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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가지 罪 - ④ 탐심

구원의 계획 2011. 8. 2. 20:53

 

일곱 가지 罪 - ④ 탐심(누가복음 12:13-21)
                                                                          - 이동원 목사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미국의 에브라암 링컨 대통령은 아주 휴머가 뛰어난 그런 지도자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자녀들이 어렸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한 번은 그의 집에서 두 자녀가 싸움을 하다가 아마 그 싸우는 소리가 보통 이상으로 요란해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웃 사람이 달려와서 도대체 무슨일이 일어났느냐고 이집에. 이때 링컨은 그 특유의 미소를 지으면서 나와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뭐, 염려하지 마십시오.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말이 좀 이상하잖아요.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도대체 무슨 문제입니까? 그러니까 제가 제 아이에게 호도과자 셋을 주었더니 이 두 놈이 한 사람이 두 개씩 갖겠다고 벌어진 싸움입니다.

 이 탐심이라는 것은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죄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성경 본문에도 이 유사한 문제가 취급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르치는 교사로서 인기가 대단했던 것을 오늘 본문에서 볼 수가 있는데요. 오늘 본문이 포함된 누가복음 12장 1절을 보시면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 만명이 모여 서로 밟힐만큼 되었더니' 그러니까 수 만명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의 교훈을 청취했던 것을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지요. 그때 예수께서 제자 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예수님의 가르침이 한참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갑자기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튀어 나와 예수님께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본문의 시작입니다.

 

 13절 '무리 중에 한 사 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더불어 나누게 하소서 하니' 아마도 형제가 있었는데 그 형제의 부모 혹은 아버지가 졸지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간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재산이 두 형제에게 나란히 나누어져야 할터 인데 아마도 그 형이 동생 몫으로 돌아갈 유산까지도 아마 자기가 착복해 버린 것 같아요. 구약의 법에 의하면 장남은 언제나 맏아들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갑절을 가지도 록 구약에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참 좋은 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장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 아버지가 물려줄 게 별로 없어서 내가 받을 이익이 없습니다마는 그러니까 형제가 살았다고 할 것 같으 면 형에게 3분의 2가 가고 동생에게 3분의 1이 가는 것이 합당했을텐데 아마도 3분의 1마저 형이 가로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억을했 겠죠 그래서 예수님 앞에 튀어나와 서 그 억울함을 호소하게 된 것입니다. 내 형을 명령해서 유업을 나와 더불어 나누게 하소서.

 

14절을 보시면 예수님의 대답이 아주 의외의 대 답을 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우리가 이 말씀을 피상적으로 접근해서 예수께서 공정한 분배에 대한 관심이 없으셨다든 지 혹은 정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 말씀을 해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보다도 예수님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자로 그들 앞에 다가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물런 이 형에게 문제가 많죠. 그러나 이 말을 하는 그 동생,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도, 동기까지도 살피시는 분이기에 그 형 못지 않은 동생의 마음 속에 밑바탕에 깔려있는 동일한 어떤 문제를 보신 거예요.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자기 것을 달라고 요구 하는 동생의 마음 속에도 꼭 같이 자리 잡고 있는 탐심이라는 그 문제 의 뿌리를 주께서는 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절에 보시면 15 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탐심의 죄악을 말 하게 되면 우리는 흔히 부자들의 죄악을 얼른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탐심은 부자들의 문제만은 아니지요. 가난한 사람도 부자를 비 판하고 부자를 정죄하는 가난한 사 람의 마음에도 꼭 같이 탐심이라는 내적인 죄악은 여전히 존재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탐심에도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유형의 탐심. 이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예수께서 사용하신 생명이라 는 단어는 매우 독특한 단어입니다. 그것은 그냥 우리를 존재케 하는 생물학적인 생명이라는 단어가 아니고 이것은 어떤 기쁨 보람 의미 이런 것들이 어우러진 생명이라는 뜻이예요. 어떤 질적인 생명. 그러니까 제가 이것을 세속화된 단어로 다시 바 꿀 수가 있다면 사람의 행복한 인 생, 생명이라는 말은 행복한 인생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이어서 한 비유를 16절 이하에서 한 비유 우리가 잘 아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께서는 탐심이라는 죄악의 정체를 규명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이 탐심의 죄악에서 해방될 수가 있느냐라는 해방의 비밀을 우리에게 나누고 계신 것입니다 자, 탐심은 어떤 죄일까요? 본문의 비유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생각하겠습니다.

첫째로, 탐심이란 우리의 이기심을 살찌우는 죄악인것입니다. 자, 비유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16절 '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절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이 부자의 독백이 시작됩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자, 이 짤막한 독백 가운데 여러분 지속적으로 반복 되는 단어 하나가 있었죠? 어떤 단어입니까? 나라는 단어예요. 일인칭 대명사가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자,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내가 내 영혼에게...우리 말 번역에서 읽어도 적어도 여섯 번씩이나 나라는 단어가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원문에는 그 보다 훨씬 더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어리석은 부자의 의식속에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 중심의 세계였는가를 볼 수 가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 죄악에 대한 시리즈의 말씀을 시작하면서 거의 매번 이것을 강조했습니다만 사람이 자기를 위한다든지, 또 자기의 이익을 추구한다든지 자기를 존귀히 여긴다든지 그 자체를 우리 가 정죄할 필요는 없어요.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룰 위하는 것은 죄악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만 위하는 것, 이것은 죄악이예요. 이때부터 우리는 탐심 이라는 늪속에 빠져들어 가기 시작 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탐심의 지배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일단 우리가 탐심의 지배를 받게 되면 우리는 치유하기 어려운 병적인 이기주의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어떤 글에 보니까 병적인 이기주의자의 모습을 비유하기를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에 비유했더라구요. 컨트롤할 수 없어요. 이젠 질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 많은 소유, 더 많은 것을 자기 손에 쥐기 위해서 계속 달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어리석은 부자에게서도 그런 경향을 읽어 볼 수 가 있습니다. 18절에 보시면 더 크게 짓고 더 많은 물건을 쌓아 두리라. 더 많은 물건, 더 많은 곡식 더 더더.. 이것이 바로 병적인 이기주의 자의 삶의 모습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지옥을 묘사할 때 이 지옥을 다른 말로 무저갱이라고 말합니다. 무저갱. 무슨 뜻이죠? 이 바닥이없다. 바닥이 없는 깊은 심연, 지옥은 끝없는 욕망의 세계, 그. 욕망을 충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지옥에 가서도 더더 하고 목마르게 소리치는 불만의 감옥이 지옥의 정체라고 성경은 그리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얘기입니다마는 저 유명한 세계적인 부호인 쟌 락팰러라는 남겨 놓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한 번은 이 사람이 신문기자와 인터뷰 를 갖게 되었는데 한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고 해요. 당신은 참 부자인데 당신이 축적한 이 모든 재물로 당신은 만족하십니까? 락펠러가 대답하기를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더 가져야 만족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락펠러가 대답하기를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어요. 'Just little more' 조금만 더. 저는 잠실벌이 개척이 될 때 제가 아는 어떤 교인 집사님의 가정을 심방했던 적을 잊을 수가 없어요. 한 13평 조그마한 아파트의 집을 장만하고 얼마나 기뻐 하시는지. 같이 축복하고, 같이 예배 를 드렸는데 얼마 후에 심방을 갔더니 그 분이 목사님 기도제목이 있는데 기도해 주세요. 뭡니까. 우리 집 갖게 되어서 너무나 기쁜데, 저희집 소원은 20평 아파트로 이사가는 겁니다. 그러더라구요. 그리고 얼마 후 에 가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 집을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기도하면 더 잘 응답되데요. 그게 뭡니까? 그러니까 우리집 의 평생 소원은 화장실이 두개인 아파트로 이사가는 것입니다. 조금 만 더. 조금만 더. 그래서 헤어나오기 어려운 이 죄악의 정체 이것이 바로 탐심이예요. 우리의 이기심이 끝없이 살찌우는 죄악 이것이 바로 탐심의 정체입니다. 탐심은 어떤 죄악일까요?

둘째로, 탐심은 이웃을 향해서 문을 닫아버리게 만드는 죄악인 것 입니다. 내가 이웃을 향해서 문을 닫게 만드는 범죄인 것입니다. 여러 분, 본문에 나타난 부자의 독백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부자의 독백 가운데 이웃이 고려된 흔적이 있습니 까? 이웃이 언급된 적이 있나요? 이 본문의 독백 가운데 당신이라는 말이 나온 적이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가 이 곡식을 어찌 할꼬. 내 곡간을 헐고 내 곡식과 내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이 부자의 언어 속에는 당신이라는 말이 존재할 여백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확인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부자의 세계, 그것은 네가 없는 나만의 세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명한 유대교 출신의 철학자 가운데 마틴 부버라는 사람이 쓴 아주 세계적인 명저인 나와 너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당신이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나는 존재한다는 거예요. 당신이 있기 때문에 나 는 존재할 의미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관계 속에 존재라는 사실 입니다. 여러분 본문에 나타난이 어리석은 부자 농부 그러나 이 부자도 나름대로 어떤 성공을 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이웃들의 참여와 이 웃들의 도움이 있었을까요? 그가 농 사를 짓기 위해서는 씨앗 가게 주인의 도움을 받아서 씨를 아마 뿌렸을 겁니다. 그가 농사를 짓기 위해서 농기구 제작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는 농사의 기구들을 활용했을 것이고, 그가 부렸던 소나 말을 정성 스럽게 키워 놓은 어떤 가축 사육자 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의 농사일을 확장하기 위해서 곡간을 짓기 위해서 아마도 그는 은행 융자를 위해서 은행 이웃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고 그의 밭을 일구는 작업을 위해서 많은 소작인 그의 주변 동료 이웃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세계에는 여전히 나밖에 없는 거예요. 나만 잘살면 그만이예요. 이웃은 살든 죽든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이웃의 수재가 나든 어떻게 되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얘기에 불과합니다. 얼마 안있으면 이 지구는 60억의 인구가 될 것이라고 신문에서 보도되고 있습니다. 여러 분 60억의 인구 가운데 그 약 10분 의 1,6억 정도는 매일 밤에 채워지지 못한 창자를 붙들고 잠자리에 든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시나요? 이 세상에는 날마다 약 4만명 정도가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는 100명 정도의 아기 가운데 40명 정도는 영양실조로 회복 불가능의 육체적 정신적 장애를 안고 한 평생을 살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매년 십만명에 달하는 어린 아이들이 비타민A의 결핍으로 장님이 되어가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을 아시나요?

 

 나만 살면 돼요? 우리가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을 읽어보면 .자, 이 세상이 마지막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심판을 받는 최후의 모습을 가르켜서 성경은 바벨론이라고 부릅니다. 계시록 18장에 보면 이 바벨론이 무너지는 참담한 광경을 묘사합니다. 이 바벨론이 왜 무 너질까요? 성경 학자들에 의해서 이 바벨론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때로는 로마의 다른 명칭으로서 바벨론을 사용했다고 학자들은 생각합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카톨릭이 전성시대를 이룰 때 이 바벨론을 카톨릭에 비교한 적도 있어요. 그러나 정당한 해석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계시록 18장을 읽어보면 이 바벨론의 정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소유 중심의 가치관이 빚어내고 있는 이 세상, 특별히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로 대표되는 이 세상에 모습인 것이 현저합니다. 우리가 계시록 18장에 보시면 이바벨론이 망하는 마지막 순간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18장 15절 이하 에 보면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 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다 이 쾌락 주의와 물질주의로 대표되던 세상 소유중심의 가치관을 벗어내지 못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무너 지는 광경을 보여줍니다.

 

 이 광경을 보여주면서 계시록 18장에 서론 부, 4절에 보면 이런 경고를 합니다. 내 백성아 내 백성아 너희들은 거기서 나와서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우리가 이 바벨론적 라이프 스타일을 모방 해서는 안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백성아, 내 백성들만이라도 이런 죄에서 나와라. 나와라. 그러나 이 시대를 살 아가고 있는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 인들이 이 물질주의적이고 그리고 쾌락중심의 가치관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을까요?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은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훈련을 시킵니다. 그 중에 십일조 그런데 십일조에도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회식의 십일조가 요구되고 있었습니다. 이 회식의 십일조가 뭐예요? 다 십일조 가지고 와서 함께 먹는 거예요. 나눔의 원리가 강조되고 있어요. 또 매 삼년 마다는 구제의 십일조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것은 옵션이 아니라 의무였습니다. 주님은 거의 의무로써 나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만 살면되요? 그래서 탐심은 이웃과의 관계를 차단시키는, 이웃을 향해서 창을 닫아버리게 만드는 죄악 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세 번째로 탐심은 우리 삶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망각하게 하는 범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포함해서 성경은 결코 물질의 필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또 성경은 가난이 미덕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또 부나 물질을 창출하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뭐냐. 이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가룰 알고 그 주인의 뜻대로 그 물질을 선용할 줄 아는 분명한 가치관이 우리에게 확립되어 있는가를 성경은 묻고 있습니다. 그 렇지 못하고 만약 이 탐심의 노예가 되면 내가 물질을 부리는 자가 아니라, 물질이 나를 부리게 되면 돈이 나를 소유하게 되면 내가 돈을 소유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소유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탐심의 죄악 속에 빠집니다. 그리고 탐심의 죄를 갖게 되면 우리 눈이 멀어요. 안 보여요. 인생의 판단이 흐려지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됩 니다. 하나님을 못 보고 살아요.

 

 여러분이 구약 성경에 민수기 22장을 보면 아주 재미나는 얘기 하나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거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해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경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영향력이 소위 모압지방 지경까지 확장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모압 사람들이 위협을 받습니다. 모압 왕 가운데 발락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발락 왕이 위협을 느낀 나머지 안되겠다, 이스라엘을 어떻게 좀 망하게 할 수가 있냐? 적어도 영향력을 축소시킬 수가 있을까 그래서 복수를 사용합니다. 복수를 사용하는데 이스라엘 선지자 하나를 삽니다. 그 선지자가 발람이라는 선지자예요. 발락이 발람을 고용을 했어요. 뇌물을 줍니다. 뇌물을 주어 갖고 네가 이스라엘을 좀 저주하라 자기 민족을 저주하라는 거예요. 처음에는 주저도 했지만, 이 뇌물이 들어오니까 눈이 어두워졌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 발람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나 갑니다. 발람이 발락 때문에 발딱 뒤집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기 위해갑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귀가 안가요. 그러죠? 나귀가 낑낑거리고 있는 거예요. 길을 안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귀 앞에 뭐가 보였어요. 하나님의 천사가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너 가면 안돼. 그런데 나귀는 보는데 발람 선지자는 그걸 못 봐요.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선지자가 나귀를 두들겨 팹니다. 세 번씩 나귀를 두들겨 패니까 왜 패냐고 나귀가 소리를 질러요. 하나님이 안 보이냐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디 보이느냐말야. 그때 하나님이 한 순간 선지자의 눈을 열어 주셨어요. 그러니까 보여요. 하나님의 천사가 길을 가로막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뛰어 내려와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 사람 이 탐심에 젖어 버리게 되면 눈이 멀어요. 맹목적인 인간이 돼요. 하 나님이 안 보여요. 그리고 세상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모든 기능이 상실됩니다. 탐심은 무서운 죄입니다; 나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 내 삶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못보게 만드는 죄악이 바로 탐심의 죄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저와 여러분이 이 탐심이라는 죄에서 해방된 인생을 살아갈 수 가 있을까요? 어떻게 죄를 극복할 수가 있을까요? 두 가지만 기억하십시다.

첫째는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날마다 확인하는 삶을 살아야 합 니다. 우리 물질의 주인을 확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질의 주인이 누구겠어요. 하나님이시죠. 자, 드디어 하나님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그 어리석은 부자에게 등장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 까? 본문의 20절에 보시면 '어리석은 자여,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그런데 이 장면이 아주 재미있는 장면입니다 자, 조금 전에 그 부자의 독백은 어떤 독백이 었습니까? 내 물건 내 곡식을 어찌 할꼬. 내가 곡간을 더 크게 짓고 내 곡간에 내 물건을 가득가득 쌓아두리라. 내가 내 영혼에게 심지어 자 기 목숨까지 자기 것이라고 소리칩니다. 내 영혼에게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그래, 다 네거 라고 생각하는 네 영혼이라고 생각 하는 네 영혼을 내가 가져가리니 그러면 네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지금 이것이 'ownership'의 문제예요. 소유권의 문제예요. 누구거냐?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하죠. 그러나 하나님이 내가 가져가겠어 네 생명 끝 그러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세상 떠날 때 가져가는 사람을 본 일이 있으세요? 가지고 가는 사람?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이 남긴 에피소드 가운데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그 의 유언을 따라 그가 죽어서 들어간 알렉산더가 들어간 관에는 양쪽에 구멍을 팠다고 그러죠.그리고 양손을 관 바깥으로 내밀었대요. 빈 손 으로 나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고 간다. 여러분 세상 떠나시는 사람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가시는 분을 보셨습니까? .세상에 태어날 때는 두 주먹을 이렇게 불끈 쥐고 태어납 니다. 욕망을 위한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가는 날 우리가 쭉 피고 떠나갑니다.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해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해요. 온 세상을 정복하고 더 정복할 땅이 없어서 울었다는 알렉산더도 두 손을 펴고 갔어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해요. 그것을 미리 준비해야 된단 말이죠. 내 것은 없다. 하나님이 잠시 맡긴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이 모든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어떻게 인정하면서 우리가 그것을 망각하지 않고 날마다 살 수 있어요.

 

저는 이것을 위한 제일 좋은 경건의 practice가 그것이 규칙적 헌금의 습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십일조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예요. 십 일조의 정신. 주님의 것을 주님에게 바친다. 그런데 십분의 일만 주님 것이 아니예요. 십일조에 대한 가장 커다란 오해는 십분의 일만 바치면 의무를 다했다. 주님의 것이니까. 십 분의 일만 주님의 것이예요? 아닙니 다. 십분의 십전체가 다 주님의 것 이예요. 이 모든 것의 주인이 주님 이신데 그 중에 구체적으로 십분의 일을 떼어서 바쳐서 하나님의 일에 성별함으로써 내 모든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겠다는 내 신앙고백적 행위예요.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분의 일만 바치지 않았습니다..full time 사역자 레위인을 support 하는 십일조. 또 회식의 십일조 아까 말한 구제의 십일조 이것을 다 합하면 거의 23%씩 매달 바쳤어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규칙적 습관, 규칙적인 헌금의 드림의 습관 이것은 내 모든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다. 내가 아니다. 하 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영적인 자기 훈련의 작업인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주인이십니다. 그때 우리가 자유를 얻어요. 자유를 얻어요.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정말 탐심에서 자유하려면 참된 부요의 삶 을 살아야 합니다. 참된 부요의 삶. 진짜 부자의 삶. 뭘까요? 본문의 마지막 절을 다 같이 읽어보세요. 21 절'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자. 바꿔 말하면 진짜 부자는 누구냐?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요한 자, 이것이 진짜 부자란 말이예요. 하나님의 은혜로 배부른 사람, 하나님의 생명으로, 하나님의 평안으로, 하나님의 기쁨으로, 그 하나님 의 가치로 가득차 있는 사람. 쉽게 말할까요? 하나님으로 배부른 인생. 그것이 진짜 부요한 삶이예요. 저는 이 고백이 이런 사람의 고백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의 고백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는 부족함이 없다.' 이것이 부자 아니예요? 다 가져서가 아니예요. 살제로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전부가 되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전부로 삼은 사람의 그고백 나는 부족 함이 없다. 이것이 진짜 행복한  람 아닌가요? 이것이 부요한 사람 아니예요? 내가 무언가 못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만 더 더 하는데 하나님으로 꽉 차있으면 더 원하는게 없잖아요. 뭘 더 원해요. 하나님으로 꽉 차있는데. 하나님의 임재로, 하나님의 존재로 가득찬 인생. 요즘 신문에 보시면 카톨릭에서 성 테레사, 마더 테레사, 테레사 수녀가 죽은 뒤에 이 테레사 수녀를 성자로 만드는 문제를 카톨릭 안에 서 지금 토론이 되고 있습니다.

 

'saint', 성자의 반렬에 추앙을 할 것인가 말것인가. 근데 반대 여론이 있어요. 그 반대 여론 가운데 하나가 뭔가 하면 돈을 많이 기증을 했는데 테레사 재단에. 그 일부분의 돈이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근데 테레사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그건 테레사 수녀가 돈을 착복을 했다든지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테레사 수녀는 워낙 돈에는 관심이 없었던 여자기 때문에 관리에 있어서 부분적인 mistake 이 있었다. 그것은 옥의 티와 같은 것이지만 그의 본심이 그녀의 본심이 어떤 돈에 대한 다른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돈에는 워낙 관심이 없었다. 저는 그 말이 맞는 말이라고 생각을 해요. 아마 세인트가 될 거예요. 카톨릭에서 성자로 추앙이 될 것입니다. 한번은 이 수녀가 테레사가 미국 순회 집회를 하는 도중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굉장히 부자를 만났대요. 근데 테레사 수녀에게 뭐 좀 도와드릴 것이 있습니까? 뭐가 필요하십니까? 'What do you need the most?" 당신이 뭐가 제일 필요하십니까? 뭐가 제일 필요하세요? 테레사 수녀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저요? 예수님만 필요합니다. 주 예수님만 필요합니다. 그분이면 족합니다.예수 그리스도면 족합니다."


저는 이게 진짜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리스도가 구원이신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가 소망인 것 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가 능력인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가 내 소망이고 구원이고 능력이고 나의 꿈이고 나의 자랑이고 나의 기업이고 나의 피난처고 예수가 나의 구원 이시라면 뭐가 더 필요해요? 예수로 꽉 찬 인생, 성령충만한 인생, 그리스도로 꽉 찬 인생, 정말 그리스도의 임재가 그리스도가 나의 자랑이 되고 그리스도가 나의 프라이드가 되고 그리스도가 나의 기쁨이 되고 그리스도가 자랑이 되어버린 인생이라면 누구나 지금도 이 고백은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십니다. 나는 부족함이 없어요. 이 탐심에서 참으로 자유한 인생, 이 자유의 삶이 여러분과 저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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