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관복음서 속에서 전개되는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
오늘날 어떤 현대 신학자들은 바울을 제2의 기독교 창시자로 부르며 예수와 바울의 신학을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것으로 치부하려고 해 왔다. 그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와 바울사이에 신학적 일치점과 연속성을 찾기 보다는 차이점과 불연속성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상 바울의 신학중심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바울은 인간의 구원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시키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제시한다. 기독교의 창시와 관련하여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롬1:1),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따라서 바울을 제2의 기독교 창시자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며, 사실상 바울은 충실하게 예수의 신학사상을 해석한 사도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바울이 기독교 창시자라고 하는 신학자들의 주장은 어떤 것이며 그들의 모순점을 파헤치는 한편, 예수와 바울사이의 신학적 일치점과 연속성을 찾고자 한다.
예수와 바울사이의 연속성을 찾기 위한 것들 가운데 하나의 작업으로, 공관복음서에서 그대로 전개되는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의 구체적인 예들을 제시하며 그들의 공통점을 찾고자 한다.
I. 바울을 제2의 기독교 창시자로 부르는 자들의 주장과 모순점
1907년 William Wrede는 바울을 기독교 제2의 창시자로 부르며, 바울은 유대인의 예언자인 예수를 이방인의 하나님으로 바꾸어 놓았고 기독교를 오늘날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80년대 Hyam Maccoby와 Karen Amstrong과 같은 사람들에게 바울은 실질적 기독교 창시자가 되었다.
그들은 역사적 예수를 당대의 위선과 확고하게 굳어버린 종교적인 태도와 제도들을 비판하는 종교 혁명가로 여긴다. 여기에 바울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면서 그것의 기억들을 헬라의 신비종교와 헬라사상들을 접목시켜 예수를 신화화했다고 주장한다.
지금도 바울을 '고등 기독론' 창시자로 여기는 경향은 여전히 존재한다. 즉 그들은 바울이 순수하게 예수님을 추종했던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 온갖 개념들과 강조점들을 도입함으로서 원래의 단순했던 예수의 종교를 복잡하게 '고등 기독론'으로 만든 혁명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David Wenham은 그의 저서 '바울과 예수', '바울:예수의 추종자인가 기독교의 창시자인가' 등을 통해 예수님의 생애에 나타난 기독론과 바울 서신들에 나타난 기독론 사이에 상당한 연속성이 있음을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바울의 서신서들을 통해 비교 대조함으로 증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는 바울을 제2의 기독교 창시자로 부르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 오류를 지니고 있는지 지적하며, 또한 기독교의 창시와 관련하여 바울은 충실한 예수의 신학사상을 반영한 사도임을 주장한다.
사실상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을 이신칭의와 화해의 관점에서 논하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으로 설명한다(롬1:2-4).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전적으로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으며, 복음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요약한다(롬1:1-4;고전2:2;갈6:14). 사실 예수님이 전한 복음이나 바울이 전한 복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 나라'는 바울이 그토록 강조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도래한 것이기에 바울의 하나님 나라 복음과 일치한다(롬14:17;고전4:20;갈5:21;엡5:5;골1:13;살전2:12;딤후:4:1).
따라서 바울을 제2의 기독교 창시자로 잘못 오해하고 있는 자들은 바울의 신학사상이 철저하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사상에서 기초한 것임을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II. 공관복음서 속에서 전개되는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의 내용
오늘날 어떤 진보적 신학자들이 바울을 제2의 기독교 창시자로 보는 그릇된 견해의 이면에는 바울서신이 예수의 지상적 삶과 가르침을 많이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울이 예수에게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신학적인 상상력에서 나온 아주 다른 예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의 내용을 다룸으로 그들의 견해가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예수와 바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연속성이 있는지도 증명하게 될 것이다.
공관복음서 속에서 예수님의 사역가운데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는 신학적 명제를 다루기에 앞서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먼저 내리고 시작하고자 한다.
1.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의 원리
바울의 서신서 가운데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이신칭의 복음의 핵심이 담겨져 있는 책이다. 바울은 이 서신서 들을 통해, 율법의 행위가 아니고 오직 믿음만이 칭의의 유일한 수단임을 긴 신학적 논지로 논증을 하고 있다.
즉 인간은 처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죄를 짓는 순간부터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나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이 그대로 멸망당하는 것을 보실 수 없어 자기의 독생자 예수를 보내시어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하고 죽게 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의롭다 여기심을 받고, 죄사함을 받는다. 즉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의 원리를 바울은 갈2:16와 롬3:28에서 하박국 선지자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리라"(합2:4)의 예언에 대한 이신칭의 복음의 신학적 논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2. 공관복음 속에서 이신칭의 복음의 전개
그러면 이제부터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이 공관복음서 속에서는 어떻게 유사하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서 바울이 얼마나 예수님의 사상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지를 증명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증명할 수 있는 예는 공관복음을 통해 많이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제자들의 믿음과, 예수님의 치유이적 가운데 나타난 믿음의 예들과,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만난 사람들의 믿음을 통하여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기심을 받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앞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불신을 먼저 고찰함으로 이신칭의에 대한 복음이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고찰은 예수님과 바울의 신학사상이 사실상 많은 일치점과 연속성이 있는지를 논증하게 될 뿐만 아니라, 바울을 제2의 기독교 창시자로 보는 자들의 견해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증명하게 될 것이다.
2-1. 유대종교지도자들의 불신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하는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이 예수님 시대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개되어지는지를 서술하기에 앞서,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고 믿고 있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신앙에 대해 먼저 살펴보는 것이 이신칭의 복음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논쟁이 많이 나온다(마9:14-17;마22:15-22;마22:34-40;마22:41-46;눅11:24-26). 그들은 예수님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니며 예수님을 시험하고 책잡을 빌미를 찾고자 한다. 그들이 굳게 믿고 있는 철저한 율법적인 유대교 사상으로 보면 예수는 그들과 일치하지 않는 사상을 가지고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와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살펴보면 예수와 그들 사이의 율법관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율법관을 시정하며 그들이 구원의 길로 나아오기를 기다리시지만 그들의 교만은 결국 예수를 거부함으로 예수로부터 저주를 당한다.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피력하고 있는 이신칭의 복음에 의하면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할 뿐,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롬3:20).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신학사상을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통해 가르치시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는 유대교의 뿌리를 굳게 믿고 있는 자들로서 사실상 구원이 되시는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믿음을 가질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따라 다니며 그를 핍박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고, 율법에 대해서 연구하며 그것을 지키고 가르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율법에 대한 다른 견해를 가지고 가르치고 다니는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그를 잡아 죽일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거부는 예수님에 대한 깊은 불신이며, 율법의 행위와 관계없이 믿음으로만 구원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이신칭의의 복음을 거부하는 행위인 것이다.
결국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백성들을 가르치던 그들은 이신칭의의 복음을 거부함으로 예수님으로부터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라고 하는 현재적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2. 제자들의 믿음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유대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율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율법을 잘 지키며 산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을 제자로 부르셨을 때 기꺼이 그의 부르심에 응했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대답한 믿음의 고백은 유명한 구절이다. 마태복음 16장16절,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한 베드로의 대답은 베드로 한 사람의 고백이라기보다 제자들 전체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인 것이다. 이 믿음의 고백은 교회의 초석이 되는 신앙고백이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메시야로 인정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기독론적 지식이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였다고는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가까이 늘 따라다니며 함께 했던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사고 속에서 메시아의 신앙은 죄로부터 구원하실 메시아로 보다 아직은 정치적인 메시아, 즉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실 메시아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성경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기 전까지
예수님의 사역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체험하기 전인 상태에서 가지고 있는 제자들의 기독론적 지식은 결코 완전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나타나는 이적들과 놀라운 많은 가르침들을 지켜보면서 예수님이 틀림없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마16:16과 같은 고백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믿음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받기에 충분한 믿음이었다.
2-3. 치유이적과 믿음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많은 치유이적 사건이 나타난다. 치유이적 사건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함께 항상 따라오는 사건이다. 복음서 속에서의 치유이적 사건은 단순한 질병치료가 아니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도래했으며 메시야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각종 질병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모두 치유해 주셨고 치유와 함께 종종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9:22;막6:34,10:52;눅8:48)라는 말씀을 하신다. 이 말씀은 단순히 병으로부터의 치유만을 말씀하신다기보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신뢰하고 나아오는 그 믿음이 구원받을 만한 믿음임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공관복음에서 유일하게 중풍병자 치유사건 때에 다른 곳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말씀을 하신다. 즉 예수님 자신이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마9:6;막2:10;눅5:24)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믿지 않는 바리새인들이 볼 때에 분명히 참람한 신성모독의 행위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신적능력을 소유한 메시야임을 무리들 앞에서 확실히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병의 치유와 함께 죄사함이 임하는 이신칭의의 복음이 선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자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함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는 말씀은 사실상 같은 구원의 선포의 말씀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2-4.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만난 사람들의 믿음
복음서에는 많지는 않지만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만나 대화하는 사건들이 나온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구원을 받기에 이른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믿는다. 구원이 이르렀다고 직접적으로 선포하시는 않지만 사실상 그들에게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엿볼 수 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긴 대화가 끝나고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동네로 가서 선포한다. 누가복음에서는 어느 죄인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다(눅7:45이하).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눅7:48)라는 말씀을 하신다. 세리 삭개오도(눅19:8) 예수님을 자기의 집으로 모시고 와서 대접하는 행위를 통해 예수님은 그 집에 구원이 이르렀음을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23장 40-43절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한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는 한 마디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답하시면서 구원이 그 강도에게 이르렀음을 말씀하신다.
이러한 예들은 예수를 진실로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들에게 죄사함이 임하고 의인이 되었으며 구원이 이르렀음을 선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구원은 그들이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잘 알고 오랫동안 율법을 잘 지켜서도 아니요, 단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는 그 태도가 바로 구원받을 만한 믿음으로 보신 것이다. 실제로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신칭의' 복음이 축복으로 임한 것이다.
결 론
위에서 우리는 바울을 제2의 기독교 창시자로 여기는 자들의 모순과 오류는 무엇이며 이 오류를 밝히기 위한 논증으로 공관복음 속에 배여 있는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을 살펴보았다. 즉, 공관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메시아로 신뢰하고 나아오는 사람들은 바로 그 믿음만으로 즉시 예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받았고, 하나님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고자하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오히려 저주를 받았음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바울의 서신서 에서의 이신칭의 복음은 바로 예수님의 신학사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임을 증명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고찰로 인해 일부 진보적 신학자들이 예수와 바울 사이에 일치점과 연속성이 없다고 하며 바울을 제2의 기독교 창시자로 부르는 오류를 일부나마 밝힐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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