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와 성화의 격돌
즉, 구원을 받는 데 믿음으로 된다는 측과 성화가 되어야한다는 측과의 대결인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불필요한 논쟁들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그 양면을 다 뒷바침해주기 때문입니다.
일례를 들면 롬10:9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원문으로는 '믿어지면,)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된 것은
1.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과
2.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마음으로 믿는 것.
둘입니다.
이 두가지가 충족되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이 두가지에 대하여 간단히 성경공부 시킨 뒤에 문답서를 통해 신앙을 고백시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들이 진심으로 고백한 것으로 간주하여 세례나 침례를 줍니다.
교회에서 잘못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 행한 것입니다.
그들이 진심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믿어져서 그렇게 신앙고백했다면 그것을 무시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인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구원 받은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구원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화주의자들은 이러한 믿음의 고백만으로는 구원을 받았다고 볼 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합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10:9-10)
성화주의자들은 이런 구절들을 인용하여 거룩한 행실이 뒤따르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두 주장 다 맞다.
그럼 이들의 주장 중 어느 것이 맞는 것입니까?
둘다 맞는 것입니까? 아니면 둘 중 하나만 맞는 것입니까? 아니면 둘다 틀린 것입니까?
둘다 맞습니다. 왜냐하면 둘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칭의론자들이나 성화론자들이나 모두 성경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것은 인정하고 어느 것은 부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둘다 인정해 주면 될 것을 왜 서로 언쟁하게 됩니까? 자기의 가진 관념이나 지식이 아직 불완전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어떤 교리나 깨달은 바가 아직은 한쪽에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와 상반된 주장을 하면 곧 적으로 알고 상대방에 대하여 전투태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게는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상대방의 주장하는 바가 성경에 있다면, 결코 부인하고 대적해서는 안됩니다.
자기의 주장 못지않게 소중하게 생각해주어야 하고,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둘의 관계에 대하여 깊히 묵상해보고, 큰 틀안에서 적정한 위치를 파악하면서 조화를 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한 입 가지고 두 말 할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이 한 말 중에는 많은 상반되는 구절들이 있지만 그것이 결코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 상호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모순인 것 같이 보이고, 상충되는 것 같이 보일 뿐인 것입니다.
칭의와 성화는 대립이 아닌 선후관계
일례로, 구원이라는 용어도 영의 구원인지, 혼의 구원인지, 몸의 구원인지에 따라 과거형을 쓰거나 현재형을 쓰거나 또는 미래형을 쓰거나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분해서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2:8)<영의 구원:과거>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구현하라).(빌2:12)<혼의 구원:현재>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3)<몸의 구원:미래>
이것을 분간하지 않고 구원을 논할 때, 이미 받았다는 것인지, 받으라는 것인지, 아직도 안 받았다는 것인지...헷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말은 정확히 말하면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음으로서 영이 살아난 것을 의미합니다.
혼이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몸이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해도 여전히 혈기나 음란이나 미움이 올라오고, 병들고, 죽는 것이 그 증거인 것입니다.
다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되고 경배하게 되었으니 영으로만 살아난 것입니다.
그것은 화목제물로 드려진 피를 믿을 때 되어진 것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 즉,"(롬5:10)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롬5:1)
영의 구원은 이미 원죄로 죽어버린 인간의 어떤 행위로도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전혀 우리와 상의없이 독단적으로 화목제물을 마련하시고는 우리의 죄를 도말하셨습니다.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는 죄사함을 베풀어 주셨으니 이것을 칭의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100% 은혜인 것입니다.
이렇게 영은 칭의를 받아 살아났다 할지라도 혼(인간의 성품)은 여전히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있으며 전혀 변화되지 못한 아담의 성품을 발휘하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는 죄의 값을 지불해서 죄를 사해주었을 뿐이지 죄의 성품을 제거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의 성품은 성령께서 오셔서 처리하셔야할 몫인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으로 오셔서 피를 흘려 죄값을 지불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다시 영으로 믿는 자들 속에 오셔서 죄의 성품들을 처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의 사역입니다.
이것을 혼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혼(자아)의 삼요소인 지성(생각). 감정(감각), 의지(결정)를 사단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나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성령께서는 칭의를 받은 사람에게만 오실 수 있는 것이지 칭의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에게는 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칭의를 받지못한 사람은 아직도 죄의 값이 지불되지 못한 사람인데 성령께서 거하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사람은 성령께서 오실 수 있는 근거지가 마련되므로 믿는 자에게는 틀림없이 성령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성화의 사역은 반드시 일어나게되는 것입니다.
칭의의 토대위에서 성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는다>고는 고백하는 데 왜 성품이 변화되지 못하는 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것은 성령이 거하시지 않기 때문인 것이며, 성령이 거하시지 않는 것은 아직 칭의되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믿음이 진짜가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참된 믿음으로 인해 칭의를 받은 사람은 육신의 소욕과 마귀와 세상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거나 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주님께서 값비싼 댓가를 치루심으로써 구속과 칭의를 얻었기 때문에 다시는 그것들로 인해 더럽혀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는 선후관계이지 절대로 대립관계는 아닌 것입니다. 칭의없는 곳에 성화있을 수 없고, 성화가 없으면 칭의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를 성화시키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셔서 속죄하셨고, 칭의하신 것입니다.
이 목적없이 죄 가운데 그냥 사는 것을 허용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겠습니까?
그리고 성령께서는 말씀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칭의받은 신자에게서 경건한 복들이 실제가 되게 해주십니다. 곧, 진정으로 의롭고, 거룩한 성품을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만일 경건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들이 실제가 되지 못하고, 관념적일 뿐이라면,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5-6)
이러한 명령은 성령님과 합력하여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자나 간음하는 자나.....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16:9-10)
하나님의 나라는 성화된 사람들, 즉 혼이 변화된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미 참된 신앙을 고백하여 칭의를 받고 영이 살아난 자인데...그래서 항상 거룩하게 살아야할 텐데...할텐데 하면서 육의 세력과 싸웠는데 죽기 전까지 혹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만족할만하게 성화를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카톨릭에서는 이러한 자들을 위하여 연옥교리를 만들었습니다.
연옥에 가서 충분히 정화되고난 다음에 천국에 올 수 있도록 조처하신다는 것입니다.
개혁교회에서는 오직 믿음만을 강조한 나머지 성화니 공력이니 하는 관념들을 다 무시하여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순간영화설>입니다.
죽기 전 한 순간에 성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에 이루지 못한 성화를 한 순간에 이루어 천국에 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신자의 일생에 성화를 이루려고 굳이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맙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이 살아있는 사람을 성화를 이루지 못하였다고 해서 버린다는 것도 하나님의 속성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어린 아이인 셈인데...자라지 못했다고 해서 버린다면 하나님의 속성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농부는 가라지나 쭉정이는 버릴지언정 덜 익은 곡식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다 익기 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공개되지 않은 성화의 비결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칭의는 받았으나 성화되지 못한 사람들, 즉 영이 구원을 얻었으나 혼이 변화되지 못한 사람들을 처리하실 것인지에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음부와 환난과 천년왕국이 중간에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면 해답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간들은 성화를 위해 유용하게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음부는 이미 죽은 자들이 거하는 곳입니다. 물론 성도도 예외가 아닙니다. (비록 낙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고는 있지만 음부의 한 구역일 것입니다.)
음부는 언젠가는 그 문을 열고 모든 사람들을 내어주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은 생명책에 있는 여부를 보아 구원받을 사람들과 불못에 들어갈 자들이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계20:12-14)
환난은 성도들을 연단하는 시기입니다. 환난이 끝난 후 "땅에 곡식이 다 익었다."는 선언과 함께 추수가 되어지는 것입니다.(계14:15)
천년왕국 역시 그러합니다. 천국 왕국 때에도 성화를 이룬 사람들은 왕노릇을 하게 되지만 혼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성 밖에 거하면서 성화된 사람들의 지배와 통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그들은 성화되어 천국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를 받아 영이 거듭난 사람들이나 성화를 이루어 혼까지 거듭난 사람들이나 다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문제를 걸고 칭의와 성화가 싸우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개혁주의의 구원의 서정이 의미하는 것
마지막으로 개혁파에서 말하는 구원의 서정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구원의 서정이란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을 받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대개 다음 일곱가지를 말합니다. (순서는 학자에 따라 다를 수 있슴)
1.소명(부르심), 2.회개, 3.중생(거듭남), 4.칭의(의롭다함 받음), 5. 양자(아들삼음) , 6, 성화, 7. 영화
여기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모든 과정이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 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하나만 뚝 떼어서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례를 들어, "소명을 받았으면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할 수 없고, "회개했으면 구원을 받았다."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칭의만 받으면 구원을 받았다라고 할 수도 없고, 성화되어야 구원을 받는다라고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일곱가지가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날 우리가 믿음(칭의)이냐 행위(성화)냐 하고 싸우게 된 것은 구원파의 영향도 있다고 볼 수 있겠고, 빌리 그레함을 대표로 하는 신복음주의자들의 속성신자화 운동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일확천금을 얻듯이 그렇게 구원도 한 순간에 얻을 수 있는 것 처럼 선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화니, 성시화니 각종 대중집회를 통하여 많은 결신자들을 얻으려고 광분했던 것입니다.
그럴려니 당연히 <구원>이라는 대 명제를 내 걸어야 했겠죠.
그러나 이제 이것이 먹히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구원은 내 욕심으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말씀을 믿고 따를 뿐인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잘 믿을 것인가가 우리의 고민꺼리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 분이 정해 놓으신 절차에 따라 살다보면 그 분이 자기의 때에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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