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가 너무 많다, 교회가 너무 많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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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 이론은 생물이 개체밀도에 따라서 개체군이 증식하거나 감소하는 생물학적 자기조절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자연은 자기조절 기능에 의해서 반응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질서 프로그램으로 일종의 생태적 조절기능으로 생물이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일정 공간내에서 어떤 생물의 종이 필요로 하는 먹이, 공간, 활동의 고유 영역이 있습니다. 적절한 공간내에서 번식을 하고 있는데 개체수가 많다면 감소하는 쪽으로 적으면 많아지는 쪽으로 적절한 개체수를 유지하도록 적응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를 경계영역이라고 합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식물들도 집단군락을 이루어 경계영역을 가지면서 개체조절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태학적 자기조절 능력은 자연의 생태가 파괴되지 않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자연의 생태계의 일부이지만 우리 인간은 스스로가 파괴를 시켜 버려 개체밀도 조절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인위적인 산아제한과 가족계획 정책으로, 자본주의 고비용의 문화, 경제, 정치, 종교 시스템으로 가족의 개념이 바뀌었습니다. 결혼이 무비용 저비용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고비용의 인위적인 성공의 개념으로 바뀌어 엄청난 결혼비용에 부담을 느껴 결혼기피를 하고 있습니다. 자녀의 교육비와 양육비 또한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는 결혼적령기에 접어든 남녀 성비 의 불균형과 결혼 기피, 저 출산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도 대두되고 있습니다. 근시안적인 국가정책으로 우리 인간의 편의에 의해 출산을 억제하는 정책을 펴는가 하면 또 다시 출산을 장려하는 정책으로 급선회하는 이중적 잣대의 의해 하나님의 창조질서인 생태적 법칙이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사회생태계도 파괴되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공간으로 변했습니다. 자연의 생태계에서는 개체수가 기본적인 수용력의 범위내에서 증식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어떤 지역내에서 번식할 수 있는 최대의 범위, 성장의 양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한계내에서만 개체가 증식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람이 사는 공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공원이나 야외 놀러 갔을 때 아무도 없을 때는 내가 먼저 제일 좋은 자리를 골라 쉬게 되고 그다음 온 사람은 먼저 온 사람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적절한 공간배치 즉 인구밀도의 균형이 파괴가 되는 순간이 옵니다. 이때 까지는 모두가 프라이버시를 침해 받지 않는 일정한 공간을 두고 쉬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한 된 공간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오게 되어 인구밀도가 촘촘해지면 이때부터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쓰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혹 아무렇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시비를 걸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짜증이 나기도 하고 불안한 마음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엿들을 기회도 생이고 나의 목소리가 남에게 피해가 되기도 합니다. 한 세대 이전의 농어촌 지역의 주거 형태는 일정한 공간을 두어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침해 하지 않는 적절한 인구밀도를 가진 생태적 공간이었다면 지금의 도시지역의 공간은 집약적인 인구밀도의 주거공간과 상업공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시생활의 모든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파생되어 집니다.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인구밀도는 대부분의 강력범죄 발생을 높이고 있다고 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인구밀도는 세계 4위입니다. 인구 100만의 대도시와 인구 10만 이하 소도시 삶의 질을 분석한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대 도시인들은 소 도시인들에 비해 적대감과 이기주의가 강하고 자살률이 높다고 합니다. 또 살인 사건도 소도시의 다섯 배가 넘고, 강력 사고는 400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사람도 동물이기에 생존의 영역다툼이 있습니다. 개체로서 살아가는데 침해를 받으면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식물도 어느 정도의 밀집을 초과하게 되면 생육에 지장을 받게 되어 병충해 발생과 퇴화현상으로 개체 밀도 조절을 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전쟁으로, 가뭄과 홍수로. 전염병으로 , 질병으로 , 사고로 인구밀도를 조절합니다. 인구밀도에 대한 스트레스로 반사회적 범죄가 저절로 발생하게 되는 것이고요. 자 그렇다면 대부분의 중대형교회가 밀집해 있는 지역은 대 도시와 중소도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시장의 원리에 따라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 성도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이라고 하는 고객의 확보가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지역의 특성에 따라 개발의 특성에 따라 가만히 않아 있어도 차별적인 고객? 들이 몰려오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땅 짚고 헤엄치는 식의 목회성공이 가능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대도시란 역기능적이고 반 생태적인 공간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이제 되돌아 봐야 할 시점인 것 같습니다. 같이 희희낙락하고 인구밀도에 따른 역기능적인 문제에 동참은 하지 않았는지 자문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복음장사를 하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 봐야 합니다. 영혼 구원, 지상명령수행,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쩌구 저쩌구 하는 미사여구의 커텐 뒤에서는 온갖 인간의 정치적, 탐욕적 자본주의 가치관에 따라 목회성공의 야망을 불태우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점을 성도들이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체적인 개혁교회의 왕 된, 제사장된 성도의 존재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제 어느 정도 흥청망청 하던 개발과 성장의 시대는 지나 간 것 같습니다. 부동산 시장의 거품이 걷혀지고 제자리를 차지하는 과정에 약간의 진통과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 무한 성장할 것이라는 믿음, 무한정 아파트 수요와 투기가 가능할 것이라는 부동산 불패라는 믿음의 악순환 때문에 집값만 천정부지로 높아진 지금 우리는 경제적 투기의 비만과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모든 면에서 불필요한 에너지를 줄여야 합니다. 한국교회 형편도 이와 같습니다. 불필요한 예산을 줄여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목사가 너무 많습니다. 목사의 밀도가 너무 높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밀도 역시 그렇습니다. 도시지역 밤의 십자가 불빛은 나이트클럽의 불빛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역사회에 있는 교회가 밀도에 맞추어 통합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목사의 밀도가 너무 많기에 밀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러면 신학대학의 문턱을 높여야 합니다. 개나 소나 목사가 되는 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엄격한 검증을 거쳐 수준높은 신학수업으로 양질의 목사를 배출하여 한국교회의 위상을 높여야 합니다. 교회도 통폐합하여야 합니다. 교회가 무슨 장사하듯이 한 건물에 두 세 개 있는 경우와, 한집 건너 교회가 있는 것은 생각해봐야 합니다. IMF 이후 사회경제의 먹이사슬이 무너져 많은 작은 기업들이 부도로 문을 닫은 경우가 많은 것처럼 교회 역시 문을 닫아 상가교회가 눈에 띄도록 줄어들었습니다. 교회도 경영이 안되어 교회매매와 양도광고도 볼 수 있습니다. 목사도 사회직업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목사라고 해서 다 교회 목회를 하라는 법은 없기에 사회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땀 흘려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에도 좋습니다. 한국교회가 생태학적 개체군 밀도의 자기조절 기능에 의해서 목사수와 교회수를 조절 해나가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사회적 요구현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회적 신뢰도 높아져 가리라 생각이 듭니다. 복음의 희소성, 목사의 신뢰도, 교회의 존재가치가 높아져 가야만 복음의 존재가치도 높아져 갈 것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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