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가지 罪 - ② 질투(삼상18:6-14)
- 이동원 목사
우리는 지난 시간부터 시작해서 기독교 교회 역사를 통해 일곱가지 죄악이라고 지적되어온 그 죄악을 하나씩 함께 다루어 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은 교만에 대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일곱가지 죄악은 교만, 질투, 분노, 탐심, 탐식, 그 다음에 게으름, 정력 이렇게 일곱가지가 교회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극복해야 대표적인 죄악들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일곱 가지 죄악 가운데서 아마도 가장 강력한 그 감정을 동반 하는 죄악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질투의 죄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질투는 우리의 감정이란 에너지를 집중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를 지배합니다. 일단 질투하기 시작하면 우 는 그 속에서 헤어 나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앵거스 윌슨이라는 과거의 설교가는 일곱가지 죄악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그래서 우리의 신체의 어떤 부분의 표정과 관련 시켜서 비유를 했습니다. 정력이 충혈된 눈동자라면 탐심은 올챙이 배와 같다. 교만이 낙타의 코라면 질투는 경련하고 있는 얼굴에 비유할 수 있다. 이 부르르 떠는 경련하고 있는 얼굴, 이것이 바로 질투의 모습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유태인들의 민담에 보면 이런 얘기가 있어요. 어느날 그 천사가 한 여자에게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그 여인을 축복하겠다고 그런데 그 여인을 축복할 뿐만 아니라 그 여자가 지명하는 친구가 있으면 그 친구에게는 똑같은 축복을 더블로 주겠다 는 그런 제안을 했습니다. 이 말을 딱 듣자 마자 즉각적으로 이 여자는 자기의 그 라이벌이었던, 질투하고 있던 한 여자친구를 생각합니다. 그러면 “천사님, 제가 무얼 원하든지 저에게 주시는 그것을 제 친구에게 는 갑절로 주신다는 말씀이죠?” 맞다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여자가 무엇을 요청했느냐 하면 “그러면 제 눈을 한 눈을 시력을 잃어버리게 도와주십시오.” 그랬어요. 아직도 무슨 얘긴지 깨닫지 못 하시는 분이 있어요. 그러면 자기 친구는 어떻게 돼요? 두눈이 다 시력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질투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감정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다윗 이 골리앗 즉 블레셋의 적장이었던 골리앗을 넘어 뜨리고 이제 개선장군이 되어서 개선의 퍼레이드를 펼치면서 이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도상에 있어서 오늘 본문의 7절에 보시면 여자들이 도상에서 환영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한번 7절 같이 읽어 보시죠. 7절 다같이 시작.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이것이 화근의 시작, 비극의 발단이었습니다.
가끔 여자들이 이렇게 속이 없어요. 속이 없어. 전쟁의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서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고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다. 사울이 왕이잖아요. 그러면 왕에 대한 어떤 예우를 해야 될텐데 사울에게 대해서는 천천이고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렸습니다. 그 다음절에 보시면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네 다윗이 분노했어요. 가로되 나에게 다윗에게는, 아 다윗이 아니고 사울이 분노한 거죠. 분노하면서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왕인 나에게는 천천만 돌리다니. 그렇다면 다윗이 이 다음에 노리는 것은 왕의 보좌인 내 자리밖에는 없겠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다윗이 그랬다는 것이 아니예요. 사울이 그렇게 판단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사울의 일생이 달라집니다. 질투의 일생으로 빠져들어갑니다. 사울의 전 생애가 왜곡되고 변질되는 비극의 발단이라고 할 수 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울의 일생을 좀 추적하면서 이 질투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함께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질투. 질투란 어떤 죄일까요?
첫째로 질투는 자기의 가능성을, 나라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포텐셜 (potential)을, 가능성을 제한 시키는 죄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질투하기 시작하면 나의 장 점이 더 이상 계발되지 못 합니다. 내가 가진 좋은 가능성이 모두 사장 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울이란 사람이 본 래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을 보시면 사울을 처음 등장할 때 왕으로서 후 보로서 묘사되는 장면에 보시면 사 울이 아주 괜찮은 사람이예요. 아주 재주도 있고 재능도 있고 또 뛰어난 탈란트를 가지고 있는 아주 괜찮은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9장2절 이하 에 보시면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준수하다. 미남이다. 아주 얼굴도 잘 생겼다. 또 키도 크다. 사울 하고 같 이 서면 다른 사람은 어깨 밖에 오지 않는다. 아주 훤칠한 키를 가진 아주 미남이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무엘상 9장에 보시면 사울의 아버지가 암나귀 하나를 잃어버립 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보고 찾으라고 그래요. 그래서 암나귀를 찾는 과정에 있어서 그 도상에서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를 만나요. 선견자를 만나는데 얼마나 깍듯하고 예의 있게 그를 만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아주 예의 바른 사람이고 신앙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이제 사무엘이 그를 왕의 후보로서 피택하고 드디어 기름을 부으려고 했을 때 사울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저는 도저히 이런 자리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겸손 한 사람이었어요. 아주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드디어 그가 왕이 되자 몇 차례에 걸친 전쟁을 벌이는 가운데서 그는 뛰어난 지략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통솔력을 발휘합니다. 리더쉽이 있었고 지혜가 있었 고 아주 여러가지 면에 있어서 그는 갖추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사울이 다윗을 질투하기 시작하자 그 순간부터 사울이 가졌던 모든 장점이 다 사장되어 버리고 말아요. 더 이상 그는 계발 되지 못 합니다. 그는 더 이상 리더로서 성숙해 가지 못 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건은 인생의 장에서 언제 든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저 유명한 아카데미 위너 영화 ‘아마데우스’가 보여주고 있 는 메세지도 바로 그런 메시지가 아 니겠어요?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궁중악사 였던 안토니오 살리에리. 나 름대로 이 사람도 훌륭한 음악갑니 다. 그리고 인정을 받았고 그러나 어느 날 그가 발견했던 틴에이저 소년에 불과했던 한 소년, 그러나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를 발견한 그 순간부터 질투의 감정이 끓어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안토니 오살리에리의 인생이 무너져 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사실 이 사람 나름대로 괜찮은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질투가 그를 사로잡자 더 이상의 그의 장점과 은사가 계발되지 못하고 그의 인생은 비극적인 퇴락을 시작합니다. 네. 여러분, 질투하기 시작하면 내 가능성이 없어집니다. 내 가능성을 사장 시킬 수 밖에 없는 죄악, 이것이 바로 질투라는 이름의 죄악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두 번째로 질투는 나의 일상적 삶을 빼앗아 가버리는 죄악이예요. 일상적인 삶을 빼앗아 가는 죄악인 것입니다. 저는 이미 질투라는 것은 아주 강력한 감정 strong emotion을 동반하고 있는 죄악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질투하기 시작하면 주야로 질투의 대상밖에는 생각이 안나요. 계속 질투하는 사람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네. 계속 그 사람을 생각해요. 밤에 자다가도 그 사람 생각만 나고 내가 거기서 헤어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내가 질투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시기, 미움 이런 감정의 늪 속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는 인생이 됩니다. 이렇 게 되면 내 일상적 보통 내 삶의 태도가 무너져 버리고 말아요. 내 삶이 마비가 되요. 행동이 마비가 되요. 그래서 내가 날마다 해야 할일 상적 삶의 의무를 저버리고 내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의 모습을 온전히 다 뺏겨 버리고 맙니다.
사울왕의 케이스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 오늘 본문에 9절을 한번 읽어 보세요. 자, 본문 9절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그런데 본래 번역을 정확하게 하 자면 이 9절 말씀이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질투하는 눈으로 주목하였더라” 이게 원문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NIV 영어번역에도 보면 이 부분이 이렇게 영어로 쓰여져 있습니다. “Saul kept a jealous eye on David.” 사울이란 사람이 이 다윗을 질투의 눈동자로 주목했다. 질투의 눈동자로 주목했다. 그때 만 주목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날 이후로 계속해서 아니 평생동안 그는 그 질투라는 그늪속으로 빠져 들어가서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생을 이 사울왕이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계속 사울왕의 생애를 추적하다 보면 사무엘상 24장에 보면 전쟁이 일어나요.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요. 사울 이 왕이니까 사령관이죠. 이 전쟁을 벌이는데 전쟁이 약간 소강상태에 빠졌을 때 참모가 소식을 갖고 옵니다. 그 소식은 뭐냐 하면 사울이 계속 다윗을 쫓아 다니고 있었는데 다윗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었어요. 전쟁터 가까이 있다는 거예요. 그 소식을 듣자 마자 전쟁하다 말고 사울 왕이 다윗을 잡으러 쫓아 갑니다. 말도 안되는 얘기죠. 지금 국가 대 국가, 뭐 큰 나라는 아니고 부족 대부족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나라의 전쟁을 수행하는 마당에 있어서 개인적인 사사로운 일로 전쟁을 중단하고 사울왕이 다윗을 잡으러 쫓아 갑니다. 그만큼 질투는 일상적 나의 삶을 마비시켜 버리고 맙니다. 질투는 질투의 대상 외에는 나로 하여금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감정의 파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일상적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된 다 말이죠. 무서운 죄죠.
이런 사례를 우리는 어렸을 때 우리가 읽었던 동화 속에서도 볼 수 있어요.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백 설공주 이야기, 생각나십니까? 백설 공주 이야기. 네, 이 백설공주가 계모가 들어오잖아요. 새로운 왕비로 계모가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왕비는 매직(magic) 거울을 하나 갖고 있습니다. 요술 거울을 갖고 있어요.
아침마다 이 왕비의 일상사는 이 런 거로 시작됩니다. 그 요술 거울 을 향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거울 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그러면 요술 거울이 대답을 해 주기를 “왕비님, 왕비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가장 고 우시고 가장 아름답습니다.”“그렇지. 그렇지.” 날마다 확인하는 일상사예요. 그 이튿날 아침 일어나면 또 거울을 향해 묻습니다.“이 세상 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거울은 어김없이 대답해 주기를 "왕비님, 왕 비님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예쁘십니다.”“맞지, 맞아.”그리고 기분 좋게 하루를 출발합니다.
그런데 백설공주가 자라요. 여인의 성숙한 티와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왕비가 요술 거울을 향해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전에 없었던 대답이 나옵니다. 무슨 대답이 나왔어요? “왕비님, 왕비님은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왕비보다 더 아름다운 분이 이제 생겼습니다. 그는 백설 공줍니다.” 그런데 이 말 을 한번 듣자마자 왕비가 뒤집힙니 다. 그 다음부터는 이 백설공주를 죽이기 위해서, 백설공주를 처치하고 제거하기 위해서 자기 일생을 거기에 쏟아 붓게 됩니다. 이 왕비의 전 일생이 마비되어 가는 비극적인 그 모습을 이 동화는 보여주고 있습 니다. 질투란 그런 것입니다. 질투는 우리의 일상적 삶을 빼앗아 가버리고 말아요.
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세 번 째로 질투는 결국 내 자신의 삶을 파괴시키는 죄악입니다. 나를 파괴 시키는 죄악이예요. 자, 다윗을 질투 했던 사울의 최후, 어떻게 끝납니 까? 점점 점점 지혜가 없어져요, 사울왕이. 그리고 그 능력을 상실해 갑니다. 그는 무력한 왕이 되어 갑 니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그는 마침 내 적군 앞에 포로 될 그 무렵 앞에 자기가 옆에 있었던 병사의 칼에 엎드려서 스스로 자폭해 버리는 비극적인 죽음으로 자기 일생의 마지막을 끝내고 맙니다. 자, 모짜르트를 질투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어떻게 되었어요? 미쳐 버리죠. 나중에 미쳐 버려요. 이 사람 신앙도 있었던 사람이예요.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하나님을 저주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저주해요. “하나님, 어째서 모짜르트에게는 저런 은사를 주시고 나에게는 안주셨습니까?”
제가 목회하면서 여러 가지 종류 의 사람을 만나는데 일반적으로 질투가 제일 많은 사람들이 음악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음악하는 사람 들, 참 조심해야 돼. 웃는 사람들은 다 거기에 해당되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예요. 자, 그래서 미쳐서 거의 자기 일생을 자폭해 버리는 비극적인 마지막을 향해서 질주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질투라는 것은요 사실 어떤 심리적인 단순한 감정 뿐이 아닙니다. 성경이 질투의 문제를 다룰 때 성경은 질투의 배후, 그 심리적인 감정의 배후에 뭐가 있다 이렇게 가르쳐요. 오늘 본문은 그것을 가르칩니다. 질투의 배후에는 질투의 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악령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본문의 10절 말씀을 한번 읽어 보세요. 10절. 자, 사무엘 18장10절 말씀입니다. 다같이 읽어요. 다같이 시작.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악신이 임했어요. 악신. 그래서 이 악한 신이 사울 을 충동질 하면서 다윗을 죽이도록, 다윗을 음모하도록, 그리고 다윗을 파괴하도록 조정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죄악 그러나 특별히 질투라는 이런 감정의 배후에 존재 하는 악한 영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신약에서도 여전히 동일하게 그렇게 강조됩니다. 예컨대 우리가 야고보서 3장14절에 보시면 성경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마음 속에 독한 시기가 있느냐?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가 있느냐?” 그 다음 절에 보시면 시기하는 지혜는 남을 음모를 꾸미고 남을 파멸시키고 그러려면 지혜가 있어야 돼요. ‘저 사람을 내가 어떻게 파괴시킬까?’ 지혜가 있어야 되죠.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시기하는 지혜, 이 질투하는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다.’ 이 질투의 배후에는 악한 영, 사단의 영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사단의 마지막 음모가 무엇이겠어요? 질투하는 사람을 파괴시키는 거예요. 속아 넘어가는 거죠. 질투할 때 우리는 이것이 나를 파괴시키려는 사단의 음모인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세익 스피어의 저 유명한 4대 비극 가운 데 나오는 오델로의 이야기. 오셀로 의 이야깁니다. 오셀로. 자, 이 오셀 로의 스토리에 보면 오셀로의 말을 잡고 다니는 기수 이야고라는 친구가 거기 등장합니다. 이야고. 이씬데 이씨 집안의 명예를 더럽힌 사람입니다. 이야고. 저는 이야고의 정체가 바로 이 악한 영의 화신이라고 생각 합니다. 악한 영의 화신. 그가 어떤 역할을 합니까? 이 사람이 사실 뭐냐 하면 자기는 오셀로의 부관이 될 것으로 생각하는데 자기가 부관이 안 되고 다른 사람이 되었단 말이죠. 그게 화가 나 갖고서 자기 주인을 파괴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그래서 어떻게 음모를 꾸밉니까? 그 아내, 주인의 아내인 데스데모나를 의심하게 만들죠. 오셀로로 하여금. 계속 의심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부관 캐셔와 어떤 부정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자꾸 의심하게 만듭니다. 계속 의심에 쫓기던 오셀로는 마침내 질투의 영이 활활 붙어 오르자 마자 더 견디지 못하고 자기 아내를 찔러 버리고 맙니다. 마침내 자기 자신도 찌르고 죽어가는 비극적인 이야기.
여러분, 질투는 나를 파멸시키는 것 이예요. 결국 나를 죽이는 것이 질투의 죄악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 에는 사단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 들이 또 이 사단의 음모를 구별하지 못하고 자기를 파멸시키는 그 길을 걸어 가고 있는지요. 질투는 그렇게 무서운 죄악인 것입니다. 자,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질투의 유혹을 극복 할 수 있을까요?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질투를 느끼는 순간들은 인생의 길에서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극복할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질투에서 자유한 인생을 살아 갈 수가 있을까요?
저는 두 가지 비밀이 있다고 생각해요. 두 가지 대답.
첫째는 뭐냐하면 나는 내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 이 되려고 하지 말고 나 자신이 되어야 돼요. 여러분, 질투라는 것이 무엇이예요? 질투라는 것은 결국 내가 갖지 못한 것, 남이 가지고 있는 것. 남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시기함, 그 것이 바로 질투가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생각하셔야 해요. 자,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남이 가지고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생각하면 남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하나님이 또 내게 주신 것이 있잖아요.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 그거 가지고 내 인생을 살면 돼요. 나의 장점, 나의 탈란트,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 가지고 내 인생을 살면 되는데 내 것, 내 장점 과 내 은사는 계발시키지 않고 ‘하나님이 나에게는 안 주셨을까 제한테만 저렇게 주셨을까 저 사람만 저렇게 주셨을까’ 계속 남만 묵상한다. 다른 사람만 생각해. 비교합니다. 비교하면서 비참해 지고 질투하면서 스스로를 파괴시켜 갑니다. 바로 이 질투라는 것은 비교의식이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 질투를 극복하 려면 이 비교의식의 반대급부는 창조의식 입니다. 창조의식. 우리가 창 조의식을 가져야 돼. 창조의식을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같이 지어 주신 존재는 나 밖에 없다. 나 밖에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돌아보세요, 나 같은 존재가 있나. 나는 매우 독특한 존잽니다.
한번 여러분, 여러분 주변을 한 번 돌아 보세요. 여러분 주변에 지 금 앉아 있는 사람들, 옆에 있는 인간, 앞에 있는 인간, 뒤에 있는 인간을 한 번 쳐다 보세요. 한 번 쳐다 보세요. 한 번 쳐다 보십시오. 얼마나 희한하게들 생겼나. 똑 같은 사람 있습니까? 단 한 사람도 똑 같은 사람이 없어요. 우리가 다 달라요. 하나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독특한 존재로, 얼마나 유니크(unique)한 존재로 지어 주셨는지 모릅니다. 나는 나의 인생을 살면돼요. 내 장점을 계발하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어떤 면에서는 모자라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내가 나은점이 있으니까. 그거 가지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내 인생을 부지런히 성실하게 살아가면 되는거죠. 비교하지 말고. 그런데 끊임없이 비교한단 말이죠.
미국에 살고 있는 흑인들에게 만약 흑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 그러면 틀림없이 두 사람 이름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누구냐 하면 저 유명한 민권 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님, 그리고 또 한 사람 이름이 아마 틀림없이 나올 것입니다. 흑인들이 또 하나의 영웅 으로 말콤 엑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화도 나왔었죠? 말콤 엑스. 자, 이 말콤 엑스의 전기를 읽다가 참 이 비교의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 이 사람은 어렸을 때 흑인으로 태어난 것이 너무너무 원망스러웠어. 그래서 자기 마음 속에 백인을 향한 증오심이 막 자라나요. 백인을 미워하는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백인을 미워하면서 이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소원은 백인같이 되는 거예요. 백인을 미워하면서 자기가 백인이 되기를 원하는 것. 또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비누, 스킨 크림 이런 것을 사다 가 어렸을 때 계속 자기 피부를 그냥 문질러 대는 것이예요. 까만 거를 없애 보려고. 자기가 좀 하얀 사람이 되어 보려고. 머리도 지져 보고 볶아 보고 물들여 보고 그래서 까만 것을 없애려고. 자기도 백인처럼 되려고. 그리고 백인에게 복수하려고. 그런데 그게 안 되잖아요.
어느 날 말콤 엑스가 갑자기 그것은 의식의 전환입니다. 중요한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건 뭐냐 하면 나는 백인이 될 수 없다. 이걸 깨달 았어요. 나는 백인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뭐냐 하면 나는 흑인이어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발견을 합니다. 흑인 나름대로 이 까만 것도 아름다울 수가 있다. 이 까만 것도 아름다울 수가 있다. 이 사람 이러고 나서 흑인의 영웅과 지도자로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흑인 사회 가운데 이런 말을 유행시킵니다. 그 말이 뭐냐 하면 ‘Black is beautiful’ 까만 것도 아름답다. 검정색도 아름답다. 사실 그 나름대로 이 검정색 이 얼마나 고상할 수가 있어요?
내가 가진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말이죠. 내가 가진 독특한 은사가 있고 나의 재능이 있어요. 나는 그거 가지고 내 인생을 살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굳이 다른 사람을 질투하고 시기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예요. 나는 내가 되면 되는 것 이예요. 내가 되면 된다. 여러분, 사실 꼭 탁월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 나라에서 쓰임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탁월하면 좋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2등도 긴요하게 쓰임을 받을 수가 있고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놀라게 하기 위해서 꼴찌도 사용하세요.
저희가 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오면서 제가 저희 집사람과 격렬하게 싸운 것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나는 그냥 짐 미국에 다 줘 버리고 가자 그러는데 그 중에 가정기구 뭐 그릇 이런 것들은 애착이 있는지 가지고 가야겠다고 억지로 우겨대 갖고 싸 갖고 가져 오더라구요. 접시 이런 것들 가져 왔는데 아직도 싸여 있어요. 아직도 열지 않았어요. 한 번도 열지 않았어요. 그걸 왜 가져 왔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아마 그 중에는 좀 멋 있게 생긴 그릇들도 좀 있어요. 아주 아름다운 그릇들이 있는데 무슨 파티를 한다든지 그러면 쓰여질 수 있는 좋은 그릇이겠지요. 제가 가만히 보니까 그 그릇을 써 먹을 필요가 없더라구요. 이유도 없고. 그냥 그대로 놓여 있어요. 그러나 반면에 밥사발, 컵 이런 매우 평범한 그릇들 보면 날마다 밥상에서 얼마나 요긴하게 쓰임을 받아요.
이 탁월성이라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탁월하다고 꼭 쓰임을 받 는 것을 아니예요. 노래 잘하는 사람도 파바로티, 도밍고, 조수미, 큰 음악제가 있을 때는 크게 쓰임을 받지만. 보세요, 이 별볼일 없는 성가대원들 한번 보세요. 주일날마다 말이죠 주일날마다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매주일마 다 이 분들은 쓰임을 받아요. 조수미가 누리지 못하는 특권이예요. 믿습니까, 여러분? 그런 조수미 같은 여자는 일년에 몇 번씩 밖에 쓰임을 못 받지만 이 여자들은 주일날 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날마다 쓰임을 받는다 말이죠. 중요한 것은 내 나름대로 하나님 이 내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내가 쓰임을 받는 인생을 살아간다. 거기서 만족하고 거기서 행복하면 질투 할 필요가 없는거예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신,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하나님이 기대한 내 스스로가 될 수 있기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우리가 이 질투를 극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배워야 할렛슨은 뭐냐 하면 이웃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돼요. 이웃을 칭찬하고 이웃을 축복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격렬 한 질투를 받았던 모짜르트. 의외로 질투의 대상이었던 모짜르트는 상당히 담담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모짜르트도 드디어 훌륭한 후배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베토벤을 발견하죠. 그 때 모짜르트는 질투하지 않았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두고 보라고. 여기 놀라운 사람 하나가, 탁월한 음악가 또 하나가 나타났다. 얼마나 당당한 태도예요. 얼마나 당당해요. 그러나 베토 벤의 음악과 또 모짜르트의 음악이 다른거 아니예요? 나름대로 다 아름다움이 있는거 아니예요? 꼭 같 아야 할 이유가 없는거죠. 제가 음악하는 사람들 질투 많이 한다고 그랬지만 또 음악하는 사람들 반대로 아주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도 많이 있더라구요. 슈만같은 사람. 브라암스를 발견했을 때 이 브라암스의 천재성을 인정해 주고 그를 격려해 주고 앞으로 갈 수 있도록 세워 주고 말이죠. 그 뒤 나중에 노후에 슈만이 정신병 비슷한 질환을 앓으면서 아주 고통스러운 인생을 보낼 때 오히려 브라암스가 그를 책임져 주고 도와주고 격려하는 아름다운 우정을 나눈 스토리가 있지 않습니까?
저는 매우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묵상하면서 제 마음 속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질문 하나가 있어요. 그것은 이런 질문입니다. ‘만일 사울왕이 개선의 퍼레이드에서 사람들이 다윗에게 박수를 치면서 그 다윗의 위대한 용맹과 그의 업적을 칭찬할 때 사울왕이 만일 사울이 이렇게 반응했었더라면 ‘국민여러분 하나님은 드디어 우리나라에 다윗과 같은 놀라운 지도자를 주셨습니다. 다윗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다윗은 우리 국가의 미랩니다. 다윗 같은 젊은이들이 나오는 한 우리 국가는 안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더 많은 다윗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만약 이렇게 사울왕이 반응했었더라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사람들이 그 사울왕을 얼마나 또 존경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날 만약 유태인들을 붙들고 당신들이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절대로 사울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다윗만을 기억합니다. 저는 반대로 사울이 다윗을 인정하고 격려하고 축복하고 세울줄 알았었더라면 사람들은 다윗보다도 지금쯤 더 많은 사울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건국의 시조로, 이스라엘 건국의 위대한 기초를 놓은 사람으로 사울을 기억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못한 거예요, 사울이. 이웃을 축복하는 일, 후배를 축복하는 일, 세워주는 일을 하지 못한거죠.
저는 이번에 코스타를 위해 잠깐 집회여행을 하면서 굉장히 재미있는 이런 느낌과 생각을 가졌어요. 제가 처음에 나가서 두 주전에, 삼 주전 에 토론토에 가서 토론토에서 먼저 유학생집회를 인도했습니다. 토론토 코스타 모임을 가질 때는 제가 주강사로서 매일 말씀을 사흘 동안 계속 증거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은혜를 받고 카운셀링도 하고 그 다음에 토론토 집회가 끝난 후에 시카고로 와서 시카고에서 우리 미주 유학생 수련회를 섬기게 되었는데 이번 미주 유학생수련회는 제가 일부러 자청해서 강사를 뺐어요. 그래서 저는 강사를 하지 않고 뒤에서 그냥 돕고 섬기는 역할만 했습니다. 간사들하고 의논해 주고 집회가 잘 돌아가도록 도와 주는 그런 역할만 하고 1시간도 저는 설교를 하지 않고 그냥 뒤에서 있었습니다. 사실은 제가 간사들과 의논해서 이번 코스타 모임에는 좀 젊은 강사를 세우자.
그래서 30대, 40대로 강사를 다 세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코스타 모임이 계속되는 동안에 단 한 번도 말하지 않고 그냥 뒤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러면서 재미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중에 우리 j 목사님, 강준민 목사님, 이런 분들이, 다 30,40대 우리 후배들이 중요한 강사로 메시지를 증거했는데 딱 끝나고 나니까 사람들이 강사에게 은혜를 받잖아요. 그러니 다 뭐냐 하면 학생들이 j목사에게 일제히 몰려가서 사인도 받고 “목사님 은혜 받았어요.” 그러고, 막 j목사 주변에 사람들이 좍 모이더라구요. 집회가 끝나는데 내 주변에 아무도 오지 않더라구요. 그 때 내가 느끼는 어떤 쓸쓸함을 여러분, 이해하시겠습니까?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에이, 괜히 내가 다 설교해 버릴걸. 잘못하지않았나?’ 아, 그런데 j목사 주변에 애들이 모여서 어쩔 줄을 몰라요.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생각이 딱 들었어요.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달려갔어요.
“전 목사님” 내가 실제로 그래 했고 “J목사 설교 너무너무 잘했어. 내가 축복을 받았네. 누구보다 도 내가 큰 축복을 받았는데 하나님이 J 목사님을 놀랍게 쓰신 것을 감사하오.” 아, 그랬더니 J 목사를 저를 껴안고 “목사님 감사해요. 말씀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그 때 제 마음 속에 어떤 설명할 수 없는 평안이 있더라구요. 평안이 있어요 결국 우리 선배라는 것은 후배라는 것은 뭐냐 선배를 디디고 그 다음에 더 놀라운 미래를 열어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면 기쁘게 그렇게 돼야 하지 않을까? 계속 이런 후배들을 격려하고 세울 수 있다면 이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결정적으로 사울의 실패가 거기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사울 이 만약 다윗을 세울 줄 알았더라면, 그를 축복할 줄 알았더라면, 그를 격려할 줄 알았었더라면, 이스라엘 역사는 얼만큼 달라지고 사울 자신의 인생은 얼만큼 달라졌을까! 그 러나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너무나 비극적인 사울의 그 나머지 비극의 인생을 말해주는 이런 표현 하나를 발견합니다. 12절 보세요. 1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12절. 본문의 12절 다같이 시작.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여기 극적인 두 개의 대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떠났다. 사울을 떠났다. 하나님은 질투를 안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질투하는 자를 떠나가십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셨어요. 하나님은 사울을 떠나. 그러나 또 하나의 극적인 대조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하셨다. 다윗과 함께 하셨다. 마지막 절은 어떻게 끝납니까? 본문의 마지막 절. 15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14절이요. 14절 시작.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다윗을 향한 그 질투의 감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계속 다윗을 죽이고 음모하고 파괴하기 위해서 달려 갔던 사울의 일생, 반대로 다윗은 어떤 일생을 살았습니까? 그런 질투를 받으면서도 다윗은 깎듯이 사울 왕을 모시잖아요. 자기를 죽이려고 시도했던 그런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와도 나는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를 내가 손 대지 않겠다. 깍듯한 예의로 계속해서 사울왕을 위해서 기도하던 다윗, 하나님 보시기에 이런 다윗이 얼마나 예뻤겠어요?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시더라’ 다윗은 더 지혜로운 사람, 더 용기 있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자,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기에 선택이 있습니다. 두 가지의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 인물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질투하다가 많은 가능성과 그리고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음에 도 불구하고 질투의, 그 시기의 영을 극복하지 못했던 사울, 하나님은 사울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 다윗, 그가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축복하고 사랑하고 후원하고 기도할 줄 알았던 따뜻한 마음의 다윗,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에게 지혜를 주시고 그에게 비전을 주시고 그에게 용기를 주시고 마침내 나라를 맡기시던 이 하나님. 오늘 여러분의 일생은 누구의 일생을 닮은 모습일까요? 사울일까요 아니면 다윗일까요?
하나님이 함께하신 다윗, 이 다윗은 먼 훗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얼마나 아름다운 모형입니까? 예수님 왜 오셨어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를 축복하시 려고, 우리를 사랑하시려고.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자신을 배신하고 그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상황, 그 고통과 비극의 절정 속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뭐예요? 자기를 못박는 자들을 위해 용서하시고 기도하시면서 “아버지 저들이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오니 용서해 주시옵소서.” 용서하고 사랑 하고 세웠던 우리 주님. 그래서 우리에게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말하는 사람들이라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사울의 삶을 본받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다윗의 일생을, 다윗의 후손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의 생애를 살아갈까요?
있을 수 있는 질투, 인간성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 마음 속에 이런 질투, 그러나 질투를 넘어서서 이웃 을 사랑하고 격려하고 세울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주님이 너무너무 기뻐서 함께 하기를 즐겨 하는 인생. 여러분의 인생의 선택이 여기 있습니다. 당신은 사울의 길을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다윗의 길을 가시겠습니까?
기도하십시다. 우리 다 일어나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다 보면 껄끄러운 사람도 만나게 되고 어쩌면 품기 어려운 이웃, 사랑하기 어려운 이웃,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 랑하고 축복하고 세워주고 하나님, 원하신다면, 원하신다면 내 일생을 그렇게 쓰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 닮는 삶을 살아 가도록 도와 주십시오. 제가 사탄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질투하고 파괴하는, 이웃들을 비판하고 시기하고 그리고 낮추는 그런 일생을 살아가는 자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늘 내 주변의 사람들을 따뜻하게 세워 주고 격려하고 축복하고 좋은 얘기하고 장점을 말해주고 하나님, 내 속에서 질투의 영을 막아 주시고 성령 충만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사랑의 영으로 충만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질투의 죄악을 승리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오 아버지 하나님, 우리 속에 있는 시기와 질투의 영들을 내게서 물리쳐 주시옵소서. 성령으로 붙잡힌바 되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주님을 높여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로 살아가도록 도와 주옵소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너무나 쉽게 우리는 연약하고 너무나 부패한 인간성을 가졌기에 이웃들이 잘 되는 모습을 우리가 축복하고 격려하기 보다도 우리 마음속에서 그들이 안 되기를, 그들이 파멸되기를, 기다리는 그런 부패한 마음들이 우리들속 에 있었던 것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이런 질투와 시기의 영들을 내게서 멀리해 주시옵소서. 성령님, 내게 주의 사랑의 영으로 내 마음 속에 가득차게 도와 주옵소서. 이웃들을 축복하고 용납하고 세워주는 주님 닮아가는 인생, 삶의 모습들이 되도록 도와 주옵소서. 질투를 넘어서서 사랑의 인생을, 축복의 인생을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도록 도와 주 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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