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
중생, 믿음, 회심은 은혜언약의 후속적 유익들의 조건들이다. 이 조건들은 사람이 죄 용서와 하나님의 자녀가 됨, 평화와 기쁨, 성화와 영화를 수용하고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모든 유익들 가운데 칭의가 다시금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데, 왜냐하면 칭의 아래 은혜로운 동시에 공의로운 하나님의 행위가 이해되고, 칭의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모든 죄의 죄책(허물)과 형벌로부터 사면하고 그에게 영생의 권리를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릴 수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자기 자신의 이름과 영예를 맹세로 보증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공의는 가깝고, 하나님의 구원은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며, 시온에 구원을 베풀며 이스라엘에게 영광을 베풀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의가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 안에만 의와 힘이 있으며, 하나님은 여호와, 그들의 의다.
예수는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좋은 다른 의가 필요하고, 이 의는 하나님의 좋은 선물이며, 하나님은 이 유익을 의인들이 아니라,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잃은 바 된 자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에게, 구원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자신의 모든 구원을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하는 자녀들에게 준다는 복음을 선포한다. 이것에 대한 증거로서 예수 자신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로서 죄 용서의 유익을 베푼다. 진실로 예수는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고, 자신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며, 죄사함을 위해 자신의 살을 찢고 피를 쏟고, 자신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한다.
이 용어(‘하나님의 의’)는 구약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의롭게 편파적 대우 없이 심판하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따라서 죄인을 무죄한 자로 무죄한 자를 죄인으로 선언하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보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더 명확하게 개인적으로는 잘못이 있는 가난한 자들, 비참한 자들을 돕고 구원하며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하나님의 속성과 행동 방식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 하나님의 의는 구약 시대 마지막에 전적으로 사라져 상실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온 세상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았으며,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으며, 전에 지은 죄는 하나님의 참으심으로 간과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에 기초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이 믿음은 진실로 하나님의 증거를 수용하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으로 신뢰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다. … 칭의는 생명의 의다.
로마교에 있어서 칭의는 하나님의 행위로서, 하나님은 이 행위를 통해 단지 죄의 죄책을 용서하고 영원한 형벌을 사면할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내적으로 거듭나게 하고 새롭게 한다. … 로마교의 경우, 전체 기독교의 목적은 하나님이 세례 혹은 참회 가운데 잃었던 추가된 선물을 사람에게 되돌려 줄 수 있고, 이를 통해 그 사람이 선행을 하여 하늘의 상급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 심지어 로마교는 그리스도의 의가 칭의 가운데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생각을 반대하지 않지만, 이것이 이 유익의 전체라는 사실은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의가 단지 법정적으로만이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우리에게 주어지고 주입되었다고 주장한다.
성경에서 ‘의롭게 한다’는 것은 “의로운 자로 여기다, 수용된 자로 취급하다, 죄를 전가하지 않고 불의를 용서하다, 행위를 고려하지 않고 의를 주다, 의를 전가하다”를 의미한다. … 이 칭의는 전적으로 행위와 상관없으며, 즉 믿음 이전과 이후의 모든 행위와 상관없다. … 우리는 선행 때문에 그리고 선행을 통해 의롭게 되지 못하나, 우리는 선행을 위해 의롭게 된다.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것은 오로지 은혜 밖에 없다. … “어떤 사람이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의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 사람이 의로운 것이다.” … 성경의 ‘의롭게 하다’라는 단어가 윤리적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그 어떤 설득력 있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이 단어가 간혹 윤리적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의 칭의가 언급될 때는 언제나 법정적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의 죽음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의의 생명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으로 죄를 속죄했고 자신의 부활로 우리에게 의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 외적으로 의롭다는 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행위로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간주하심으로 우리가 의롭다는 것이다.”
칭의의 모든 관심은 구원이란 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라는 사실에 집중되어, … 공로 없이 의롭게 되는 것, 영광스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강조에 초점을 맞춘다. … 칭의는 “불의한 자들이 의로운 자들로 되거나 거듭나는 것”으로 정의되는데, 즉 죄사함을 받거나 죄사함이 따르는 것, 하나님과 화해되는 것, 의로운 자들로 선언되거나 여겨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 칭의는 믿음 가운데 받고 누리는 사죄의 유익과 일치하고,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되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 거하게 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하게 하고, 우리 마음에 새 생명과 새 힘을 부어준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등장했을 때, 개혁파 신학자자들은 개념 분석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두 가지 오류를 피하기 위해 능동적 칭의와 수동적 칭의를 구분했다. 한편으로 사람의 믿음, 경험이나 회심을 통해 비로소 용서의 유익이 발생한다는 율법주의가 거부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반율법주의에 대해 그들은 자신을 보호하고 영원한 칭의 교리를 거의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 능동적 칭의는 믿음 이전의 내적 소명과 믿음으로의 내적 소명 가운데 비로소 발생하지만, … 수동적 칭의는 오로지 믿음을 통해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칭의의 유익을 올바르게 깨닫기 위해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심판대로 들어 올리고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세워야 한다. … 만일 하나님이, 우리가 우리 믿음을 통해, 우리의 미덕과 선행을 통해, 우리의 공력이나 마땅한 공로 절반 혹은 전부를 통해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 자격을 얻을 때까지 기다리고자 한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는 결코 회복될 수 없고 우리는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펠라기우스주의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칭의의 근거를 믿음, 즉 사람의 좋은 성품, 미덕들과 선행에 두고 이것들을 완전한 것으로 여기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완전의 보증을 자기 안에 지니고 있거나 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그들을 완전한 자로 여기기 때문이다. … 로마교, 항변파, 합리주의자들, 신비주의자들과 많은 현대 개신교 신학자들의 견해로 …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갖는다. 그들은 믿음을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연관시킬지라도, 죄인을 사면하는 하나님의 의를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인간에게서 찾는다. … 하지만 이런 견해는 성경의 분명한 선언에 대해 존재할 수 없다. … 하나님의 의는 …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리고 믿음보다 앞서 객관적으로 복음 가운데 계시되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세웠고, 이 그리스도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우리를 위해 죽고, 저주를 받았으며, 죄가 되었고, 또한 우리의 의롭다 함을 위하여 살아났는데,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거나 반드시 의롭게 되어야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살아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다. 그리고 우리의 의는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믿음은 결코 칭의의 근거로 제시된 적이 없다. 의, 칭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이지만, 결코 믿음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 자체가 의이기 때문에 믿음의 본질 혹은 행위로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의 의이기 때문에 믿음은 믿음의 대상으로 우리를 의롭게 한다. … 의롭게 하는 믿음은 바로 그리스도를 대상과 내용으로 삼는 믿음이다. … 믿음은 행위가 아니라, 모든 행위의 포기, 죽은 자를 살리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의를 주는 하나님에 대한 무제한적인 신뢰이므로, ‘믿음이 의로 여겨진다’는 표현은 믿음 자체가 의의 행위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 대신에 또는 나란히 하나님에 의해 수용되었다고 의미할 수 없다.
로마교와 종교개혁 사이의 차이는 우리가 행함 있는 산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는 아니면 행함 없는 죽은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울에게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이 그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우리의 양심 가운데 우리를 의롭게 하는지 아니면 믿음이 그 행위와 상관없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지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성령이 믿음의 열매들인 이 믿음의 행위들을 신자의 믿음의 참됨과 그래서 신자의 구원을 확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한, 또한 믿음은 믿음의 행위들과 대립하지 않는다.
로마교는 이로부터 신자들 자신이 여전히 자신들의 가벼운 죄에 대해 속죄해야만 한다고 추론함으로써 용서의 풍성한 은혜를 정당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반율법주의는 이 용서의 은혜를 존중하고 따라서 신자들이 저지른 죄는 새 사람에게 해당하지 않고, 다만 옛 사람에게만 해당하며, 신자들이 심지어 더 이상 죄 용서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하여 모든 개혁파 신학자들은 용서가 물론 죄의 실재적 죄책을 제거하지만, 잠재적 죄책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즉, 용서가 형벌을 제거하지만, 죄의 형벌의 당위성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죄가 지속되는 한 이 죄의 형벌의 당위성은 지속된다. … 우리가 범죄한 이후에 이 믿음을 다시 소생시키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다시금 선명하고 강하게 증거하기 위해 자책, 고백, 용서의 기도가 필요하다.
개혁파는 선택 교리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숨겨진 계획을 호기심에서 탐구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속성과 열매들에서 성령의 증거를 통해 획득될 수 있는 구원의 확고한 확신을 믿음에 돌렸다. … 결국 믿음은 하나님의 은사이며, 성령의 사역이다. … 로마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칭의란 사람들을 도덕적 목적에 부합하도록 갖추는 것인 반면, 개신교도들에게 있어서 칭의란 하나님께 대한 종교적 관계의 회복이다. … 칭의 안에서 하나님과의 화평, 자녀 됨,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감,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세상으로부터의 독립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이 믿음으로부터 선행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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