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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타고 한국 온 몽골 여성

구원의 계획 2011. 7. 29. 20:34

휠체어 타고 한국 온 몽골 여성
       두 발로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다
입력 : 2011년 07월 18일 (월) 18:51:50 [조회수 : 3640] 김민영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6월 17일 전남 여수 시청, 몽골 바양아트라솜에서 온 26살 여성, 간베르트 철몽 씨의 완쾌를 축하하는 자리가 있었다. 김충석 여수 시장이 자리를 마련했고, 병원 관계자들, 여수 은현교회(최규식 목사) 교인들이 참석했다. 그들은 철몽 씨를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이야기하는 내내 그의 손을 잡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통역사가 있어야만 의사소통이 가능한 몽골 처녀에게 그들은 왜 애정을 쏟는 것일까.

 

   
 
 

▲ 여수시청에서 병원 관계자들, 김송식 집사(왼쪽에서 두 번째), 김충석 시장(왼쪽에서 네 번째) 등이 모여 철몽 씨 완쾌 기념 행사를 했다. ⓒ뉴스앤조이 최유진

 
 

2004년, 철몽 씨는 사고로 인해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당시 그는 18살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하교하던 중 날아오는 축구공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그 이후 휠체어가 그의 다리가 되었다. '다시 걸을 수 있다, 치료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그의 고향에는 병원이 없었다. 바양아트라솜은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10시간 정도 이동해야 도착할 수 있는 마을이다. 한국은커녕 울란바토르로 가는 것도 쉽지 않은 마을이다.

 

장학금 요청으로 시작된 기적

당시 성터교회에서 목회했던 방인성 목사(함께여는교회)는 여수 은현교회의 김정명 원로목사의 몽골 사역 이야기를 듣고, 바양아트라솜에서 학생 13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철몽 씨는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방 목사에게 "공부하고 싶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장학금을 줄 수 있는가"라며 장학금을 요청했다. 3년 동안 철몽 씨는 장학금을 받았다.

김정명 목사를 통해 바양아트라솜을 방문하게 된 김희찬 목사는 철몽 씨의 사연을 듣고 작년 겨울 한국에 데리고 왔다. 관광 목적으로 그를 초대한 것이지만 '한국 의료진이 고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료받으면 다시 걸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었지만 시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여수 시장의 적극적인 도움과 후원에 의해 그리하여 철몽 씨는 출국 날짜를 미루고 이대목동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방인성 목사가 이대목동병원에 부탁하여 검사 비용을 줄여 정밀 검사를 받았다. 외국인이 치료와 검사를 받으면 내국인보다 5, 6배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검사를 받았지만 결과는 비관적이었다. 신경외과 의사는 "한번 죽은 신경은 되살릴 수가 없다. 이 상태에서 더 악화되는 것을 막는 것이 최선이다"고 말했다. 철몽 씨는 그 자리에서 울었다. 철몽 씨는 절망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가 희망을 잃을까 걱정했다.

 

   
 
 

▲ 여수에서 재활 치료하기 전, 함께여는교회에 방문한 철몽 씨. 그가 타고 온 휠체어는 한국의 것보다 훨씬 무겁고 불편하다. (사진 제공 함께여는교회)

 
 
여수로 내려온 철몽 씨는 여수 은현교회 교인인 김충석 여수 시장의 권유로 작년 말 여수사랑재활요양병원에 입원했다. 주 3회 재활 치료와 매일 2회 물리 치료를 받았다. 의학적인 치료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중점을 둔 것은 철몽 씨에게 재활 의지를 주는 것이었다. 몽골 선교 사역을 하는 김송식 집사(여수 은현교회)는 매일 병원에 출근하듯이 다녔다. 그는 철몽 씨의 손을 붙잡고 기도했고, "하나님이 함께하면 너도 할 수 있다"고 말하며 자신감을 줬다. 두 사람은 아침마다 기도하며 눈물도 많이 흘렸다. 김송식 집사는 "오빠처럼, 아빠처럼 힘도 돋우어 주고, 중간에 포기하려고 하면 호되게 나무랄 때도 있었다"고 했다.

   
 
 

▲ 여수사랑재활요양병원의 환자들과 관계자들 사이에서 유명인이 된 철몽 씨. 그가 물리 치료실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반갑게 맞이했다. ⓒ뉴스앤조이 최유진

 
 

그러나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3개월이 되자 슬슬 불안해졌다. 몸 상태에 변화가 없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닌가'는 생각에 포기하고 싶었다. 은현교회 교인들 역시 기약 없는 치료에 의문을 품었다. 철몽 씨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다며 매일 울었다.

의심을 믿음으로 바꾼 사람들

2011년 5월 3일, 철몽 씨의 몸에도 감각의 봄이 찾아왔다. 그날도 철몽 씨는 재활 치료를 받았다. 항상 그랬듯이 물리치료사는 철몽 씨의 발을 눌렀다. 그때 철몽 씨는 잊고 있었던 감각이 느껴졌고, "아프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는 "며칠 전부터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감각이 느껴졌지만 '설마'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발가락부터 점점 움직일 수 있었고, 치료 중에는 발바닥에 열이 났다.

마비되었던 감각이 돌아오자 많은 것이 변했다. 김송식 집사가 일부러 무릎을 때렸을 때도 철몽 씨는 때린 줄도 몰랐단다. 지금은 김 집사가 장난치며 철몽 씨에게 꿀밤을 먹이고 무릎을 때리면 철몽 씨는 한국어로 "아파"라고 말한다. 기분 좋은 아픔이다. '아프다'는 감각이 돌아오자 통증이 느껴져 재활 치료는 더 힘들어졌다. 하지만 심적인 고통은 많이 사라졌고,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자라났다.

5월 31일에는 부자연스럽지만 기구에 의존하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은현교회 주일예배에서는 휠체어에서 일어나 단상까지 걸어 보았다. 그전까지 철몽 씨가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고 관심을 갖지 않았던 교인들이 놀랐다. 그 모습을 보고 간질병을 앓던 청년은 철몽 씨처럼 완쾌할 수 있을까 하여 매일 새벽 기도에 나온다. 병원에서도 철몽 씨를 보며 환자들이 힘을 얻었다. 심지어 철몽 씨가 몽골에서 타고 온 휠체어에 앉아 보기도 했다. 자신에게도 그와 같은 기적이 일어날까 해서다.

현재 철몽 씨는 무척 잘 걷는다. 7월 초에는 서울에 놀러 올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해졌다. 표정도 많이 밝아졌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만 많이 건강해졌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상황이 낯설고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7년이 넘게 휠체어 생활을 했으니 당연하다. 병원 환자들과 직원들이 철몽 씨를 보며 인사하자, "병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알아봐 주니깐 제가 인기인이 된 느낌이에요"라며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오는 8월 11일, 철몽 씨는 은현교회 교인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이 먼 나라 한국에 와서 두려웠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난 덕에 행복했고 새로 태어난 느낌"이라고 했다. 철몽 씨는 "사람들에게 받은 사랑을 꼭 보답하려 한다"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한다. 몽골국제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던 그는 "체계적으로 공부하여, 사람들에게 받은 사랑과 하나님에게 받은 사랑을 그대로 타인에게 전해 주고 싶다"고 했다.

   
 
 

▲ 철몽 씨는 몽골에서 타고 온 휠체어를 병원에 기부했다. 환자들에게 철몽 씨의 휠체어는 '기적'의 상징처럼 되었다. ⓒ뉴스앤조이 최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