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방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2장 1~7절) [성탄절설교]
성탄절을 통하여 절망하고 낙심한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마음에 소망을 선포하고,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물질과 몸으로 마음껏 사랑을 베푸는 사랑의 축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는 4가지 중요한 신앙의 기틀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창조 신앙이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해 주신 것을 믿고 감사하는 것이다. 둘째는 오늘 말씀 드리는 임마누엘 신앙이다. 하나님이 함께 할 때 능치 못한 것이 없다는 믿음이다. 셋째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재림신앙이다. 주님이 역사의 종말에 다시 오셔서 역사와 인류를 심판하시며 믿는 자가 휴거되고 부활하리라는 믿음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죄 아래 있고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으로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기업을 누리게 된 것을 찬양하고 있다.
성탄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 임마누엘 사건이다. 하나님의 영원이 시간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 사건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희생이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에서, 예수님의 탄생의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제국은 물론 로마에 속한 모든 식민지까지 인구조사를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인구조사의 목적은 정확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일단 자신의 호적지로 가서 혼인으로 인한 새로운 가족의 출생이라든가 또는 다른 가족의 사망...... 그 동안의 변동상황을 신고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에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은 갈릴리 지방 나사렛이란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본래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유대 땅 베들레헴이 있는 다윗의 동네로 마리아를 데리고 호적을 신고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정혼한 사이였기 때문에 만삭이 된 - 성령으로 잉태한지 10개월이 다 된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로 인해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낳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이 때에 호적령이 내려지지 않았다면 마리아는 자신이 살던 나사렛에서 예수님을 낳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다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의 탄생이 맞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때를 맞추어 하나님께서 로마 황제의 마음을 움직임으로 전국에 호적령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요셉으로 하여금 만삭이 된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까지 가서 예수님을 낳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하게 성취되는가를 다시금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기 약 700년 전에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미가 5:2~3절을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한마디로 알기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시는데 반드시 베들레헴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일점 일획이라도 가감하지 말고 그대로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무오하기 때문에 함부로 가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신 4:2, 마 5:18).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언제나 예언하신 말씀대로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대로 이 땅에 다시 오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그 말씀대로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당시에 유대 나라는 망하여서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불행하게도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는 어느 선지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로부터 이제까지 그 많은 선지자가 메시아가 반드시 오실 것이라고 거듭해서 예언하였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에 대한 소망이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져서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거의 잊고 살았습니다. 이때를 가리켜 학자들은 영적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깜깜한 이때에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수많은 제사장이 있었고, 서기관들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메시아의 탄생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다 영적 소경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 나타났을 때, 그 별을 보고 별을 따라 베들레헴까지 먼길을 마다 않고 찾아왔던 동방박사들만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엎드려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고 했습니다(마 2:1~11). 그리고 그 밤에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천군 천사가 전해주는 말을 듣고 베들레헴까지 가서 아기 예수님께 찾아와 경배하였다고 했습니다(눅 2:15~20).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탄생하였지만, 막상 찾아와 경배한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동방의 박사들과 한 밤중에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몇 명의 목자들뿐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왕과 그 많은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탄생했다며 동방에서부터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하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짜와 시간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전세계가 크게 소동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교회 안에 남아있는 사람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오실 때 공중에 들려 올라가지 못한 신학박사들과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 등등 많은 사람들이 크게 소동하며,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의 상황이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는 홍수심판을 대비하여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식구들이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도 세상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홍수가 나서 저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두 사람이 밭을 가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며, 두 여자가 매를 가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두 사람이 같이 잠을 자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마 24:42~43).
이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는지 알지 못하므로 저와 여러분 모두가 평소에 준비해 놓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재림하실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를 해 놓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언제 오시든지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7절을 보면 [마리아가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고 했습니다. 구유는 낙타나 나귀나 말의 먹이통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 마구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그 당시 사람들의 고약한 인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젊은 여인이 산통이 있어 해산을 하려고 하는데 잠시라도 몸을 풀 수 있도록 방을 내어주는 사람이 그곳에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산모는 급한 나머지 마구간을 빌려 아기를 낳고 구유에 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광경을 볼 때 참으로 그 당시 이스라엘의 인심이 얼마나 야박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여관이 없었던 그 시절에 여행중인 한 나그네가 잠자리를 구했으나 아무도 그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케 하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삿 19:15).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각 지파들의 총공격을 받아 전멸당하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겨우 600명의 남자들만 남아 종족을 보존해야 하는 불행을 겪었습니다(삿 20:47~48).
마태복음 25:3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 오른 편에는 양을, 왼편에는 염소를 두고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양을 향하여 창세로부터 복 받을 자들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양들은, 우리는 결코 주님을 만나 본적이 없는데 언제 우리가 주님께 이런 대접을 했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시면서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왼편에 있는 염소들에게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도무지 너희가 나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가 주님을 만났으면 해드렸을텐데, 우리가 언제 주님을 만난 적이 있느냐고 의아해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대하여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우리의 이웃들에게 어떻게 행하며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예수님을 해산하려고 마리아가 이 부산 땅에 나타났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우리가 평소에 사랑을 베풀며 살았다면 요셉과 마리아가 왔더라도 역시 사랑을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사랑을 베풀며 살지 않았다면 역시 영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머리 속에만 집어넣고 갑니다. 그 중에 몇몇 사람들은 마음속에 감동을 받아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순종하고 행하는 사람은 참으로 적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출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 사회에 어떤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약 2:17).
믿음은 3가지로 이루어집니다.
1. 하나님(말씀)을 아는 것입니다.
2. 하나님(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말씀)을 사랑하며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2:19절을 보면,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인줄 알고 믿고 떤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귀신들도 하나님을 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 자신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귀신은 하나님을 신뢰한다거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잘 알아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귀신의 믿음을 우리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남한 땅에 1300만 명이나 되는 기독교인이 있다고는 하나 전혀 힘이 없습니다. 이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산 믿음의 사람이 정말로 드물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없는 사람은 불신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죽은 믿음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사랑에 있습니다. 우리 기독신자의 생명도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요한일서 3:10절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않는 자나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별하는 것은 그 사람이 의를 따라 사는지, 그 형제를 사랑하는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을 복음화 하는 방법은 기독교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즉 사랑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랑만큼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웃을 전도하기 원하십니까? 평소에 사랑을 많이 베푸시기 바랍니다. 저는 너무 바쁘다 보니 친척들을 일일이 찾아보지도 못하고 전화할 시간을 내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분들에게 매달 용돈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그돈을 어디에 쓰시든지 상관없이 보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얼마 후에 모두 다 교회에 나간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우리 모두 작은사랑이라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이번 성탄 감사헌금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이 말씀대로 살아서 우리 모두 작은 사랑이라도 나누어주는 산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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