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를 위한 비켜서기(누가복음 19장 1∼10절) 2017.12.30
삭개오는 로마 지배의 시기에 이스라엘 동포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이는 세리들 중 상급자였습니다. 한 동네에 살면서 사람들은 그 권력 앞에서는 고개 숙였을지 몰라도 속마음은 달갑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삭개오는 제 나이에 비해 작아서 외모로도 호감형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삭개오가 변화돼 더 이상 자신의 소유에 연연하지 않고 절반을 구제에 사용하겠다고 합니다. 남에게 부정하게 징수한 잘못을 뉘우치고 4배나 배상하겠다고 했습니다.
배우는 대상이 변화가 없다면 소망 없는 헛일입니다. 신앙생활도 변화가 없다면 하나님나라 문턱도 못 가는 가장 불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삭개오 이야기는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가 가능하다는 소망을 줍니다. 이 말씀은 누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까. 이게 남 일이라고 생각하면 은혜는 반감됩니다. 목회자들은 교회의 성도들이 삭개오처럼 변화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성도들도 제발 우리 목사님이 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딱 그 모습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또 다른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말씀을 듣고 예수님 앞에 모이지만 변화는 자기가 아닌 남의 몫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로 가려고 했지만 예수님을 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키가 작고 사람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키는 삭개오 개인의 문제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타인(사회, 공동체)과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삭개오보다 커서 시야를 가렸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삭개오의 호기심을 일으킨 예수님 추종자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 사람들의 열심 때문에 예수님을 못 본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때 누군가 삭개오를 자기 앞으로 세웠다면, 삭개오가 작으니 길을 터서 앞자리로 안내했다면 굳이 나무에 오르는 위험천만한 일은 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시대가 악해서 기독교, 교회, 목회자, 기독교인이 세상의 뭇매를 맞는다고 생각합니까. 교회 안의 분란과 서로 상처주기는 신앙의 나태함과 게으름 때문일까요. 성도와 목회자가 얼마나 자기 자리에서 열심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서도 삭개오를 보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말씀(요 3:16)은 암송하면서도, 세상은 뒷전이고 교회당 안의 신앙에만 도취돼 살지 않습니까. 지도자들은 자신을 따르라고 하지만 자기 너머의 예수님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은 삭개오에게 들려준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 서성이며 열심인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행실과 태도로 삭개오의 시야를 가로막고 수군거립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예수님 시선 속에 있는 삭개오를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제 가식과 위선을 벗고 우리 뒤에 있는 삭개오를 위해 비켜서야 합니다. 예수님이 억울하지 않도록 상처받은 삭개오 앞에서 비켜나는 사람들이 됩시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분의 모습을 가리는 자리에서 비켜서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박훈서 목사(군산 행복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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