른 관계다. 끝으로 물질이나 환경과의 바른 관계다. 이들 4가지 바른 관계를 맺으며 이웃들이 이들 4가지 바른 관계를 이루어 가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인식하고 부르게 된다는 뜻이다.


성 프란시스는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이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우리의 기도이어야 할 것입니다. 화목케 하는 직책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이 시대에 진정한 평화의 사도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펼치는 축복의 성도들이 되시길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