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을 고쳐 주소서(호세아 6:1-3)
- 하원식 목사
올해로 광복 66주년, 해방 66주년이 된다. 광복절이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므로써,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빼앗긴 국권을 되찾은 날을 기념하는 날을 뜻한다. 광복(光復)이란 글자대로 보면, 빛을 다시 찾았다는 뜻이다. '빼앗긴 국권을 다시 찾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빛을 잃고 어둠에서 살던 우리들에게 다시 밝은 빛을 찾게된 것을 의미한다. 나라 잃은 백성의 비참함이란 마치 개나 돼지 같은 취급을 받으며, 노예의 생활을 하였던 것이 우리들의 일제 36년의 생활이었다.
그 상처들이 너무나 깊고 아팠기에 아직까지도 치유되지 못한 채, 민족 감정 내지 민족 정서로 서로를 쉽게 용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한국인들에게 가한 그들의 살인 만행, 착취, 고통을 어찌 여기서 다 말할 수 있겠어요' 일본을 위해서 바치라니 어린것들의 먹을 것까지 긁어가며 바쳤고(그 당시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사망률이 세계에서 제 2위에 해당, 한국 사람의 수명은 44살이었다)
1944년 징용 제를 실시해서 약 21만 명의 한국 청년들을 강제 징집해서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다. 21만 명 중 살아 돌아온 청년은 약 5만 명, 나머지는 다 죽었어요. 우리의 남자들은 강제 징병을 당하여 전선에서 총알받이가 되었다. 우리의 젊은 여자들은 일본 군인들을 위안하기 위해 무참히 정신대로 끌려갔다. 우리말을 빼앗기고, 우리 글도 빼앗겼다. 교회들이 많은 핍박을 당하였고, 자기들의 귀신을 섬기라고 신사참배를 강요받았다. 우리민족은 36년 일제치하에서 참으로 어려운 고초와 수모를 당하면서 살아왔다.
당시 일제는 1910년 억지로 한일합방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을 점령하고 네 가지 운동을 벌였다. 1920년까지는 한국 땅뺏기운동 1930년까지는 한국에 쌀, 곡물 뺏기 운동 1940년까지는 한국사람 혼 뺏기 운동 1950년까지는 한국사람 생명 뺏기 운동을 하여 완전히 한국을 집어삼키려 했다. 그렇기에 일제는 이 땅에 자원은 모두다 빼앗아가고 청년들은 전쟁에 총알받이로 끌려가고 아버지는 일본탄광 광부로 끌려가고 처녀들은 종군위안부로 끌려갔다.
당시 우리 민족은 한국말이 아닌 일본말을 해야했고 성씨도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꿔야 했다. 한국 사람이 한국말 하다가 학교 선생에게 걸리면 다리가 부러지게 얻어맞았다(1945년에 보면 문맹자가 77%로, 한글을 아는 사람이 23%에 불과했다. 해방된 이듬해에 한글을 읽을 수 있는 분이 더 많아져서 문맹자가 41.3%로 나타나고 1947년에는 29.4%로 급속히 문맹자가 줄어들었다). 일반서민들은 생존 권리 마져 잊어버리고 온갖 학대와 빈곤과 서러움에 죽지 못해 살았다.
특히 일제는 교회와 성도들을 심하게 탄압했다. 예배시간을 알리는 종을 다 떼어갔고 찬송도, 예배도 마음놓고 드리지 못하게 했다. 교회 안에 일본국기와 귀신 패를 붙여놓고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거기에 절하라고 강요했다. 특별히 신사참배로 인한 모진 고난과 핍박은 말로다 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모든 것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만행을 용납지 않으시고 역사상 처음으로 원자탄(1945년 8월 6일 아침 9시 15분 일본의 히로시마, 나가사끼 하늘에 B29 미국 비행기가 나타나 폭탄 3개를 투하)의 크고 무서운 채찍으로 징계하사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고야 말았다.
누가 이 오만 불순하던 일본의 천황의 목소리를 이렇게 낮아지게 만들었으며 떨리게 만들었는가? 공의의 통치 자되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운행하시는 분이신 하나님의 역사다. 그때 온 국민은 한곳에 모여서 눈물 흘리며 애국가를 봉창했다. 일제의 탄압과 박해에서 자유의 기쁨을 누리게 되자 하늘 아래 밝은 빛을 보게 되어 광복(光復)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해방 66 년을 맞이했어도 아직도 우리 민족의 가슴에 새겨진 일제의 상처는 아물 줄을 모르고 있다. 이러한 상처 때문에 우리는 일본에 대한 강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일본이 전범자로서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는 것도 문제다. 또한 가끔 망언(妄言)을 하는 일본의 정치인들이 나타나는데 역사왜곡의 망언은 우리 국민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우리의 뇌리 깊은 곳에 박혀 있는 반일감정(反日感情)은 결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축구시합을 하더라도 다른 모든 나라에 져도 일본팀 에게 만큼은 절대 질 수 없다. 그런데 지난 수요일 우리는 굴욕적인 참패를 했다. 3:0 으로 졌다. 루소는 인간이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속박을 받는다고 하였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정복욕은 가장 존엄한 자유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고 속박이라는 굴레를 씌웠다.
1. "우리가 힘써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1절).
호세아 선지자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 약 750년 전에 북쪽 이스라엘 나라에서 태어나 활동한 선지자였다. 당시 팔레스틴 지방은 북쪽은 이스라엘 나라로 남쪽은 유다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남쪽이나 북쪽이나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다 부패하여져서 퇴폐를 일삼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상거래는 점점 문란하여져만 갔는데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있어서 심각하였던 것은 그들의 신앙생활이 정상적 궤도를 이탈한데 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 미가 선지자, 이사야 선지자들을 등장 시켜서 너희들은 여호와께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외치도록 하였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외쳤다.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 매어주실 것이다" 이렇게 쓰디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까지 떨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동안 잘못 살아온 것은 사실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면서 나라는 점점 번영하기 시작하였으며 통일 왕국을 세운 이후 솔로몬 왕조 시대에 가서는 최대의 전성기도 구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신앙적으로 바르게 살려고 애쓰며 일천 번제 까지 드리던 솔로몬 왕도 지혜와 부귀와 영화와 명성이 하늘을 찌르게 되고 나라가 부강하게 되자 이웃 나라들의 왕의 딸들과 정략결혼을 시도하며 이방나라의 여인들을 후궁으로 불러들이면서 부터 완전히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한 나라의 지도자가 타락하다 보니 백성들까지도 덩덜아 신앙, 도덕, 윤리.. 모든 면에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사실 솔로몬 왕조 시대에 나라가 최고로 부강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기 시작하자 자신도 가족도 나라도 다 함께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결국 솔로몬이 다스리던 국가는 하나님의 채찍으로 말미암아 남북으로 두 동강 나게 되었으며 남북으로 나뉜 백성들은 어려운 삶을 각각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물론 나라가 남과 북으로 두동간 난 데는 다 이유가 있겠으나 결국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던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의 불 신앙과 교만을 향한 하나님의 채찍이었다는 신앙적 고백이었다. 그 후 남북으로 분단된 이스라엘과 유다는 여러 왕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어떤 왕조는 정신차려 나라와 민족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운 지도자가 있었는가 하면 또 어떤 왕조는 그러지 못하고 나라와 민족을 망친 지도자도 있었다.
이렇게 남과 북이 분단된 가운데 약 200여 년 흐르는 가운데 이제 북쪽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BC 793-753)가 40년 간 통치하게 되면서(왕하 14:23) 그 영토를 솔로몬 시대를 따라갈 만큼 크게 확장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북쪽 이스라엘은 정치적인 안정 속에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살기도 점점 좋아지게 되었고 걱정 근심도 없어지게 되었다. 먹을 것도 풍족해지고 거의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이 없게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은총과 인도하심으로 편안하고 안정된 삶에 이르렀을 때에 더욱 더 하나님께서 그동안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신앙생활 하지 못하고 불행히도 너무나 빠른 속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를 잊어버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점점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신앙생활보다는 편안한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하였다. 점점 하나님을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 말씀도 점점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다 극기야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우상 섬기는 일에도 앞장서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오늘의 평안과 행복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저 스스로 모든 일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다 잘되어 가는 줄로만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점이 매우 걱정되었다. 왜냐하면 때가 점점 차가는 모습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고 계속 그러다가는 곧 하나님께서 채찍을 드실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편안하고 아무런 문제없이 모든 것이 잘 되어 가는 것 같아도 호세아가 믿음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너무나도 위태롭게 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치기 시작하였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3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모든 기적과 치유의 역사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데서 시작된다.
진정한 회복(回復)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다. 누구를 이야기 하기전에 나부터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를 이야기 하기전에 나부터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야만 한다.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하기 전에 교회타락의 공범의식을 가지고 정말 예수님 말씀처럼 맛을 내는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1) 낫게 하시며 싸매여 주실 것이다.
"찢으신 분이 우리를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신 분이 싸매어 주실 것이라."하셨다. 비록 우리가 잘못해서 죄 값으로 받는 고통이라도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섭리하시는 것이다. 고통 중에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믿자.
2) 살리시며 일으키신다.
하나님의 백성도 찢기고 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그렇게 있지 않을 것이며 오래도록 그렇게 있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곧 그들을 소생시키실 것이다.
3)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2절)하셨다.
'그의 얼굴 앞', 즉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소생시키시고 굳게 서게 한 결과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 것이라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 인생의 희망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얼굴 앞이 바로 인생의 희망소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하시고 우리를 살려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까지도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2. 그러므로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3절)고 했다.
호세아는 또 외치기를 여호와께로 다시 돌아갈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는 여호와를 아는데 힘써야만 할 것이라고 힘주어 외쳤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지금 이 호세아의 외침을 듣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에 전혀 믿음이 없던 사람들은 아니었다. 과거 삶이 어려웠던 시절에는 정말 열심히 하나님께 매달렸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이제 좀 편하게 되니 하나님을 점점 멀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바로 이러한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하고 다시 하나님을 아는데 힘써야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힘써 알아야만 한다고 외쳤다.
소도 주인을 알고 나귀도 제주인의 구유를 안다(사 1:2-3)고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알지 못함으로 버림을 받는다(호 4:6). 여호와를 바로 알지 못함으로 믿으면서 믿음에 능력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 여호와를 알되 적당히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 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은 단순한 머리로 아는 지적 능력만이 아니라 체험하여 아는 것을 말한다.
오늘 본문에 사용되고 있는 안다는 뜻의 '(야다)는 지식과 경험의 영역 모두를 포함하여, 깨달아 아는 것과 체험하여 아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아는 지식을 최선의 지식으로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하며 그 지식을 불러 구하고 찾아야 하며(잠 2:3, 4) 온갖 지혜로 구하고 힘써야 한다.
오늘 본문에 쓰여지고 있는 여호와를 알되 "힘써" 여호와를 알라 할 때 "힘써"라는 말은 (추격하듯) 쫓아가다, 매진하다' 라는 의미로서, '우리가 알자. 알기 위해 매진하자'라는 뜻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을 알되 전력 질주하듯, 그것을 위해 달리고 힘쓰자는 강력한 권유를 표현해주고 있다. 경찰이 범법자를 쫓아갈 때 어떻게 쫓아가야 하는가? 느릿느릿 어슬렁어슬렁 쫓아가는가? 힘을 다하여 쫓아가야 한다. 그러고도 못 잡으면 욕을 먹고 징계를 먹는다.
1)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나오심은 어둔 밤이 지난 뒤 새벽이 돌아오듯 확고히 준비되어 우리에게 주어진다. 새벽빛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2) 그것은 마른땅에 단비 같았다. 그는 벤 풀에 내리는 비 같을 것이다(시 72:6).했다.
여호와께 힘써 돌아가 여호와를 힘써서 알면 모든 것이 회복되는 줄로 믿는다.
3. 한국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추구해야 할 참된 광복은 무엇이겠는가?
민족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다. 서울 한 복판에서 천진난만하게 뛰어놀던 어린아이 하나가 자동차에 치었다. 운전사는 피를 줄줄 흘리는 어린아이를 가슴에 안고 한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너무 위독하여 치료 가운데 어떻게 잘못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 부모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싸인을 받을 수 없어 치료를 거부하고 말았다. 운전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달려가 보았지만 거절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이 어린 소녀는 운전사의 품에 안긴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후에 조사를 해 보았더니 이 어린아이는 맨 처음에 치료를 거부했던 병원의 원장 딸이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나라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 이웃의 문제, 그것은 곧 내 문제다. 내가 버린 나라, 내가 버린 이웃,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 오늘은 해방 66주년을 맞는 조국광복 감사주일이다. 이웃 국가에 아픔을 주지도 말아야 하지만 다시는 내 조국을 빼앗기지도 말아야 한다. 내 나라를 망하게 했던 잘못을 되돌아보고 회개하는 시간이다. 무엇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가?
간디는 「망국론」이라는 책에서 일곱 가지 요인을 들었다. ① 원칙 없는 정치 ② 도덕 없는 상업 ③ 노동 없는 부 ④ 인격 없는 교육 ⑤ 인간성 없는 과학 ⑥ 양심 없는 쾌락 ⑦ 희생 없는 신앙이다. 90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상황을 예언하고 있는 듯 하지 않은가? 지도자들이 무능해도, 백성들이 타락해도 나라는 망한다. 기독교엔 국경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겐 조국이 있다. 모든 애국자가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애국자다. 다시 말하면 21 세기의 한국 교회와 신자들이 추구해야 할 광복의 의미는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반성해야 하겠다.
첫째는 힘을 합해야 한다.
미국 중부에서 있었던 옛날의 사건이 떠오른다. 대단위 옥수수 농장을 경영하는 부부 가 어느 날 잠깐 집을 비운 사이 외아들「죤」군이 옥수수 밭으로 들어갔다가 길을 잃었다. 죤의 나이 그 때 네 살이었다. 집에 돌아온 부부가 죤의 실종 사실을 알고 찾아 나섰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해가 저물고 농장엔 어둠이 깔렸다. 당황한 부부는 경찰에 신고를 했고 경찰과 소방대원 그리고 자원봉사자들 30여명이 횃불을 켜든 채 밤을 새우며 찾았으나 죤을 찾을 수 없었다.
사흘째 되는 날 경찰과 소방대원 지역주민 그리고 이웃도시에서 동원된 학생 300여명이 일렬로 서서 손을 잡고 옥수수 밭을 가로지르며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해질 무렵 싸늘하게 식은 죤의 시체를 옥수수 밭 가운데서 발견했다. 그 다음날 그 지방 조간신문이 이 사건을 머리기사로 다뤘다. 그 머리기사 제목은 "너무 늦었다"였고 부제는 "우리가 조금 더 일찍 손을 잡았더라면"이라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의 위기는 4천만 민족이 손을 잡아도 그 극복의 시한이 불투명한 정황에 처 해 있다. 더 이상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와 공명주의가 판을 쳐서는 안될 절벽에 서 있다. 더 이상 늦으면 안 된다. 당리도 당략도 지역이기주의도 개인주의도 유보해야 한다. 민족공동체의 싸늘한 시체를 만지기 전에 빨리 손을 잡아야 한다.
둘째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이 돌아오는 행위를 회개라고 말한다.
결 론
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일본이 어떻게 나올까 하는 게 관심사다. 당연이 일본의 철저한 사죄가 있어야 하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자세다. 광복절을 맞이할 때마다, 특별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라의 안위는 개인의 행복과 직결된다. 나라를 잃고 일제의 압제 하에서 백성 개개인이 당한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 개인이 아무리 잘 났어도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기에 우리 각자도 광복절을 맞이하여 특별한 반성과 다짐이 있어야 한다. 고사성어 가운데 중국 고사와 관련된 이런 것이 있다. "와신상담(臥薪嘗膽)." 단단한 장작 위에 누워서 쓰디쓴 쓸개를 맛본다,는 뜻이다.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온갖 고난을 감내하는 것, 원수를 갚기 위해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에 비유하는 말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월 왕 구천과 싸워 크게 패한 오왕 합려는 적의 화살에 부상한 손가락의 상처가 악화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임종 때 합려는 태자인 부차에게 반드시 구천을 쳐서 원수를 갚으라고 유명했다. 오왕이 된 부차는 부왕의 유명을 잊지 않으려고 장작을 더미로 쌓아놓고 매일같이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잔다. 그리고서는 신하들에게, 장작더미 옆을 지나갈 때마다 "부차 왕이시여, 선왕의 원수 갚는 것을 잊으셨나이까?" 하고 한 마디씩 하게 했다.
매일 밤을 그렇게 지냈다고 한다. 이처럼 밤낮 없이 복수를 맹세한 부차는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면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 사실을 안 월 왕 구천은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월 나라 군사는 복수심에 불타는 오 나라 군사에 대패하여 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갔다. 오 나라 군사가 포위하자 진퇴양난에 빠진 구천은 범려의 헌책에 따라 우선 오 나라의 재상(宰相) 백비 에게 많은 뇌물을 준 뒤 부차에게 신하(臣下)가 되겠다며 항복을 청원했다.
이때 오 나라의 중신 오자서가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 구천을 쳐야 한다’고 간했으나 부차는 백비의 진언에 따라 구천의 청원을 받아들이고 귀국까지 허락했다. 구천은 속국이 되고, 모욕을 받고 돌아온 월나라 왕 구차가 돌아와서 다시 이를 간다. 어떻게 하면, 나도 이 패전과 항복에 대한 복수를 할까. 그래서 쓸개 하나를 구해 다가 자기 방문 위에 달아놓고, 방에 들어가면서 쓸개 한 번 핥고, 나올 때 핥았다. 얼마나 쓰겠는가? 치욕을 상기했다.
그리고 부부가 함께 밭 갈고 길쌈하는 농군이 되어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며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이로부터 20년이 흐른 뒷날 월 나라 왕 구천이 오를 쳐 이겨 오 왕 부차를 굴복시키고 마침내 회계의 굴욕을 씻었다. 부차는 용동에서 여생을 보내라는 구천의 호의를 사양하고 자결했다. 이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목표를 향해서 와신상담할 수 있지만, 우리가 세운 목표가 이렇게 보복과 좌절로 끝난다고 하면, 와신은 무슨 의미가 있고 상담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 민족적 위기와 아픔 속에서 회복해야 할 과제가 있다면 바로 공동체 의식이다.
한국에서 26년 동안 살아온 일본인 「이케하라 마모루」라는 사람이 오래 전 재미있는 책을 한 권 냈다.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이란 책이다. 언젠가 그가 방송에 나와 '나 밖에 모르는 한국인'이라는 프로그램 타이틀로 서스럼 없이 한국인을 비판했다. "한국 사람은 영리하고 똑똑한데 자기 밖에 모른다. 일본 사람은 아무리 자기에게 개인적으로 이익이 되어도 나라에 손해가 되면 그 짓을 안 한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나라야 망하든 말든 자기 개인에게 유익이 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얘기인가?
그의 책 가운데 10년 전에 일본과 한국이 20년쯤 차이가 났는데, 지금은 100년도 더 차이가 난다고 얘기했다. 경제가 1만 달러면 무엇 하는가? 의식이 100달러도 되지 않는 민족이라고 혹평을 거침없이 토해냈다. 독도가 문제가 아니다.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길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일본에서는 물건을 어디서든지 잃어버리면 99.9%는 돌아온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그 반대로 99.9%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제는 저들보다 더 정직하고 저들보다 더 근면하고 저들보다 더 진실하지 아니하면 일본을 이길 수가 없다. 그러면서 던지는 조언이 있다.
정치가들은 이제 파당적 이기주의를 버리시오. 경제인들은 정직하게 벌어 정직하게 나누시오. 종교가들은 이 시대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시오. 학생들은 두 주먹 불끈 쥐고 내일을 준비하시오. 노동자들은 한푼 더 받겠다고 싸우지 말고 양질의 제품을 만드시오. 공무원들은 애국심 애민 심을 키우시오!
우리는 지금 나라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던 죄를 회개해야 한다.
지금까지 나라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고 내 일만 하고 편안히 누워 있는 것만을 즐겼더라면 우리는 분명 이렇게 생각하시면 틀림이 없다. "아, 내가 나라를 망치고 있구나!"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해서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가 조금 어렵다고 민족이 망하지는 않는다. 사업이 조금 안 된다고 굶어 죽지 않는다.
문제는 나라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 역사의 문을 닫으신다. 그 날이 바로 이 민족이 망하는 날이다.
일찍이 나라사랑에 생애를 바쳤던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일본이 아니요 이완용도 아니요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요. 내가 왜 일본으로 하여금 내 조국 안방을 차지하게 하였으며, 이완용으로 하여금 조국을 팔도록 내 버려 두었소? 그러므로 망국의 책임자는 곧 나 자신이요. 자손은 조상을 원망하고, 후진은 선배를 원망하고 민족 불행의 책임을 자기 이외로 돌리려 하니, 왜 남만 책망하시오?
우리나라가 독립이 못되는 것이 아! 다 나 때문이로구나!하고 가슴 두드리며 뉘우칠 생각은 왜 못하고, 어찌하여 그 놈이 죽일 놈이요, 저 놈이 죽일 놈이라고만 하시오? 진정 내가 죽일 놈이라고 왜들 깨닫지 못하시오? 그렇다. 바로 나 때문이었다. 내가 새로워지면 나라가 새로워진다. 기도하자! 민족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기도하자! 일이 다급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도하자! 내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위기나 민족적인 문제 상황 속에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자명한 결론 아니겠는가?
기도만이 이 민족을 구원한다. 기도만이 문제를 해결한다. 기도하는 민족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의 사명도, 우리의 기도제목도 여기에 있다.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오 주님, 이제 내 민족을 주소서.
내 민족을 당신의 백성 삼으소서! 당신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일제치하의 시인 심훈은 ?독립이 오면 내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고 축하 행렬에 앞장서리라?고 했다.
오늘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새롭게 일기를 바란다.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해야 할 때다.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 설교인 "일사각오"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신사참배로 무너져 가는 평양 성을 향해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 세대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꾸나" 외쳤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로 강도의 소굴처럼 되어갈 때, 주기철 목사님의 "오 평양아, 모란봉아 통곡하자"하던 순교자의 눈물어린 외침대로 우리 민족은 울고, 또 울어야만 한다.
일본이란 나라는 독일과는 전혀 다른 나라다. 독일은 2차 대전의 전범으로 인정하고 철저히 잘못을 반성하며, 유태인들을 학살한 책임을 지려고 하였다. 그런데 일본은 한일합방은 당연한 것으로 남겨두려고 고집하고 있다. 역사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나 있다. 역사 그 자체를 만드시는 하나님을 제외하고서는 역사의 바른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역사를 만들고 역사를 진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기념하여 유월절 절기를 지키듯이 우리도 8.15 해방을 기념하여 광복절(光復節)을 지키자. 이날이 기념할 만한 날인 이유는 일본인들의 끔찍한 만행을 종식시키고 자유를 찾은 날이기 때문이다.
8.15 해방이 준 신앙적 교훈은 우리에게 두 가지 반성을 준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교훈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과 불의는 반드시 망한다는 교훈이다. 이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다. 믿건 아니 믿건, 신앙을 가지고 살건, 자의지대로 살건 간에, 교만해지면 꺼꾸러지고, 불의와 거짓은 결국 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이든, 나라이든, 단체이든, 정당이든, 마찬가지다. 교만해지면 꺼꾸러지고, 불의하고 거짓으로 차 있으면 망한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제2차 대전에서 패배한 후 독일인과는 달리 일종의 집단적 정신 치료, 즉 혁명적 의식의 변화를 겪지 않았다. 패전후 일본의 전통적 엘리트와 관료집단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전시의 마지막 정부도 유지됐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에 대해 일본인은 자신들이 실제로 지은 죄보다 더 큰 죄로 심판 받았던 것처럼 항변하고 있다.
니체의 말처럼 우리는 과거를 변경시킬 수 없다. 일본인들은 현재의 시점에서 변경시키려든다. 니체는 그런 과거 지향적 행동을 반작용이라고 불렀다. 그러한 행동은 진실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니체는 그것이 연약함과 원한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니체가 원한이라고 부른 것을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부패라고 규정했다.
정치적으로 부패한 사람들은 과거의 피해에 매달려 그 어떤 만족감보다도 복수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갈망은 이해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분명히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역사의 창조를 위해서는 원한의 열정으로부터 탈출할 것이 요구된다. 일본은 과거로부터의 탈출보다는 과거로의 복귀를 서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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