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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가지 罪 - ⑥ - 게으름

구원의 계획 2011. 8. 2. 20:49

 

일곱 가지 罪 - ⑥ - 게으름(삼상1:1-14  )

                                                                           - 이동원 목사

      

 
  미국의 역사물을 아주 흥미롭게 저술하는 작가로서 라이프리 Ripley 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작가가 쓴책 가운데 믿거나 말거나 Believe it or not 믿거나 말거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속에 보니까 한 미 국인에 대하여 이렇게 아주 흥미롭게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최초의 미국인 철학자였다. 그는 최초의 미국 대사였다. 그는 하모니카를 발명했다. 그는 또한 가로등을 발명했다. 그는 최초의 정치 만화가였다. 그는 당대의 최고의 수영선수였다. 그는 이동순회 도서관을 처음으로 제도화했다. 그는 걸프 해류를 발견했다. 그는 피뢰침을 발명했다. 그는 섬머 타임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이었다. 그는 펜실바니아주 지사를 4 번이나 역임했다. 그는 우편을 통한 신문배달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그는 미국 동북부 지역 태풍 경로를 처음으로 그려냈다. 그는 거리에 청소과를 처음으로 창설했다. 그리고 마지막이 재밌어요. 그는 진실로 부지런했다. 그의 이름은 벤자민 프랭크린이다. 정말 부지런한 사람이죠. 부지런하지 않았다면 그가 만약 게을렀다면 이런 어마어마한 업적들이 그리고 생산적인 일들이 가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이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 정도가 아니라 죄악입니다. 그 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초대교회 그리고 중세기를 거치는 동안에 일곱 가지 대표적인 큰 죄악을 말할 때 게으름을 포함시켰습니다. 본래 이 게으름이라는 원어는 영어의 laziness가 아니예요. 그게 아니고 히랍어에서 온 아케이디아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Acedia. 이것은 아 키도스라는 두개의 히랍어 단어를 결합 시킨 단어입니다. 아라는 말은 부정사인데 아니다 no not 아니다 키도스라는 말은 영어의 caring 돌본다.


 그래서 합하면 돌보지 않음. 돌보지 않는다. 이것이 게으름의 본래의 뜻입니다. 돌보지 않음. 그래서 그것은 거의 무책임의 의미와 동일하게 쓰여 질 수가 있는 말입니다. 타워스 어카이너스 라는 신학자는 게으름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고갈 되었거나 그것을 거의 상실한 상태 그것이 바로 게으름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게으름의 죄악은 오늘 현대인들에게 여러 가지 문화적 특성으로 현대인상을. 부정적인 현대인 상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낙담한 사람, 절망 속에 있는 사람, 권태로운 사람, 우울한 사람, 고독한 사람, 이런 사람의 밑바닥에는 바로 게으름이라는 죄악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흥분하지도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감격 하지도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에게는 의욕이 없습니다. 오늘 이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게으른 사람의 한 전형적인 실례를 본문의 말씀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엘리 라고 합니다. 제사장 엘리. 이 사람은 특별히 그의 자녀교육에 있어서 거의 포기한 상태로 자녀들을 보고만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죠. 나중에 그의 직업인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는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성경에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변명할 수 없는 게으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람을 통해서 이 게으름의 정체를 한번 규명해 보고자 합니다. 게으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게으름이란 무엇인가. 첫째로 게으름은 죄악이다. 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게으름은 죄악이다. 라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어요. 자 오늘 본문이 시작 되는 10절을 다시 한번 읽어볼까요? 10절 말씀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그 이하의 내용은 엘리라는 사람과 그의 자녀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하나님이 그것을 엘리에게 직접 경고하거나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말씀을 누구에게 하고 있습니까. 사무엘에게. 아직도 사무엘은 어린 소년인데 일종의 제사장 선지자 인턴 쉽 과정을 거치고 있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직접 엘리 제사장에게 야 네 집에 문제가 있다. 네 집에 경한 걸음 더 나아가서 게으름은 습관이다. 라는 사실을 기억 하십시오.


 게으름은 죄악이고 둘째로 게으름은 습관입니다. 아주 안 좋은 습관이죠. 불행한 습관. 우리를 파멸 시킬 수 밖에 없는 습관입니다. 그런데 엘리의 게으름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시간을 두고 형성 되어 나온 습관 이었습니다. 그것은 점점 더 악화되어 온 습관이었다.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 우리가 엘리의 삶의 모습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우선 사무엘상에서 처음 볼 수 있는 그의 모습 사무엘상 1장. 사무엘상 1장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어요.


 사무엘상 1장 9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들이 실로 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여기 엘리가 뭐하고 있어요? 앉아 있어요. 앉아 있다는 거 가지고 우리가 너무 흥분하거나 이 사람을 정죄 할 필요는 없죠. 여러분도 지금 앉아 있는데. 피곤하면 앉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계속 보면 문제가 좀 있습니다. 자 그 다 음절 이하에 보시면 한나 이야기가 나오죠. 한나가 마음의 괴로움을 가지고 자 성전에 와서 통곡하고 울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한나 보고 엘리가 뭐라고 말하는지 아세요?


 14절 보세요. 1장 14절 시작.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아니 통곡하고 기도하고 있는 여자 보고 뭐라고 그래요. 너 술 취했구나 그래요. 누가 취한 것 같애요? 나는 엘리 제사장이 취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지금 엘리 제사장이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냥 앉아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넋을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단 말이예요. 분별력이 없어요. 판단력을 이미 상실 했어요. 이것은 습관화된 게으름이 이 사람의 삶을 변질 시키고 있는 한 모습 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모습들을 통해서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4장 한번 읽어 보십시오. 이제는 사무엘상 4장 13절의 말씀입니다. 사무엘상 4장 13절의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다 같이 시작.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에 들어오며 고하매 온 성이 부르짖는지라 여기서도 이 사람이 뭐하고 있어요? 여전히 앉아있어요 이분은. 계속 앉아 있어요.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있어요. 그런데 이때가 어떤 상황입니까? 그가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고 있었다.


우리가 4장의 첫머리 부분에 보면 법궤를 빼앗깁니다. 자 법궤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법궤를 가지고 있다. 행진을 할 때 법궤를 모시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메시지였어요. 법궤 관리는 누구 책임입니까? 제사장 책임이죠. 그런데 법궤를 빼앗겼어요. 그러니까 이것 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은 알아서 떨고 있었어요. 떨기만 하면 뭐해요. 일어나서 뭘 해야지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앉아 있어요. 아니 무릎 꿇고 엎드려 통곡하고 회개하는 기도라도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계속 그냥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엘리는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제 그의 마지막 최후의 모습을 한번 보세요. 18절입니다. 18절. 4장 18 절에 자 시작.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 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사십년 이었더라 그의 마지막 그 불행한 최후의 비극을 어떻게 조명합니까? 그때도 의자에 앉아 있었어요. 네 그랬다가 자빠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이것이 이 사람의 최후의 모습입니다. 근데 성 경이 재미있는 것은 그가 비둔했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간에 제가 그 비둔함에 대해서 좀 탐식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만 근데 노상 앉아 있으니까 비둔해 질 수 밖에 없잖아요. 앉아만 있어보세요 비둔해 지나 안지나. 자, 그는 끝까지 그런 모습으로 살다가 죽어 갑니다. 그것은 거의 습관화된 그의 게으름 을 우리에게 조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게으름이 이 사람을 파멸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잠언서 에 보면 게으름에 대하여 세 번째로 게으름은 소명의 결핍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자, 엘리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소명의 결핍, 소명감이 잃어버려져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엘리가 이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는 모습을 이 사무엘상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그는 거의 자포자기의 상태, 이미 말씀 드렸지만. 제사장에게 가장 중요한 직분, 책임 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법궤 관리란 말이죠. 법궤. 하나님의 임재 의 상징이었던 언약궤를 잘 관리하는 것. 그런데 어떻게 관리합니까? 우리가 4장에 보시면 그것을 자기 자녀들에게 다 위임해 버렸어요. 4장4절 보겠습니다. 4장4절 다 같이 시작.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 자식에게 맡겼다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이 자식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엘리의 자식들이 문제란 말이죠. 자, 11절에 보면 사무엘상4장11절에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 하였더라 그런데 처음부터 문제를 삼아야 할 것은 아니 엘리가 자기 아들을 몰라요? 아들들이 어떤 아들인데. 2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자, 사무엘상 2장입니다. 2장 우리가 이제 12절부터 보겠습니다. 우선 2 장12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엘 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 하더라 네 그 아들들은 불량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13절 이하는 그들의 행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아버지가 제사 드리는 곳 에서 들락날락 하면서 그 제물을 짓밟고 좋은 고기는 빼 먹고 뭐 이런 일들을 하고 있었어요. 17절에 보면 2장17절에 그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서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아들의 죄악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22절 보세 요. 2장 22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네, 이 성전 회막을 드나드는 여인들과 성적인 불륜의 관계를 맺으면서 그 장소 전체를 더럽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 부모가 최선을 다해도 자식들이 잘못되는 경우는 더러 더러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걸 알아야죠. 거기까지는 우리가 그냥 넘어간다고 하십시다. 아니 그런 아들들에게 법궤를 맡겨요? 하나님의 궤를 맡길 수가 있습니까? 이거 얼마나 무책임한 일이예요. 자, 이것은 나라를 망치는 일,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교회를 망치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책임한 아들들에게 맡겼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엘리 라는 사람의 무책임 그의 게으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요. 한 가지에 게으른 사람은 모든 것에 다 게을러요. 결국 이 게으름이 전체를 망쳐버리고 마는 것 입니다. 제가 한 가지에 게으른 사람은 모든 것에 게으르다고 하니까 제가 어디서 이 게으름에 대한 토의를 좀 한 일이 있는데 반론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정에서는 무척 불성실한데 직장에 나가면 우리 남편은 열심을 다합니다. 이런 분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아요. 그럴 수는 있어요. 외면적으로 보면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가정에서의 어떤 스트레스 혹은 가정에서의 자기의 죄책감 그 죄책감을 카바하기 위해서 다른 것에 열심을 하면서 자기를 숨기고 있는 포장한 위선에 불과해요. 그것은 도핍니다. 그것은 가정에서 못다 한 것을 직장에서 다른 일로 도피하고 있는 모습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국 한 가지에 게으른 사람은 인생 전체에 저는 게으를 수 밖 에 없다고 생각을 해요. 제가 뭐 처음 어떤 분을 만났을 때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제가 경계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명함을 주로 주고받을 때 보면 명함에 뭐가 많이 기록되어있는 사람, 저는 이런 사람 안 믿어요. 뭐 이렇게 직분이 많은 지 한 두 가지가 아니라 다섯 가지, 여섯 가지 아니 한 열개 써 놓은 사람 봤어요. 뒤 장 에다가 쫙 자기 이력서를 다 써 놨어요. 저는 즉각적으로 이런 질문이 생겨요. 아 이 사람은 캐리어가 화려하구나. 이 사람은 자기의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거예요. 어떻게 우리가 게으름의 죄악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게으름 에서 해방된,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까? 첫째로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중요한 것은 소명의 회복입니다. 소명의 결핍이, 소명의 상실이 게으름 을 초래해 왔다면 그러면 소명이 회복되는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아예 나는 소명 없이 살았다면 소명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매튜 폭스라는 신학자가 있는데 제가 이 신학자의 에세이의 글을 읽어 보니까 이런 말이 있어요. 게으름을 치유하는 처방은 부지런함이 아니다 잘 들으세요. 게으름을 치료 하는 처방은 단순히 부지런해지자 라는 결심만으로 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게으름에 가장 적절한 유일한 처방은 당신 안에 있는 불꽃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분의 표현이 그런 말을 썼어요. 당신 안에 있는 불꽃을 발견하는 것이다. Finding the fire with in. 우리 안에 있는 불꽃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소명을 불꽃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내 속에서 일어나는 불꽃, 소명이란 무엇입니까? 소명이란 하고 싶은 일 이예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또 마땅히 해야 할 일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 때문에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 그리고 할 수가 있는 일 그것이 바로 소명이요. 사람이 소명을 발견하면 신바람이 납니다. 일할 수 밖에 없어요. 소명 없는 것이 문제죠.


 제가 아들이 둘인데 큰 아들이 저희 식구들 가운데서는 저희 큰 아들 황이가 제일 행동이 느립니다. 하여간 어디 밖에 나갈 때 보면 제일 늦게까지 꾸물거리는 것이, 끝에서 두 번째가 저희 집사람이고 맨 끝이 큰 아들입니다. 들어 왔다 나갔다 화장실 한 번 더 갔다 뭐 그렇게 느린지 몰라요. 아침에도 제일 늦잠을 자고. 저는 절대로 제 큰 아들의 모습이 저의 혈통과는 무관하다 이런 확신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 제가 저의 둘째 아들한테 전화를 받았는데 같이 있거든요 같이 있는데 그래요 아빠 형이 달라졌어요. 그래서 뭐가 달라졌다는 말이야 형이 보통 부지런해 진게 아니야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니? 최근에 컴퓨터 특별교육을 받는데 너무너무 좋다는 겁니다. 거기서 재미를 얻었어요. 어떤 보람을 얻은 거예요. 행여 우리 둘째가 하는 소리가 형이 새벽부터 일어나서 밤까지 컴퓨터에 아주 취해 버렸다고 그래요. 자기가 하고 싶은일 어떤 해야 할 일을 발견하는 그 순간부터 라이프 패턴이 삶의 패턴이 바뀌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소명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명 그러면 목사에게나 이런 사람에 게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의 위대한 기여 가운데 하나는 만인제사장의 발견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제 사장이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부르신다는 거예요. 목사만 부르신 것 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도 소명이 있어요, 종류가 다를 뿐이지 나름대로 각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이 있다. 엎드려 보세요. 기도해 보세요. 가만히 들어 보세요. 사무엘 을 부르시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나 사무엘아 사무엘아 내가 너에게 시킬 일이 있다 그게 소명이 예요. 내 이름을 부르시면서 내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그리고 너를 통해서 해야 할 일이 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시고자 한 일, 그 일이 작아도 다른 사람과 달라도 나에게는 소중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그 소명을 발견한다면 그 순간부터 달라질 줄 믿습니다. 소명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사랑을 결단하는 것이요. 사랑을 결심하는 것입니다. 단테는 유명한 단테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게으름은 사랑을 포기한 죄악이다 저는 동의해요. 게으름은 사랑을 포기한 죄악이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엘리가 정말 자식을 사랑했더라면 어떻게 그대로 놓아 둘 수가 있습니까? 자식을 붙들고 울어야지요. 호소를 해야지요. 설득을 해야지요. 이 길로 나가면 되느냐 네가 이런 행동을 하면 되느냐 사랑하는 아들아 돌이켜야 하지 않겠느냐. 그대로 놔뒀단 말 이예요. 왜 그래요?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을 포기한 것입니다.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 했던 베드로. 그래서 이제는 모든 것을 등지고 떠나가고 싶었던 시몬 베드로 그러나 디베리야의 바닷가에 시몬 베드로를 찾아오신 부활하신 우리 주님, 그를 향해서 어떤 질문 을 던지십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 아 네가 이 모든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니? 바꿔서 말할까요? 베드로 너 아직도 나를 사랑하니? 너 아직도 나를 사랑하니? 주님 아시잖아요.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이 고백을 받으시면서 어떻게 말씀 하십니까? 그래 그러면 내 어린 양을 먹여다오. 내가 사랑하는 어린 양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너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해다오 사랑하면 헌신하게 됩니다. 사랑하면 사랑의 눈을 뜨면 이 세상은 할 일이 많아요. 내가 도울 사람이 많고 섬길 사람이 많고 해야 할 일이 많은 법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을 결심하는 일입니다. 자, 오늘 우리는 조국의 광복을 기념하는 주일을 지나고 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릴 때 나라를 잃어버릴 때 왜 잃어 버렸어요? 누군가가 이 나라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게을렀기 때문에. 그러나 한 순간 우리나라가 다시 독립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인 흐름만은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군가 우리의 선배들이 다시 나라에 대한 애정을 갖고 사랑을 갖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땀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가져온 결과가 아닙니까? 민족을 사랑한다면 할 일이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면 할 일이 있습니다. 내 인생을 사랑한다면 할 일이 있습니다. 내 자식들을 사랑한다면 할 일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할 일이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 민족사의 과제는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우리의 과제는 단순히 해방이 아니죠.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평화로운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 나라를 만들어 가느냐. 그리고 크리스찬의 전망에서 중요한 것은 다시 한 번 우리 한국이 우리가 받은 축복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는 선교 한국으로 발돋움할 수가 있느냐 여러분 교회를 사랑하는 안목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안목으로 그리고 내가 태어난 이 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십시오. 얼마나 할일 많은 세상인가를. 사랑을 결심하면 우리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할 줄로 믿습니다. 소명을 발견하십시오. 사랑을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 일을 결심하십시오. 일하기로. 일터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우리 예수님이 일 중독자는 아닙니다. 우리가 일하라고 그러면 또 일 중독자가 되기가 쉬워요. 그건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언제나 여유가 있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 들에 핀 백합화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그 분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을 관찰해 보면 그에게는 낭비된 시 간이 없어요. 시간 낭비가 없어요. 그는 시간을 잘 사용하신 분입니다. 때로는 식사할 시간 없이 그는 하루 의 일과를 잘 나누어 사용하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어요. 특별히 요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을 연구해 보면 그는 때 타임에 민감하십니다. 요한복음2장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부터 아직은 제때가 되지 않았는데 그 때란 말이 자주 나옵니다. 그는 때를 계산하며 때를 느끼면서 자기 인생의 남은 때를 계산하면서 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자기의 일의 마무리의 마지막 순간을 앞에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나에게 하라고 주신 그 일을 제가 이루어 아버지

 

기도하십시다. 최근의 우리의 삶이 너무나 무기력한 삶이라고 느끼지는 사람 계십니까? 매사에 의욕이 없고 따분하고 인생이 무겁고 힘들게만 하게 느껴지시는 분들 그러나 주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대로 주님 살아 계시다면 놔두지 않을 거예요. 내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다가와 손을 내미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겠다. 일어나 너 걸어라 할 일이 있다. 세상은 그렇게 사는 것 아니야. 우리의 무기력, 우리의 좌절을 떨치고 일어나서 하나님의 꿈을 향해서 살아가도록 도우시는 전능하신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다 일어나서 찬양하시겠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찬양하시겠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인생이 아직도 힘들고 무겁기만 하신 분들 다가와 손 내미시고 나를 붙들어 일으켜 주시는 주님. 그 분이 함께 하실 때 그 분의 비전이 임할 때, 그 분의 능력이 임 할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그러나 여전히 인생이 힘들고 버겁게만 느껴지는 사랑 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주님이 힘을 주시옵소서. 성령이여 임하여 주시옵소서. 내 안에 있는 절망과 좌절 을 쫓아내 주시옵소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권태는 물러갈지어다. 모든 우울도 고독도 떨쳐 주시옵소서. 새 힘을 주시옵소서. 성령 충만하게 도와주시옵소서. 노래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해 주시옵소서. 일어나 다시 나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이 오늘도 주신 말씀 붙들고 삶의 장으로 나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의 평화가 함께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