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신들의 망언
국인남님의 글입니다.
당당뉴스 행정실장. <크리스챤이여 핸들을 꺾어라>의 저자
근래에 와서 인간의 수명이 길면 80수를 누린다 한다. 80년을 살면서 인간은 어느 누구나 희노애락(喜怒哀樂),생로병사(生老病死)를 반드시 겪으며 산다. 불로초를 찾아 천년을 살려했던 진시황제도, 또한 미의 여왕으로 세상을 주름잡으려 했던 클레오파트라도 결국 생로병사를 거쳐 죽었다.
그래서 인간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희(喜),락(樂)도 결국은 죽음을 향해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항간에 하나님말씀을 코미디로 번역해 많은 기독인들을 웃게 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필자도 잠시 웃고자 사이트에 들어와 그 기사를 보았다.
소문대로 쓴웃음이 나오며 김홍도 목사다운 설교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필자도 발칙한 신들을 한 번 웃기고 싶다는 발상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렇다, 오늘날 한국교회 거반의 목회자들이 이러한 협박설교를 한다.
특히 대형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들이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는 교만에서 이러한 발칙한 발상들을 토설한다.
협박설교 속에 담겨진 교만한 뜻은 바로 이 말이다.
“이것들아, 보이는 신에게 먼저 무조건 순종해라.”이다.
흔히 교회 내에서 목회자가 가장 싫어하는 성도가 있다.
그것은 깨어있는 성도다.
목회자편에서는 이들은 마귀 당이고 사탄이다.
그리고 교회 잘못된 점에 대해서 개선책을 말하고 개인의 소리를 내면
그 사람은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아야 한다.
그들은 ‘안티성도’, ‘부정적인 성도’로 낙인찍힌다.
행여 이러한 성도가 병이 들거나 사고가 나면
그것을 기회 삼아 교인들을 세뇌 시키며 확인 사살하는 발칙한 신들이다.
지난 날 필자가 섬겼던 H교회에서도 흔하게 이러한 일들이 발생했다.
교회 건축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사탄, 마귀로 몰아 불순종의 사람으로 몰아 세웠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보증을 잘 못서서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어김없이 목회자는 (저주의)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교회 일에 반대하고 주의 종에게 불순종했기에 고난을 받는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 목회자와 가장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같은 죄 몫으로 감옥에 갔다.
목사는 이제 반대로(위로의 기회로), 참으로 위로가 되는 설교를 했다.
“요셉은 의로웠으나 형들의 계략과 보디발 아내의 거짓 증언에 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그 고난이 훗날 애굽 총리가 되기 위한 훈련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고난이 미래의 축복이 될 것이다.”
라 했다.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는 <집단사고>에 빠져 깊은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예일대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Irving Janis)는
구성원들이 어떠한 공동체에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없도록
왜곡된 사고방식을 ‘집단사고(Groupthink)’라 했다.
이러한 집단사고는 현실적인 판단을 내릴 때
무조건 만장일치로 응집력을 과시하며 방망이를 휘두르는 졸개집단으로 전락되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무조건 맹종하는 ‘집단사고’에서 파생되는 맹목적인 이기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맹종이 교회라는 조직의 힘과 결탁되어 공동체의 편익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부정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긍정과 순종만이 믿음 좋은 성도로 세워주는 맹목이 ‘집단사고’의 허점을 한국교회가 그대로 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망언을 하는 사람들의 가정과 자손은 굳이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결론이다. 그것은 망언 하는 자가 바로 살아있는 신이요, 아버지요, 가족이니 어찌 불순종과 안티가 있겠는가. 이 집안은 기필코 10년 안에 자식이 죽거나 자손이 죽거나 암이나 재산이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 집안은 알거지가 아닌, 대부자로 영원히 육이 죽지 않고 이 땅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성서에는 분명 하나님은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동시에 주신다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함이요, 하나님의 살아계신 존재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풍요와 형통함에 거하시는 것보다 가없는 곳(빈궁과 아픔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존재는 실존으로 살아있다. 만사형통과 축복만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발상은, 바로 풍요의 신 맘몬을 섬기는 발칙한 신들의 교만에서 나온 발상이다.
얼마나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진 어리석은 망언인가. 복음 없이 시와 문학을 논하며 살았던 사람들도 긍휼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살았다. "릴케는 자신의 시가 굶주려 죽어 가는 소녀에게 주어야 할 한 조각 빵만도 못한 것을 탄식했고, 카뮈는 자신이 내세우는 실존주의가 몽마르트 비탈길에서 얼어 죽어 가는 노숙자를 살릴 담요 한 장만도 못하다는 것에 신음했다."(황홀한 글 감옥) 릴케는 시인이며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학가였다. 시와 문학에 묻혀 살았던 사람들도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아파 할 줄 알았는데, 참으로 부끄러운 발칙한 신의 모습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반드시 겸손한 설교를 먼저 한다. “대접받는 자리에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섬기는 자세를 가질 것,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아갈 것, 복음을 전하는 영혼 구원에 최선을 다할 것, 그리고 물욕·명예욕·육신의 정욕을 이겨야 한다.”라 했다. 구구절절 아멘이다. 그런데 어찌 앞 말과 뒷말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어찌 섬기는 자의 자리에서 성도들을 향해 협박 공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겠다는 목회자가 어찌 강대상에서 말씀을 기만하는 망언을 해서야 되겠는가. 분명 물욕, 명예욕, 육신의 정욕을 이긴 자의 말은 아닌 것 같다.
하나님도 가끔은 에라를 내시는 것일까? 이렇듯 발칙한 신들은 공중파 방송을 타고 온갖 치부가 다 드러나며 그의 나라와 의에 치명타를 날렸다. 막장시대에 복음을 변질시켜 부끄러운 망언들로 세상을 더욱 어둡게 했다. 참으로 그들은 하나님과 친한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하나님은 또 다른 하나님이실까. 그렇지 않으면 워낙 물질이 풍족한 교회 인지라 총 맞은 곳 보수공사쯤은 감쪽같이 잘 처리하는 숨은 달란트들이 있는 것인지, 때로는 궁금하기도 하다.
이들 육신의 사람들은 몇 가지 비슷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가장먼저 세습을 한다. 당연히 신의 아들이기에 말이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다해 죽도록 감투를 사랑한다. 마치 교회를 내 것으로 착각하기에 재정과 행정도 마음대로 움직인다. 그리고 어김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앞세워 구제와 선교를 외친다. 더불어 자신의 이름을 높이며 승자의 논리를 축복과 부귀영화에 접목시켜 신앙을 샤머니즘화 시킨다. 또한 방송과 언론을 통해 자신을 알리고자 텔레페서(telefessor)가 되어 여론몰이에 열중하는 바리세인들이다. 그야말로 독단과 독주가 화려하게 꽃을 피운 보암 직 먹음직한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거룩한 강대상에서 성도들을 협박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지 않기 위해 매 시간 자신을 내려놓는 훈련을 한다. 숫자와 물질에 매이지 않고 오직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긴다. 이들은 건물에 메이지 않고 성도를 조직에 묶어두지 않으며 오직 복음이 주는 자유함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잠시 속도를 멈추고 바벨을 향한 발칙한 신들을 향해 산상수훈 8계명을 제시해보았다.
1 세습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을 것이오.
2 숫자에 집착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늘의 것으로 충만 할 것 이오.
3 건축과 업적에 집착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함을 받을 것이오.
4 물질에 집착하지 않은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오.
5 이생의 자랑과 협박을 삼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지혜를 얻을 것이오.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오.
7 감투를 멀리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면류관을 받을 것이오.
8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요즈음 막장 드라마와 막장삶이 세상을 어둡게하고 있다. 막장 삶을 비관하며 하루 40여명이 목숨을 끊는 현실이다. 언제까지 막장교회 치부를 드러내며 서로가 아픔을 주고받을 것인가. 막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세상에 작은 빛을 비추어야 할 소명자들 아닌가. 우리가 병명을 모를 때는 난감하고 불안해 스스로 오진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그 병의 근원을 알면 완치도 가능하다.
그래서 총은 양을 향해 쏘는 것이 아니라, 이리 떼를 소탕할 때 쓰는 무기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분명 양은 적이 아니기에 양을 향해 쏘는 자는 자칫 살인자가 된다. 총부리를 자신을 향해 겨눌 때 발칙한 신의 모습은 사라질 것이다.
기사위치 /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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