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 자료/설교모음

인생의 풍랑 속에 말씀

구원의 계획 2011. 10. 23. 23:56

 

인생의 풍랑 속에 말씀(마가복음 4:35-41)

                                                                  - 하원식 목사

 

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돈이 많아 호화롭게 살았지만, 마음은 늘 불안하고 초조하였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안정을 찾을 수 없었던 그가 궁리 끝에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그림을 구하기로 하였다. 드디어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전시하는 날이 되었다. 그는 전시장에서 작품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감상하였다. 아름다운 산밑에 호수가 있고 두둥실 흰 구름이 떠 있는 그림이 있었지만, 그는 이 그림을 그냥 지나쳤다. 또한 평화스러운 시골 마을의 정경을 그린 그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그림도 지나쳐 갔다. 평안을 주제로 한 그 많은 그림들 중에서 그의 마음에 진정한 평안을 주는 그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는 맨 마지막에 걸려 있는 그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 그림은 평안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것은 거대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암벽 한쪽 틈새로 로빈 새가 둥지를 틀고 알을 품고 있는 그림이었다.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폭포수에 휩싸여 천길 만길 아래로 떨어지고 말것 같은 둥지인데도 알을 품고 있는 로빈 새의 눈에서는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 그림을 선택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좋은 그림은 다 놔두고 하필 그런 그림을 고른 이유는 무엇입니까?"그는 분명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이 세상에 평안한 환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안을 얻는 길은 이 로빈새처럼 불안한 상황에서도 요동치 않고 평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지혜 서인 채근담에 “고요한 가운데 고요는 참 고요가 아니요, 시끄러운 곳에서 고요함을 얻어 와야 비로소 이것이 참 경계인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조용한 가운데 고요함은 참 고요가 아니다. 사람의 귀와 눈을 어지럽히는 현란한 소란 속에 마음의 깊은 고요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참 고요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수양과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1. 인생 길에는 풍랑이 찾아올 때가 있다. (37)

어느 날 해 저물 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가자'라고 말씀하신다. 여느 평범한 밤 호수와 다름없다고 느끼던 찰나에 풍랑이 일어났다. 그런 심한 풍랑으로 인해 제자들은 물에 빠져 죽게 되었다. 아주 위태로운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은 "우리는 이제 꼼짝없이 죽었다"하고 울부짖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었다. 늘 상 다니던 물길이었지만 예기치 못한 풍랑이 갑자기 일어남으로 아주 위험한 사태에 처하였다. 우리가 겪는 인생의 풍랑 속에서도 가장 힘들고 괴로울 때 주님은 침묵하시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주님은 보이지 않는다. 세상모르고 깊이 잠만 주무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대부분이다.

 

그런 가운데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불길한 생각만 깊어진다. 제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는다. 이제는 더 이상 주님을 기다릴 수 없었다. 그러자 주님을 깨운다. "주님,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런데 왜 상관하지 않고 있느냐? 는 말이다. 시끄러운 도시 소음에는 깨어나지 않지만 아기의 한숨 소리에는 깨어나는 어머니처럼 제자들의 기도 소리에 벌떡 일어나셨다. 그리고 광풍을 꾸짖으셨다. 말씀으로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시면 “잠잠하라.”예수님의 이 말씀 한 마디에 바다와 바람이 잠잠하여졌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또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놀랐다.

 

첫 번째 놀란 것은 바다와 바람 때문에 놀랐지만, 두 번째 놀란 것은 도대체 이 선생님이 누구시길래 바다와 바람을 말씀으로 잠잠케 하셨는가!  흔히 우리 인생을 가리켜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으로 비유한다. 기왕이면 잔잔한 호수를 유유히 항해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인생은 거친 광풍(狂風)이 부는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언제 어떻게 인생의 광풍이 휘몰아칠지 모른다. 늘 불안하다. 그래서 혹시 광풍을 아예 없앨 수는 없을까 궁리를 해본다. 그러나 그것은 망상에 불과하다. 인생 자체를 포기한다면 모를까, 인생의 바다를 지나가면서 광풍을 없애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그들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을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분처럼 평안히 잠들어 계셨다. 살아보겠다고 아우성을 치며 노를 젓고 있는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으신 듯 깊은 잠에 빠져 계셨다. 나 혼자만 어려움을 당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고 답답할 때가 우리 삶 속에도 수없이 반복된다. 하나님마저 나를 버리신 것 같아 외로움은 더해가고, 말못할 고통과 아픔을 어찌할 수 없어 이리 저리 방황하는 시간들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가 있다. 뒤척이며 잠들지 못해 돌아눕는 밤, 수많은 상념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태산처럼 버티고 있는 내 앞에 있는 험산 준령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나룻배도 없는 저 강은 어떻게 건널까? 산을 넘고 강을 건넌 후에 이를 언덕은 또 어디인가? 밤새 뒤척이면서 이 생각 저 생각에 사로잡힐 때 생각이 많을수록 산은 더욱 높아지고 골짜기는 더욱 깊어져, 갈 길이 더욱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까마득한 인생의 폭풍 속에서 도저히 피할 길이 없어 홀로 방황할 때면 나의 아픔만 외면하시는 것 같아 하나님이 야속할 때도 있다.

 

그러한 폭풍우 한복판에서 그들은 주님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주님을 흔들어 깨운다.?주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않으십니까??염려가 군대처럼 둘러친 밤, 우리의 도움이요 피난처 되시는 주님의 이름을 불러 아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되고 다행스러운 일인가? 제자들은 주님께 도우심을 구한다. 구해야 한다.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께 도움을 구해야 한다. 우리의 도움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고 도움을 구했던 사람들은 능력의 세계를 맛볼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풍랑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건강을 자신하는 사람에게도 뜻밖에 중한 질병이 찾아오기도 한다. 사업이 탄탄한 궤도에 오른 사람에게도 먹구름이 덮이는 일이 종종 있다. 행복한 가정을 설계하고 오손 도손 서로 사랑하며 살다가도 갑자기 위기가 생각지 못한 곳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2.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 잔잔해졌다(39)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향하여 외치셨다. “바람아! 잠잠하라. 바다야! 고요하라.” 아마 옆에 누가 있었으면 무슨 바다를 보고 명령을 하는가 하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예수님은 풍랑을 보고 꾸짖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이 명령은 창조적인 말씀이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 천지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말씀으로 지어졌다. 이 시간에도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이 구원을 받는다.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다. 병 고침을 받는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믿고 순종하면,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역사 해 주시는 것이다.

 

천둥 번개가 무섭게 치는 어둔 장마철 하늘처럼 살다보면 두려운 일들이 갑자기 날 둘러 쌀 때가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힘든 일을 만나고 그런 시간들이 계속되다 보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으로 다가올 만큼 마음이 움츠러들지요. 힘이나 돈이나 지식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고 막막할 땐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데 그런 속에서 더 깊은 평안을 느낄 때가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염려가 가득한데 오히려 나는 폭풍 한 가운데서 요동하지 않는 작은 배처럼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평화로운 그림 속에 들어 있었지요. 환경이나 세상의 어떤 일이 내 눈에는 잠시 커 보일 수 있으나 다 예수님의 다스림 안에 들어 있음을 내 영혼이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얼마가 지난 후 폭풍 같은 환경은 잠잠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예수님 안에 피해 있는 것 밖에 없었지요.

 

맑은 날에는 오히려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예수님이 폭풍 속에서는 마치 붓으로 그릴 수 있을 것처럼 선명하게 보일 때가 있어요. 예수님께서 어느 때보다 더 가까이 계시는 모양이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평안하라고 내게 계속 말씀하시면서 세상의 그 무엇도 날 상치 못하도록 세상 끝까지 지켜 주신다고 약속하셨지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똑같이 폭풍우를 경험하게 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어려움을 당할 때 보이는 반응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것을 당할 때 보이는 반응이 보이는 반응이 다르다는 것이다. 보이는 반응이 다르다는 것은 결과도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아름과 고난을 당하게 되면 자기 자신을 비난하고 상황을 비난하고 환경을 비난하고 좌절과 절망을 경험하게 되지만, 우리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고난과 폭풍우와 어려움 속에서도 깨달음을 진리를 그리고 보다 더 나은 성장과 발전을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계기가 찾아오기도 한다.

 

여러분과 저의 삶에 언젠가 우리의 앞날에 우리가 인생의 항해를 할때 물이 차서 우리가 거반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사실을 주님이 먼저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주님이 우리의 인생에 이렇게 풍랑과 어려움이 있게 하셔서 우리고 하여금 죽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좌절하고 절망하고 파선해서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신다. 예수님이 우리의 항해에 동행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네 가지 굉장히 커다란 위로와 희망을 가져다준다.

 

① 예수님이 우리의 항해에 동행하신다면, 예수님은 우리가 가야할 분명한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신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다. 분명히 방향을 제시해 주셨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예수님과 함께 가면 끊임없이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신다. 사람들이 왜 인생에 곤란과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냐 하면, 그 배에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선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배에 동행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선장이 되신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몰라 방황하고 혼미해 있을 때, 기도하는 순간 우리 일생에 선장이 되시는 주님께서 저 쪽 건너편으로 가자고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늘 말씀하신다. 너희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가는 길이 길이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올바른 방향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일생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반드시 가야할 목표와 방향을 결정을 해 주신다.

 

② 예수님이 우리 일생의 항해에 동행하신다는 말은 절대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절대로 파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여기 배가 파선했는가? 풍랑이 몰려왔다. 비바람이 쳤다. 배가 흔들렸다. 그리고 배 안에 바닷물과 빗물이 가득 차기는 했다. 그러나 이 배는 가라앉지 않았다. 왜 그럴까요? 그 안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여러분과 저의 일생의 항해에 동행하신다는 것은 절대로 우리가 파산해서 죽지 않는 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함께 우리 인생의 배에 계시기 때문에 반드시 예수님이 지켜주실 줄로 믿는다. 이 자연의 세계가 아픔과 고통을 가져다 줄 수는 있으나 우리는 패배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다.

 

③ 우리가 반드시 중간에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배를 타고 가시다가 제자들이 깨우게 되자 일어나셨다. 그리고 바람과 바다를 보시고 꾸짖으시며 말씀하셨다. “잠잠하라.”여러분과 제가 이 땅에 살면서 고난 당하고 아파하고 힘들고 풍랑이 불어오는 순간, 우리가 주님을 깨워 주님! 살려달라고 요청하는 순간 주님은 일어나 바다와 폭풍우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잠잠하라.”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있을 수 있지만, 주님 십자가 밑에 나아와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순간 주님은 다가오는 폭풍우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잠잠하라.”주님이 계시면, 반드시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이 있을 줄로 믿는다.

 

④ 주님이 배에 승선하신다는 말은 우리에게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배는 도중에 풍랑을 만났지만 배 안에 물이 가득 찼지만 결국은 바닷가 저편에 도착했다. 바닷가 저편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나라에까지 갈 줄로 믿는다. 그곳에 도착해 영원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영원히 살게 될 줄로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반드시 승리가 보장되어져 있다. 좌절과 절망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넘어지기도 하지만, 쓰러지기도 하지만 우리의 일생에 빗물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저편 끝까지 목적지에 반드시 도착지에 도착하게 되어져 있다. 주님은 풍랑 가운데 흔들리며 잠을 자고 계셨지만 풍랑이 일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게시지 는 않았다. 풍랑을 아시면서도 고요히 쉬고 계셨다. 이것이 곧 믿음이요, 주님의 마음이요, 영혼의 평화다.

 

우리들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이지 환경이나, 사람의 이나, 돈이나,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의 문제다. 거세게 부는 풍랑에 당황하는 것도 믿음의 문제요, 세상의 죄악도 믿음의 문제다. 여기서 믿음은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보살피심을 믿고, 하나님의 자유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다. 하나님의 역사 하심과 섭리를 믿는다.

 

 

3. 풍랑을 만날 때는 믿음을 나타내야한다. (40)

중요한 것은 풍랑이 닥쳐올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 이것이 바로 신앙인과 불 신앙인의 차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원망과 불평이 앞선다. 남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다가 낙심하고 좌절한다. 포기한다. 심하면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만약 여러분 가운데 예기치 않은 풍랑을 만났을 때 이런 반응을 계속 보이고 있다면 믿음의 태도를 점검해야 한다. 풍랑이 밀려오는 위기 상황 속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반응하며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주님은 상황을 진정시킨 후 ‘어찌히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신다. 우리가 인생의 풍랑 즉 위기를 만날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믿음이다. 수없이 우리를 위협하는 인생의 풍랑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인생의 풍랑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를 날마다 찾아와 위협하는 낙심과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인가?

 

①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랑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고통 없는 삶, 평탄하고 순조로운 인생 길을 걸어가기를 원한다. 이해는 잘 되지 않으나 설명할 수도 없지만 고난과 위기에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숨어 있다. 이 사건을 통해 나를 성숙시키고 준비시키려는 섭리가 숨겨져 있다. 이 고통을 통해 나를 더 거룩하게 변화시키려는 섭리가 숨어 있다. 믿음은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이루시도록 하나님의 손에 겸손히 맡기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이다.

 

② 믿음은 풍랑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제자들은 지레 겁을 먹고 두려움에 울부짖었다. 미리 결론을 내리고 죽는다고 울부짖었다. 제자들은 곧 죽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렇게 죽은 사람도 보았다. 풍랑이 밀려오면 두려움도 함께 밀려온다. 그런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두려워하는 것을 올바른 반응으로 보시지 않았다. 당연한 행동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음의 반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풍랑을 믿음으로 이기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약속을 붙잡기를 원하신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제 이런 말을 기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님, 거센 풍랑과 높은 파도 그리고 세찬 바람이 보인다. 두려움과 공포가 저희를 사로잡으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도 이 모든 상황을 보고 계신다.' 그렇다. 고통과 풍랑의 때에 필요한 것은 높은 파도에 고정되어 잇는 우리 눈을 예수님께로 돌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예수께 속해 있는가? 하나님이 나를 알고 내가 하나님께 속해 있는가? 자문해 보는 것이다.

 

③ 믿음은 예수님이 주무시더라도 견디는 것이다.

에수님과 함께 하는 항해인데 왜 풍랑은 일어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인생에 왜 고통과 좌절, 실패가 찾아오는 것인가? 또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주기에 하나님은 허락하신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고통들을 감수해야 하는 것인가? 믿음이 모든 답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도저히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 내 앞에 전개될지라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더 이상 따지지 않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우리가 위기에 처해서 주님이 필요한데 주님은 잠만 주무시는 것같이 보일 때가 종종 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을 자판기처럼 생각할 때가 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지만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상황을 변화시켜 달라고 간구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즉각 움직이지 않는다. 주님이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중에 대부분은 이런 시간을 견딜 수 없어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앞에 서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기도라는 동전을 집어넣고 원하는 것을 마구 누른다. 곧 원하는 대로 응답되기를 기대하나 자판기처럼 응답하지 않을 때가 많다. 우리는 당황해서 더 많은 동전을 넣고 세게 누르지만 주님은 그래도 침묵하신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판기가 고장났을 때처럼 흥분하고 마구 두드리며 날뛴다. 그리고 실망한다.

 

분명한 한 가지 결론이 있다.

인생은 고해다. 인생은 괴로운 바다다. 광풍이 클수록 고요도 클 것이다. 고난이 클수록 위로도 클 것이다. 아픔이 클수록 더욱 큰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흔히 인생을 항해에 비유한다.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중요한 시험에 실패하기도 한다. 중한 병에 걸리기도 하고, 잘 자라던 자녀들에게 어려움이 닥치기도 하고 그 아이들이 빗나가기도 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이런 풍랑들이 불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생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에게 어떻게 바람이 불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조금 양보해서, 비록 바람이 불어도 작은 미풍만 불어주기를 기대해 본다. 그렇지요?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우리 삶에는 정말 크고 작은 바람이 시도 때도 없이 불어닥친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가자’고 하셔서, 그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탔는데도, 광풍을 만났다. 자신들이 탄 배가 언제 어떻게 뒤집어질지 모르는 위기를 만난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죽겠다면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을 듣고 보신 주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예수님께서 “잠잠 하라 고요 하라”고 명하시면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자, 거짓말처럼 그 미친 바람과 회오리를 일으키던 파도가 잔잔해졌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는 창조주로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삶의 광풍과 파도도 잔잔하게 고요하게 할 수 있는 분이다. 위기의 때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다른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이 탄 인생의 배에 예수님께서 함께 타고 계심을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러한 위기에서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다.

 

여러분은 인생의 위기 앞에, 신앙의 위기 앞에 흔들어 깨울 수 있는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자.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는 예수님이 계신다. 이 주님을 신뢰하시오! 그러면 인생의 풍랑도, 광풍 아니라, 그 어떤 미친 바람도 주님 앞에서, 그리고 그 주님을 믿는 여러분 앞에서는 힘을 잃게 되어 있다. 그렇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풍랑을 이겨낼 수 있다. 예수님이 우리의 손을 붙들어 주시면 우리는 날마다 물 위를 걸어가는 승리로운 삶,기적의 삶,축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란다.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다 알고 계신다. 우리에게는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는 자연도 초월하여 물위로 걸어오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거기에 능력의 주님이 계셨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능력의 주님이 그 배 안에 함께 계셨다. 주무시는 주님,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런 도움도 주실 수 없는 주님의 모습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안타까운 모습이었지만 그분은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로 거기 계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분으로 보였다. 그러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시면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도움을 청했던 십자가의 강도는 낙원을 허락 받았다. 이적의 파노라마가 계속될 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마다 외면하지 않으셨던 주님이 택하신 제자들이 죽게 된 고통 가운데 있는데 어떻게 외면하시겠는가?

 

제자들이 두려워 한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다를 건너가기 전에 ?우리가 함께 바다 건너편으로 가자?는 그 말씀을 잊어버렸기 때문인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일점 일획도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말씀에 믿음을 두지 않고 환경을 바라봤기 때문에 두려움이 들어온 것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환경에는 마귀가 있어서 언제나 역풍이 불게 하고 우리에게 공포를 가져오는 것이다.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환경 저 건너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봐야 된다. 네덜란드 속담에 “인간은 고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두려워했던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인생이 항상 잘 감겨진 실패처럼 술술 잘 풀려만 간다면 무슨 걱정이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얼기설기 헝클어진 실타래가 되어 버리는 일도 제법 많기 때문에 우리는 밤잠을 설쳐야 하고 퉁퉁 부은 눈으로 일어나 또 다른 길은 없는가 찾아 나서야만 하는 것이다.

 

요즈음은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인 것처럼 말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스트레스라는 것이 무엇인가? 전문적인 해석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떤 일로 해서 가해지는 정신적 육체적 압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것은 모든 사람이 바라는 ‘평온’과 정 반대 방향의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안락한 환경에 있다고 할 태아도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니, 스트레스 없는 인생은 아무로 없다고 하겠는데 성도 여러분은 삶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소하며 살아 나아가는가? 지금 사는 삶에 대해 어느 정도의 만족도를 가지는가?

 

이 항해가 어떤 항해였는가? 누구와 함께 가는 항해였는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그 배에 함께 타고 계시는 항해 아닌가? 그런데 돌풍을 만나 위기에 처해버린 것이다. 어쩌면 이일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모든 것을 통제하는 능력을 가진 주님께서 동행하는 뱃길에 이런 불상사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가는데 어떻게 이런 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가? 오늘날도 그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주님과 함께 하기만 하면 만사형통이고 결코 어려움은 없다.?에 너무 크게 아멘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려움이 발생하면 아멘 했던 믿음이 바닥부터 흔들리는 것이다.

 

돌풍을 만나 침몰 직전에 몰린 배 안에서 제자들은 당황하고, 두려워하고 낙심했다. 제자들만 아니고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여러분도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런 주님의 태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만약 우리들에게 본문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고 우리가 그 배에 탄 사람이라면 주님과 같이 되어야 한다. 낙심하며 포기하며 절망할 것이 아니라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이 믿음을 활용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런 믿음을 활용했다면 돌풍과 위기만 볼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도 볼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광풍에 물결에 질겁한 제자들이 그런 주님의 능력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잠에서 깨어 말씀으로 풍랑을 잠재우실 주님이 생각하실 때,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저렇게 무서워하고 낙심하는가? 저렇게 나를 믿지 못하는가? 서운하신 게 당연할 것이다. 여러분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능력 가지신 분으로 믿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분명히 믿을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넉넉히 도우시리라.?는 것이 성경의 보장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고 지금도 말씀하신다. 여러분 생활 속에서는 주님의 능력,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풍랑은 과거에도 있었다. 현재에도 있다. 장래에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풍랑을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도 많은 성도들 가운데도 풍랑을 겪는 사람이 많다.

 

경제적인 풍랑 가정적인 풍랑 공동체의 풍랑 건강의 풍랑 인간 관계의 풍랑이 있다. 풍랑 없으면 바다가 아니다. 풍랑을 사모하며 살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너무 풍랑을 무서워하면 안 된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언제나 평안이 있다. 어떤 풍랑 속에서도 주님은 평안하시고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평안하다. 평생 칼뱅을 연구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칼뱅은 하나님을 어찌나 두려워했던지 다른 아무 것도 두려워하는 것이 없었다.”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안다면 우리들은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려워할 일이 없고 두려워할 것이 없을 것이다.

 

절망과 공포의 시간에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필요한 것은 세상 적인 능력이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가득 담겨져 있을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능력을 내려놓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없으니까 세상 적인 능력을 자꾸만 사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 많으면 많을수록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는 세상 적인 조건을 내려놓는다. 그 때 우리는 온전하게 승리할 수 있음을 믿는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이라는 한편의 시가 풍랑의 의미를 잘 표현한 것 같아 소개한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 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하는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사랑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로 남의 고통을 느꼈고 사랑과 용서도 알았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물살이 센 냇물을 건널 때는 등에 짐이 있어야 휩쓸리지 않고 화물차가 언덕을 오를 때는 짐을 실어야 헛 바퀴가 돌지 않듯이 내 등의 짐이 나를 불의와 안일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게 했으며 삶의 고개 하나하나를 잘 넘게 하였습니다.

 

풍랑이 없다면, 이런 아픔이 우리 가정에, 나에게, 자녀에게 닥쳐오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오히려 이 시의 저자처럼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내 인생에 풍랑이 불어오지 않았으면 나는 바르게 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랑도 몰랐을 것이다. 남의 고통도 알고 용서할 수도 있었다. 시냇물에 휩쓸려 가지 않도록 도와주었고 높은 언덕을 올라갈 때 헛 바퀴가 돌지 않게 되어 여기까지 잘 올 수 있었다고 고백하길 하나님은 원하신다.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하기 시작할 때 그 풍랑은 내게 축복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은혜의 바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