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섭리(로마서 8장 28절) 2018.7.14
‘고난’이라는 단어만큼 인생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인생도, 우리의 신앙도 고난의 렌즈를 통하지 않고서는 피상적으로 이해될 뿐입니다. 고난이 무엇인지, 그 기원과 의미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난의 현존 앞에서 신앙인들의 반응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암묵적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3장에서 바울 사도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그 타락한 마음에 음행과 불의, 탐욕과 시기, 살인과 분쟁, 비방이 가득함을 지적합니다. 그 결과 모든 피조물은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역설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분명히 구원받고 믿음으로 의인이 됐으며 죄와 율법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됐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락한 이 세상에서 여전히 ‘환난 중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환난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바울 자신은 그 누구보다 많은 고통을 겪은 사도였습니다. 돌에 맞아 성 밖에 버려졌고, 수차례 벗김을 당했고, 심하게 맞고, 채찍에 살이 찢겨 옥중에 던져졌습니다.(행 16:22) 그뿐 아니라 고통스러운 불치병으로 인해 ‘육체의 가시’(고후 12:7)를 지니고 육체의 약함으로 그 어려운 복음사역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는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고후 11:24∼2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하니라”(고후 12:10)고 선포합니다. 이는 그가 인내를 초월한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지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고백합니다.
결론적으로 바울 사도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고난을 비관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통해 고통 가운데 있는 교우들의 아픔을 공감하며 공유했습니다. 바울의 구속신학에 있어 고난은 꼭 피하거나 제거돼야 하는 요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큰 고통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더욱 궁극적인 성화와 소망을 향해 가는 통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픔을 통해 이웃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고 자신의 약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강함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고후 12:9) 바울 사도는 그의 제3차 선교여행에서 그렇게도 간절히 원했던 로마행을 포기하고 과감하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교회의 교우들이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롬 15:23∼33) 바울은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성도들의 헌금을 제자 디모데를 통해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귀국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 이웃의 고난을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울이 예루살렘의 고통소리를 외면하고 발을 돌리지 않았다면 겐그레아에서 기록한 본 로마서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서는 바울 사도의 고난을 통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난의 현존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본질적으로는 이 땅에서 고난을 제거하는 데 있지 아니함을 분명히 명시했습니다. 바울의 구속신학에서 그것은 모든 것을 합력해 궁극적인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를 신뢰하고 그 고난을 오히려 이웃의 사랑으로 성화시키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고난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 가운데 신음과 원망, 좌절을 넘어 고통받고 있는 모든 자들에게 소망과 구속으로 성화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이한영 아세아연합신학대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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