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시선(요나서 4장 5∼11절) 2017.12.28
얼마 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을 대상으로 한 공동체지수 조사에서 대한민국은 조사대상 38개국 중 38위, 꼴등이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만날 사람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종합한 겁니다. 한국인 4명 중 1명은 도움 받을 사람 없이 외로움과 고립감 속에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4명 중 1명이 크리스천인 대한민국의 실제 상황입니다.
요나서 4장에는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는 선지자 요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나는 처음에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전하라”는 하나님 명령을 거부하다 큰 물고기 뱃속까지 경험하고 결국 니느웨로 가서 경고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실 그는 니느웨가 구원받길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 동쪽에 초막을 짓고 거기서 니느웨가 멸망하는 모습을 꼭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박 넝쿨을 주셔서 그의 머리를 뜨거운 햇볕으로부터 가리게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하나님은 벌레를 보내 그 박 넝쿨을 다 갉아먹게 하시고 뜨거운 동풍을 불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괴로워서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화를 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네가 이 박 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고 물으시고, 요나는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고 반항합니다. 왜 요나는 겨우 박 넝쿨을 갖고 그토록 불경스럽게 화를 낼까요. 사실 박 넝쿨이 뜨거운 햇볕을 가리는 그늘이 된다는 건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키는 자라고 하면서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시 121:6)라고 고백합니다. 벌레가 박 넝쿨을 갉아먹고 뜨거운 동풍이 불어왔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위협받는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번에 하나님이 니느웨를 봐주시면 그것은 곧 이스라엘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그토록 하나님께 대들며 화를 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엉뚱하게 불결한 이방인들을 구원하려 하느냐는 항의였습니다.
사실 요나의 항변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내 가족만 지키시고 복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지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며 죽어 가는데, 정작 우리는 요나처럼 초막을 짓고 박 넝쿨 아래 안일하게 지내려는 신앙에 머무르지 않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요나에게 반문하십니다. “네가 심거나 재배하지도 않은 박 넝쿨을 아끼는데, 내가 친히 지은 12만명의 니느웨 백성을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요나에게 더 큰 관점에서 니느웨를 보도록 요청하십니다. 자기 자신과 가족, 그리고 민족에 집착하는 요나에게 창조주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같은 요청에 예수 그리스도는 혈통과 외모에 관계없이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자신을 드림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신앙의 목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타인을 향한 우리의 시선과 관심이 그분의 모습을 따르는 것입니다.
요나서의 마지막 절(4:11)은 질문으로 끝납니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의 대답은 없습니다. 대신 우리가 하나님의 질문에 답할 차례입니다. 당신이 그동안 냉랭하게 외면해온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시는 ‘니느웨’는 누구입니까.
김선일 교수(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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