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성탄절설교]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I. ‘임마누엘’ 언약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A. 임마누엘이란?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엘)이 우리와(마누) 함께 하신다(임)’는 히브리어 임마누엘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는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축복은 아니었다. 이는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은혜이며 특권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되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이방인들에게 있어 ‘임마누엘’이란 메시지는 더없는 축복이며 더할 수 없는 은혜 중에 은혜이다.
이 말은 이사야 선지자가 악한 유다왕 아하스에게 전한 메시지이지만 이 메시지는 그후 700여년 후에 성취되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천사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정혼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예고할 때 전한 메시지이다(마1:23). 천사는 이 소식과 함께 요셉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전하였다(마1:21).
임마누엘이란 하나님 자신의 인격이 내포된 합성어로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뜻으로 곧 ’하나님이시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는 태초이시며 창조자이심을 뜻한다. 사도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이를 소개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은 그의 이름이 아니다. 그의 이름은 ‘예수아’(Yeshua)로서 오늘 우리가 부르는 이름 “예수”는 유태인 이름 "Yeshua" 곧 히브리어 ‘야훼’로서 그 뜻은 ‘구원자’(salvation)이다. 따라서 우리가 부르는 이름은 “예수‘(Yeshua)는 세상을 구원하실 그의 사명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언약은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유혹하여 넘어지게 한 뱀을 향하여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판결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여자의 후손’ 곧 여자의 씨에 대하여 음미할 필요가 있다.
창조로부터 하나님은 사람의 씨를 남자에게 두셨다. 여자는 남자의 정자로부터 씨를 받아 그 후손을 배양할 난자를 갖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씀하신 여자의 후손이란 원초적 질서와는 위배되는 것으로 여자의 후손이란 처녀로서 잉태할 언약의 징조를 통해 태어나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 언약과 관련하여 지금 우리 교회사 속에는 가짜 후손의 이야기가 전래되고 있다. 사단은 다시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 바벨론의 창시자 니무롯의 아내 시머레머스(Simmaramus)가 하늘의 씨를 받아 아들 탐무즈를 나았다고 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 크리스마스의 전래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가짜 그리스도가 세상을 지배할 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고 또한 우리와 함께 계셔 천년왕국을 실현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날이 멀지 않다.
B. 임마누엘 언약의 역사적 상황
임마누엘의 징조의 언약은 유다의 악한 왕 아하스 때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메세지이다. 이는 그의 택하신 백성과 그의 도성을 위하여 악한 아하스의 마음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기인한 것이다.
웃시야의 손자 아하스는 매주 악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스라엘 하나님을 배신하여 이교도들의 여러 신들을 숭배하기 시작했으며 급기야는 몰렉(Molech)에게 바치기 위해 자신의 자녀들을 불 속에 던져 넣었다. 또 그는 성전의 예배를 중단시켰으며 다마스커스를 방문했을 때 앗수르 신전의 거대한 신단을 보고 하나님의 성전 뜰에 그 신단을 본뜬 것을 세웠다. 이러한 그의 죄악은 유대에 파멸과 수치를 가져다 주었다.
어느 시대이고 본질적으로 죄는 항상 파괴적이다. 하나님께서 죄로 규정한 것들은 인간의 삶은 물론 사회를 파괴하는 원형이다. 성경의 역사를 읽다 보면 한 가지 분명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나님을 공경하면 나라가 번성하고 축복 받았고 그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면 적에 의해 정복되거나 파괴되었다. 이처럼 이사야가 아하스 왕 앞에 섰을 때 유다 왕국은 더 이상 피할 길 조차 없는 위기에 처해있었다. 하나님의 권위를 상실한 유다왕국을 향하여 북왕국과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공하기 위해 서로 합의를 했기 때문이다. 아하스 왕과 백성들은 전쟁의 소문에 공포에 떨고 있었다.
C. 임마누엘 언약의 역사적 배경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 왕에게 나아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라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11) 권고하였다. 이는 왕이 악에서 떠나 오직 구원자 여호와 하나님께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나는 구하지 않겠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않겠다”고 거절하였다. 이 말은 그의 마음 속에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 열조의 하나님을 한 장의 종이 호랑이같이 여기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사람과 세상의 방법을 의지하려 한다. 또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말하면서 일반 종교와 심리학에서 기인한 패턴을 놓고 거기에 성구 몇절을 얹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법들을 받아 주실리 만무하다.
이에 이사야 선지자는 “다윗의 집이여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13) 책망하였다. 이사야 선지자가 아하스왕을 책망함에 있어 그 개인의 이름을 칭하지 않고 ‘다윗의 집이여’ 라고 한 것은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 이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하나님은 다윗의 온전한 믿음을 사랑하여 그의 영광의 왕위를 자손에게 물려 주시겠다 약속하셨다. 그런데도 그 언약을 받고 다윗의 위에 앉은 자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을 바라지 않고도 모자라 하나님의 은혜마저 거부한 것이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보내시며 너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나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며 지내서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다(눅10:16).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그의 백성들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다시 품으려 하시는데도 사람들은 완악하여져서 그를 거부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의 말씀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조는 믿음의 왕 히스기야에 의해서 실현되었다. 여기서 징조란 세상의 질서와 방법을 초월한 창조적 방법이다.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의 불신앙을 보고 자랐다. 그러나 그는 선지자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그가 병이 들어 누었을 때 이제 너의 생명이 끊어질 것을 예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 들은 히스기야 왕은 모든 것을 전폐하고 벽을 마주하고 오직 여호와께 기도하여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하며 심히 통곡하였다. 이에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이사야에게 전달되어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내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 갈 것이다” (열하20:5) 말씀하셨다.
이에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말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조가 있나이까” 물으니 이사야가 답하여 “여호와의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이에 대하여 여호와께로서 왕에게 한 징조가 임하리이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가갈 것이니이까 혹 십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열하20:8-10) 물으니 히스기야가 답하여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도가 물러 갈 것이니이다”하였다.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일영표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셨도다” (열하20:10,11)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해시계는 해의 지나감을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해그림자가 뒤로
이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지구의 자전을 멈추고 되로 돌려야 하는 일로서 우리의 말과 같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더우기 해그림자를 10도 뒤로 물리려면 지나간 세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는 태어난 아이도 다시 어미 태로 돌아가야 하고 죽은 사람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 와야만 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역사와 세상이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해를 돌린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시계를 뒤로 돌리는 것과 같이 지구의 자전을 조정할 수 있는 창조자만이 할 수 있다.
D. 애굽의 벌과 앗수르의 벌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사야로 말씀하신 임마누엘의 징조의 성취이다. 이는 그로부터 700여년 후에 성취되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하신 것으로 다시 주의 보내신 자 세례 요한에게 예고되고 주의 제자 마태에 의해서 임마누엘의 징조가 성취되었음이 기록되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임마누엘을 말하여 ‘악과 선을 구별할 때에 미쳐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15) 말하였다. 이는 임마누엘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어린 아이로 성장하실 것을 뜻한다. 우리는 복음서에 의하여 주의 탄생기록을 보게 되며 또 이스라엘 사람으로 오신 주 예수께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를 알고 있다. 이에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시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히2:17) 기록하였다.
계속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그를 증거하여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리라’(16)고 증거하였다. 이 일은 후일 그대로 성취되었다. 아람과 북왕국은 모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증거는 예언의 이중성이 내포되어 있다. 임마누엘은 바로 그 시대에 오신 것이 아니고 앗수르와 바벨론이 망한 후에 오셨기 때문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이사야서 38장에서 앗수르(37장)와 바벨론(38장)으로 번민하고 있는 히스기야 왕을 보게 된다.
이 말씀과 함께 흥미로운 말씀이 소개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 왕에게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지경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18,19) 전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한 애굽의 속성과 앗수르의 목표를 알 수 있다. 애굽은 이스라엘의 몸을 더립힌 민족이지만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이상을 훔치려 했던 족속이다. 이 역사적 싸움은 창세기 10장 니므롯으로부터 이어내려 온 영적전쟁이다. 아직도 앗수르의 벌들은 이스라엘의 꿀에 혈안이 되어 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막8:15) 경계하였다. 이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 속성을 경계하신 것이다. 이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더럽히는 요소 곧 형식적인 종교의식과 교회의 물질만능시대의 도래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들에게 임할 재앙을 말하여 ‘세 내어 온 삭도’(앗수르 왕)로 머리털과 발털과 수염을 깎으실 것(대하28:20,21)이라 하였으며 ‘은 일천개 가치되는 포도나무 있던 곳은 질려와 형극이 날 것’(23,24) 경고하였다. 이는 종교적 패권주의 폐쇄를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조를 고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의 메시지가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남아 있는 자는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며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칠 것이라 하였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패권적 종교생활이 아닌 각 사람의 신앙생활로 충족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을 뜻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단적 배경 속에서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종교활동에 빠져 있다. 그러나 오직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는 적은 무리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영적 축복과 평안을 누리고 있다. 나는 임마누엘의 진정한 복이 여기에 있음을 믿는다. 아멘!
II. 첫번째 징조 ‘스알야숩’ - ‘남은 자가 돌아 오리라’(사7:2)
(사8:18)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A. 약속의 의미
남은 자가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종말론적인 메시지이다. 이사야서에서 이 메시지는 여러 번 소개 되고 있으며 바울도 동족 유대인의 구원의 문제를 심도 깊게 다르면서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롬9:27,28) 기록하였다.
오늘 우리는 이 메시지에 대한 출발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사야 선지자는 나는 야곱에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는 선언과 함께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사8:18)고 증거하였다.
징조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세상의 어떤 질서와 방법으로 이룰 수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이적과 표적을 뜻하며 예표란 앞으로 일어날 징조에 대해 미리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두 아들로 말씀하신 것이 장차 이스라엘 중에 나타날 하나님의 징조이며 또 먼 훗날 그리스도의 날에 나타날 예표인 것이다.
B. 이스라엘에게 전한 이사야의 말씀
이사야의 첫 아들은 이사야서 7장 3절에 나온다. 하나님은 아람과 북이스라엘 왕국이 동맹을 맺어 유다를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으로 두려움에 떠는 아하스와 유다 백성들을 권고하기 위하여 이사야 선지자에게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말며 낙심치 말라”(3,4) 하셨다.
여기서 언급된 큰 아들 이름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 오리라’라는 뜻이다. 왜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 모르지만 주께서 둘째 아들 이름을 예시하셨듯이 첫 아들의 이름도 예시하셨을 것이라 생각된다. ‘남은 자가 돌아 오리라’는 뜻은 종말론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미 이사야는 주로부터 새로운 소명을 받았을 때 성읍이 황폐해지고 사람들이 여호와 앞에 옮기워지며 십분의 일이 남아 있을지라도 그것도 삼키움을 당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받았다(사7장). 그러므로 그는 장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며 그 일들을 음미하며 자신의 소명을 따라 기도했을 것이다.
‘스알야숩’ 곧 ‘남은 자가 돌아 오리라’는 메시지는 이 메시지가 전달 된 날로부터 그리스도꼐서 이 땅에 오셔서 통치를 하실 때까지 지속적으로 성취될 이스라엘의 숙명이다. 다시 말하여 돌고 도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중 오직 그의 뜻대로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은 모두 믿음의 조상을 따라 본향에 이르게 될 것이다.
주께서 이사야로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큰 밭길에 나가서 아하스 왕을 맞으라는 말은 아하스 왕이 그 곳에 이를 것을 언급한 것이다. 아하스 왕은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동맹군이 쳐들어 오면 제일먼저 도성의 안전을 도모해야 했다. 난공불락인 예루살렘이야 쉽게 무너지지 않겠지만 문제는 예루살렘으로 이끌어 들이는 식수에 있었다.
여기서 언급된 윗 못 저수지는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샘으로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정착하기 전부터 물을 공급해 주던 식수 근원지였다(삼하5:8) 열왕기하 20장 20절을 보면 아하스 아들 히스기야 왕이 대대적으로 수로공사를 하여 기혼샘의 물을 지하수로를 통하여 실로암 못으로 끌어 들이는 공사를 하였다. 이처럼 아하스 왕은 들리는 전쟁 소문에 기겁을 하여 어떻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아람 왕과 북왕국 르말리야의 아들 베가가 꾀를 내어 유다를 치쳐 무너 뜨리고 다브넬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자고 계획을 세웠으나 이들의 도모가 이루지 못할 것이라’ 하시며 다시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라도 육십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할지니라”(8,9) 말씀하셨다.
이 말은 매우 복잡한 것 같으나 아주 간단한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다메섹은 아람왕국의 도성이며 사마리아는 북왕국의 수도이다. 이 왕국을 통치하는 자들은 아람왕 르신과 북왕국의 르말리야의 아들이니 그들의 힘이 사람에게 있고 그들의 왕국은 인간이 세운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며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누가 무너뜨릴 수 있겠는냐는 말씀이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영적 원리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면 정녕 무너질 것이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더 이상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하지 말고 오직 주 여호와 하나님께 구원을 바라라는 말씀이다.
C. 아하스 왕의 선택
그러나 안타갑께도 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전하신 말씀을 듣지 않고 결국 앗수르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또한 그는 성전에 보물창고의 돈을 앗수르 왕에게 주아 시리아에 대항하기 위해 앗수르 군대를 징용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후일 북왕국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게 되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도움에 관심도 없다는 것을 뜻한 것이다. 어쩌면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했을 때 한편으로 하나님께 의무를 져야 될 지 모른다고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게 된 것은 평소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보다는 육신의 쾌락과 명예를 쫓는데 몰두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파괴되기를 택한 것이다. 아하스 왕은 국가적 큰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의 말씀의 권고를 받아 자신의 삶을 변화하기 보다 자신의 생각을 선택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에이즈병과 관련하여 동성애자들 사회에서도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은 에이즈는 동성애자들에게 옮겨지는 저주의 병이 아니라고 변명하며 콤돔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즐기도록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욕정으로 이들을 공격하는 죽음의 바이러스는 콤돔을 뚫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 많은 크리스챤들도 어떤 문제를 만나면 세상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특히 마약, 알코올 중독, 성중독 그리고 동성애로 극한 우울증에 빠지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병원이나 전문상담자를 찾아가고 있다. 교회에서도 그렇게 권고하고 있다.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자백하고 죄로 인하여 발생된 문제의 해결방법을 구해야지 이 죄의 문제를 세상의 방법으로 해결한다면 그는 더 깊은 죄에 얽혀 빠지게 될 것이다.
이에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책망하였다. 결국 아하스 왕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여 마른 풀이 불 속으로 떨어짐 같이 뿌리가 썩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듯이 흩어지고 말았다(사5:24).
III. 두번째 징조: ‘마할살랄하스바스’ – ‘급속한 약탈’(사8장)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8:16)
A. 이스라엘과 유다의 황폐(1-8)
이제 이사야의 두번째 아들로 말씀하신 여호와의 징조를 살펴 보자. 주님은 이사야에게 “너는 큰 서판을 취하여 그 위에 통용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가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거하게 하리라”(1,2) 하셨다.
여기서 언급된 큰 서판이란 글을 쓰는 두루마리를 뜻한다. 그런데 겨우 마할살랄하스바스라는 단어를 쓰기 위해 큰 서판을 취하라고 하신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이는 필경 마할살렐하스바스에 담긴 내용이 역사와 시간과 내용에 있어 방대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뜻한다.
주님은 이사야가 아들을 낳자 서판에 쓴 마할살렐하스바스라 이름을 지으라 하셨다. 마할살렐하스바스란 ‘급속한 약탈’을 뜻한다. 이는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할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긴바 될 것임이라’’(4)하신 말씀처럼 이사야의 아들의 때에 급속하게 일어날 일로서 다메섹(아람)과 사마리아(북왕국)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할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장차 이스라엘 아들들의 역사 속에 전개될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가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거하게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사실 기록을 보면 그 당시 제사장 우리야는 진실된 증인이 아니다. 그는 아하스의 명을 받아 성전에 앗수르 제단을 만들어 성전을 모독하고 우상숭배를 한 제사장이다(왕하16:10-16). 그러므로 진실한 제사장이란 어쩔 수 없이 시대적 상황과 세상 풍속에 이끌릴 수 밖에 없는 종교지도자들을 반어법으로 서술한 것이라 하겠다.
이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스라엘과 유다에 임할 일들을 말씀하여 “이 백성이 천천히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곬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흘러 유다에 들어 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6-8) 하셨다.
실로아란 실로암 샘물을 뜻하며 이는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발라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셨다. 이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 오랜 역사 속에서 증거 된 택하신 백성의 고통을 씻어 주신 생명의 말씀을 좇지 않고 눈 앞에 보이는 쉬운 방법에 급급하여 외세의 힘을 빌어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므로 그들의 위세가 물밀듯이 밀려들어 이스라엘을 잠식하고 그 물이 유다에까지 창일할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때가 되면 임마누엘의 날개가 편만하리라 하셨다.
창세기 1장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서 운행하시니라’ 기록되었다. 인생들은 어둡고 고통의 삶이 몰려 오면 그때서야 생명의 주 여호와를 찾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민족들이 전쟁으로 망한 후에야 그 마음을 새롭게 하여 황폐한 땅을 다시 일구고 번영의 기틀을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임마누엘 하나님은 항상 그를 부르는 사람들 속에서 함께 하신다.
B. 이스라엘의 각성을 위한 메시지(9-15)
이제 이사야 선지자는 이 땅에 있는 민족들을 향해서 선언하여 “너희 민족들아 훤화하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먼나라 백성들아 들을 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 띠를 띠리 필경 패망하리라”(9) 하였다. 이는 모든 민족이 서로 연합하고 동맹하여 패권주의를 펼칠 것을 예고한 것이다.
이미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고 각 나라들은 서로 띠를 띠고 그로벌 체재로 돌입하고 있다. 유럽연합이 그것이고 이슬람국가들이 연합하고 이제 곧 러시아가 그를 따르는 국가들을 연합할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 ‘너희는 함께 도모하지만 필경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내어라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니라’(10) 선언하였다.
계속하여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게 하시며 이 백성의 길로 행치 말 것을 내게 경성시켜 가라사대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11-12) 경계하였다. 이는 장차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이방에 사로잡혀 살게 될 때 그 백성들의 풍속에 빠지지 말고 깨어 있을 것을 요구한 것이다. 또한 그들이 모두 연합하였다 하더라도 너희는 그들을 선동한 말들에게 휘말리지 말라 한 것이다.
성경은 종말을 사는 우리에게 “우리 주 예수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것이라” (살후2:1,2) 경고하였다. 이로서 종말의 날에 역사할 맹약의 소문이 어떠할 것을 알 수 있다.
주를 믿는 자들의 커다란 실책은 주의 존재에 대한 무지이다. 사람들은 머리로는 주를 믿는다 하면서도 실제로 문제가 발생하면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성경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를 택하신 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심을 망각하고 외세에 두려워하며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 더 강한 나라의 힘을 빌렸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다시 “만군의 여호와 그를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13) 경고하셨다. 거룩이란 신성을 뜻한다. 이것은 인간이 미치지 못하는 신의 성품이며 신의 속성이다. 세상은 그의 거룩하심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며 그의 영화로움에 동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거룩하심과 그의 임재하심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의 광대하심과 능력에 놀라고 굴복하게 된다. 다니엘과 사도 요한은 주의 거룩하심을 보고 자신의 몸이 썩은 듯하고 온 몸의 기운이 빠지는 것을 체험하였다.
예수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장차 다가 올 환난을 경계하시며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10:28) 하셨다. 우리가 이 말씀에 거하면 우리가 두려워할 자가 누구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이사야는 계속하여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이 그로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14,15) 선언하였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미 복음서를 통해서 보고 있는 사실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보고도 그를 믿지 못하였으며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목수의 아들 예수로 인하여 실족하고 넘어졌다. 주님은 이 일들을 이사야를 통해서 미리 하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나간 성경적 증거를 받고 있는 우리의 믿음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 중에 다시 넘어질 무리들로 인하여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 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딛혔느니라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9:32,33) 증거하였다. 이는 지나간 역사를 거론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빙자하여 종말의 때를 맞은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경성하기 위한 것이다.
이사야는 후일 다시 우리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며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28:16) 증거하였다. 누구든지 이 돌의 귀함을 깨달아 스스로 돌 위에 깨어지면 복을 받고 걸려 넘어지면 영원히 실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도 경계하여 “사람에게는 버린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와 너희도 산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4,5) 하였다.
IV. 종말의 지혜 (16-22)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16)
A. 이스라엘의 징조와 예표(16-22)
이제 흥미로운 말씀이 소개되고 있다. 주께서 이사야에게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16) 명하셨다. 이것은 이미 위에서 언급하신 증거의 메시지를 그의 교회에 세워질 제자들 중에 봉함해 두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여 지금은 이 말씀을 알 수 없고 주의 때에 그의 복음을 전파할 제자들에게 이 말씀이 펼쳐질 것이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언의 이중성을 언급하신 것으로 미리하신 증거의 말씀들은 그리스도의 날까지 봉함되어 전달될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가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17)하였다. 그는 주의 뜻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미 그의 죄가 사하였고 거룩한 자의 소명을 받아 백성들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다니엘에게도 주어진 바 있다. 천사는 다니엘에게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12:4) 증거하였다. 흥미롭게도 이 봉함들은 모두 계시록에서 떼어진다. 예수께서 봉해진 일곱인을 떼셨고 제자들 중에 봉함되었던 일들이 모두 현실로 나타났다. (계5:1) 또한 사도요한은 계시록의 마지막 장에서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계22:10)는 메시지를 받는다.
이로서 주의 거룩하신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하실 이 때에는 앞에서 봉해진 모든 것들을 모두 알 수 있을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사도 요한도 종말의 때에 어떤 일들에 대한 메시지를 듣고 이를 기록하려 하였을 때 천사가 말하여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계10:4)는 계시를 받았다. 아마 이것은 우리가 모두 천년왕국에 이르러 전달될 말씀인지도 모른다.
B. 종말의 경고
이사야는 종말을 사는 우리를 향하여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이 거할 것이 아니냐 산자를 위하여 죽은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19) 하였다. 이는 이미 우리가 눈으로 목도하고 귀로 듣고 있는 바이다. 이미 불법이 시작되었고 믿는 자들 중에 많은 무리가 진리의 말씀을 멀리하고 거짓 선지자들의 지절거리는 말과 사단의 유혹에 빠졌다.
최근 나는 어느 성도로부터 큰믿음교회에 관하여 질문을 받았다. 그들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마치 그들은 예언자 교회인 것처럼 말하고 자기들만이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처럼 말한다. 그들은 예언자 학교를 세우고 또 사도학교를 세워서 자기들 교회가 이 종말의 시대를 구원할 사도적 교회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예언자 학교의 교감이란 여자는 과거 이 장림 목사가 이끌던 다미 선교회에서 예언을 주도한 여인이다. 그런데도 문제는 연일 수천명이 그들의 집회에 손을 들고 울부짖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내 백성이 무지하여 망한다 하였다.
이미 바울이 증거하여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라”(살후2:9,10) 기록하였다. 나는 우리 교회 중에서 이러한 모습을 보는 것이 정말 가슴 아프다. 주여 속히 이 땅에 임하소서!
그들을 향하여 성경은 단호하게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을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라 이것이 둘째 사랑이라” (계21:8) 기록하였고 또 “개들과 술객들(술객:magec)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계22:15) 기록하였다. 나는 이 말씀대로 될 것을 믿는다.
계속하여 이사야는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메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20) 하였다. 이들에 대하여 계시록 기자는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과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계9:20) 기록하였다.
얼마 전에 동성애 성향을 극복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 온 형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 형제는 어느 때고 성경의 가르침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성경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의 정체성에 대하여 의문을 품으며 지내쳐 갈보리채플의 정통성에 대하여까지 의심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문제가 나를 통하여 해결되기를 바라며 면전에서는 겸손과 진실됨의 표정을 짓는다. 과연 나는 이 형제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심히 두렵다. 성경이 이미 개가 토한 것을 먹고 돼지가 씻은 후 더러운 곳에 누웠다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더욱 악한 것은 그들이 곤고하고 주릴 때에 더욱 격분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굽어 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 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 가리라”(21,22) 기록되었다. 이것으로 우리는 종말의 때에 배도한 무리들이 얼마나 악한 마음에 빠질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 ‘내가 다시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것이다. 이제 이 메시지를 읽는 당신은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인생이 일장춘몽일진대 무엇을 위하여 살아 갈 것인가? 주여 나와 우리 집은 오직 주를 바라며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겠나이다. 아멘 아멘! (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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