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주신 평화의 선물 (누가복음 2:1-14) [성탄절설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탄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 사이에 태어난 세 명의 천재들 덕분에 온 인류는 큰 혜택을 입고 또 많은 변화를 맛보았다는 기사를 어느 신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세 명의 천재들은 심리학자 프로이드와 화가 피카소,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이 기사를 보면서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탁월한 천재들이었기 때문에 20세기 과학과 문화 예술을 주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00여년 전에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전 인류가 어떠한 혜택과 축복을 누리게 되었는가를 누가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이를 다 끌어 모아 놓아도 그 내용을 다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개인이 받은 간증과 개인이 받은 은혜들을 다 기록하려 한다면 종이가 모자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에 싸여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우리 인류가 어떤 놀라운 축복과 은총을 입었는지 잘 모르고 있고, 알고 있다 해도 말하는 것을 꺼리고 있습니다. 신문 한 모퉁이에라도 거기에 대해 감사하다고 쓰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라고 묘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무슨 용기가 필요합니까? 용기라는 덕목은 하나님에게는 해당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아니 하나님 자신이 처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 세상에 오신 이야기를 성경에서 읽을 때면, '아무리 광대하고 크신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용기 없이는 그렇게 하시기가 참 어려웠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필립 얀시라고 하는 탁월한 저술가가 현대 의학의 지식을 빌려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설명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작아지시고 작아지시고 또 작아져서 마침내는 하나의 난세포가 되기까지 작아지는 형태로 오셨다.' 다시 설명을 하면 육안으로서는 식별이 불가능한 수정란이 불안에 떨고 있는 10대 소녀 마리아의 태 중에서, 태아가 형성되기까지 세포 분열을 계속해서 커져 가야 될 난세포가 되어 세상에 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좀 심한 표현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탄생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전혀 과장된 말도 아니고, 지나친 상상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작아지실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런 모습으로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오실 수가 있었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그가 탄생할 때에 유대 나라에 있는 왕과 모든 귀족들이 정장을 하고 서서 무슨 환영 축제를 했습니까? 팡파레를 불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많은 시민들이 와서 축하를 드리기를 했습니까? 아무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마구간에 있는 짐승 몇 마리와 천사들의 말을 듣고 달려온 가난하고 천한 몇 명의 목자들 외에는 하나님이 그토록 작아지셔서, 그토록 낮아지셔서 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놀라는 사람도 없었고, 영접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가 얼마 전에 미국을 방문할 때였습니다. 그의 행차를 놓고 많은 언론들이 호들갑을 떨며 경쟁하듯이 여왕의 의전품 목록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행사 때마다 2벌씩 갈아입을 옷을 가져갔고, 누가 죽었을 때를 대비해서 상복까지 가지고 갔으며 왕이 병이 들면 급하게 쓰려고 19l짜리 혈장액을 들고 가고, 또 화장실에 들어가서 아무 변기에나 앉다가 세균에 오염될까 두려워서 변기 깔개까지 들고 간 것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 다 챙기다 보니 짐만 해도 2000kg이 넘었고, 게다가 전속 미용사 두 사람에 경호원과 수행원을 수십 명씩 데리고 갔습니다. 이 여행에 들어간 경비가 우리 돈으로 무려 26억원이나 되었습니다. 여왕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마다 유명하다는 사람은 다 모여서 그를 영접하느라고, 또 언론사들은 그 사실을 보도하느라고 이만저만 요란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영국이라는 나라는 먼지보다도 더 작을 것입니다. 제 방에는 밀키웨이 즉, 천문학자들이 발견했다고 하는 은하계를 그린 지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펴놓고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태양계는 그야말로 모래알보다 작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태양계 중에서도 아주 작은 별 중에 하나인 지구, 그 중에서도 아주 작은 나라 중에 하나인 영국이라는 나라의 여왕이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데도 그렇게 요란을 떠는데, 하나님의 아들, 그 크신 분이 오신 것에는 누구 하나 주목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이처럼 비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가운데 14절이 바로 그 해답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평화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오셨습니다. 샬롬이요 에이레, 우리 나라 말로 화평이요, 화목을 주시기 위해 주님이 오셨습니다. 본문 바로 위에 있는 1장 79절을 보면,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6개월 먼저 세상에 보냄을 받았던 세례 요한의 아버지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한 말씀 가운데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나님이 그토록 작아지시고 낮아지셔서 이 세상에 꼭 오셔야 될 이유, 그것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수 천년 전에 이사야는 장차 이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면서 평강의 왕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평화의 왕이라고.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성경적으로 표현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 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없는 우리의 현주소가 무엇인가 잘 아실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1절에서 명료하고 간단하게 우리의 현주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 이것이 우리 모두의 현주소였습니다.
여러분, 어린 아들이 아버지와 원수가 되어 어떻게 하루인들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신하가 임금과 원수가 되어서 어떻게 하룻밤인들 베개를 높이 하고 지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물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는 인간이 어떻게 하루인들 마음 편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잠을 자는 것이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웃고 떠드는 것이지, 만일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되어 하나님 앞에 자기의 현주소가 얼마나 저주스러운가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한 사람도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사는 그 자체가 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이와 같은 저주스러운 처지를 보다 못한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인간과 화해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평화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때는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한 세대를 완전히 불로 심판하시면서 다시는 인간이 하나님을 함부로 거역하고 범죄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셨습니다. 또 어떤 때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악하고 음란하고 더러운 성을 본보기로 심판하시면서 남아있는 이 지구상의 사람들에게 경고하시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의 이와 같은 화해의 몸짓에 눈을 돌리는 자가 없었습니다.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생각다 못한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중대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내가 직접 내려가 보아야 하겠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것도 다수에 해당하는 평민의 모습으로, 다수에 해당하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친히 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직접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수 된 인간과 화목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신학자가 평범한 이야기를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설명한 글을 보았습니다.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면서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이 크게 다투고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일년 동안 그들은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정을 쌓는 데는 수 십년이지만 그 우정의 탑을 발로 차 버리는 것은 1분이면 족하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한번 틀어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이 우정입니다. 1년이 넘도록 서로가 상종을 하지 않고 지냈는데 그 두 사람 중에 하나가 아마 교회를 다녔나 봅니다. 어느 날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는데 마음에 가책이 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지 못해서 되겠는가?' 집으로 돌아간 후 그 옛날 친구와 다시 좋은 관계로 회복되기 위해서 노력을 무척 많이 했습니다. 편지를 5통이나 보냈는데도 그 친구에게는 일언반구 반응이 없었습니다. 고민하다 못해서 이 사람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느 날 밤, 도무지 그날 밤을 그대로 넘기면 안될 것 같아 눈을 맞으며 꽤 멀리 떨어진 친구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문을 두드렸습니다. 안에 있던 친구가 문을 열어 보니 자기 친구가 눈을 소복이 맞고 오들오들 떨면서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급히 그를 집안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 두 사람이 다시 우정을 회복하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너무 낮아진 자리에서 자기와 평화하기 위해서 찾아왔기 때문에, 그 앞에 녹아지지 아니할 사람의 마음은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고 사람의 모습, 그것도 천한 사람의 모습을 입고 마구간에 탄생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바로 눈을 맞고 떨면서 문 밖에 서서 벨을 누르는 친구의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은 그 이상이다. 이건 비유가 안된다.'고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무엇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까? 원수 된 우리가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가게 되는 것이 예수님이 주신 평화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만 나가면 모든 허물과 죄를 순식간에 용서받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드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 우리 모두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면서 예배하고 있는데 이런 축복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무나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사랑의교회에서는 1년에 한 400건 정도 장례가 납니다. 400건이면 매일 한 건 이상 난다는 말이 아닙니까? 엄청나게 많습니다. 교회가 크다 보니 그런 십자가도 져야 됩니다. 물론 그 중에 대부분은 연로하신 부모님들이 세상을 떠나는 장례입니다. 복되고 영광스러운 죽음도 많이 있지만, 가슴 아픈 장례도 있습니다. 자녀가 먼저 예수 믿고 주님을 만난 뒤 이 구원의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예수 믿도록 해야지.'라고 생각하고는 수년 동안 부모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어떤 때는 직접 찾아가서 꼭 예수 믿으라고 눈물로 전하기도 하고, 대각성 전도 집회 때는 초대해서 복음을 듣게 하는 등 온갖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안 믿고 계속 미루기만 하시더니 어느 날 갑자기 그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을 하나님과 다시 손잡고 화목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면 온 인류가 하나도 빠짐 없이 하나님과 평화하는 은혜의 길이 열릴 것도 같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만이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있습니까?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드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이유가 없는데, 그만한 구실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잘 보셨습니다. 우리만 보시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무조건 자기와 화목하시고 자기 품에 안으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라고 언제든지 부를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은 우리와 이세상 끝날까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얼마나 둘 사이가 가까워졌는지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이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마.'라고 약속하시게 되었습니다. 한순간도 나를 혼자 떼어놓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31절 이하에 바울이 너무나 흥분하고 너무나 황홀해서 소리친 그 말씀이 정말로 우리 마음에 그대로 와 닿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무슨 말하리요?' 다시 말하면, 말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나 같은 것을 어찌해서 하나님이 만세 전에 미리 아시고, 나 같은 것을 예정하시고, 나 같은 것을 때가 되자 부르시고, 부르신 다음에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주신 다음에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화롭게 하셨는가? 이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는데, 이 일에 대해서 무슨 말이 필요한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셨고, 우리와 평화 하셨는데 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누가 그 사실을 부인하겠는가?'라는 뜻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롬8:32) 의롭다 하시는 이는 누굽니까?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받으시고 우리와 평화하신 하나님인데 누가 우리를 보고 이러니 저러니 말하겠는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깰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평화를 흔들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평화를 주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만큼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없습니다.
천사가 목자들을 만나 한 이야기는 '이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눅2:10)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는데, 왜 기쁩니까? 왜 좋은 소식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하게 하시는 평화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는 세상의 암흑과 혼돈 속에서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찬송가 469장을 여러분은 다 잘 아실 것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은혜스럽게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저 혼자 불러도 1시간이라도 부를 수 있는 찬송가입니다.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 남은 주의 축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얼마나 우리 예수님이 좋은지요. 우리 중에 아직도 믿음이 없어서 이 평화의 주님을 마음에 모시지 못하고 있는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 용서 받고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를 청산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아직 잘 몰라서 이 평화를 소유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십시오. 그분 앞에 더 가까이 나가서 그의 영광을 보십시오.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너무 무거워 이 평화를 잃어버리고 있는 자가 있습니까?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의 평화의 왕입니다. 근심, 걱정을 그에게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염려와 근심을 다 책임져 주시는 분이시오, 우리의 인생 길을 인도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이웃과 평화 할 수 있게 하시게 위해서 오셨습니다. 티끌보다 많은 죄, 석탄보다 검은 죄를 예수의 이름으로 씻음 받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 사람은 자기 안에 놀라운 능력이 생기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화해해서 다른 형제와 평화 하고자 하는 능력입니다. 평화를 주신 주님 때문에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생기는 것입니다. 평화를 주신 주님 때문에, 평화의 왕 예수님이 내 안에서 다스리시는 그 은혜 때문에 형제를 용서하고 화해하고 평화 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로마서 12장 18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아라. 원수를 사랑하라.' 주님이 이렇게 명령하실 때에는 그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충분한 은혜가 뒤에 따라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이렇게 명령합니까?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내 안에 계시고 그분이 나에게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형제까지도 나는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순한 종교적인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이 명령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우리 모두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나우웬이 말했습니다. '용서는 공동체인 교회 생활의 접착제입니다. 용서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우리를 함께 있도록 붙들어 주고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 자라게 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나는 용서받아야 될 사람이요, 용서해야 될 사람이요, 당신도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요, 항상 용서해야 될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보면 평화의 왕을 아직도 만나지 못한 사람처럼 형제와 원수가 되어 있는 사람들도 많고, 한 번 상처를 입으면 두고두고 그 상처가 묵은 상처가 되어 고침을 받지 못하는 비극도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입으로는 용서한다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를 안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좋은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그 사람의 실수를 절대 잊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부부 간에도 그렇습니다. 고부간에도 그런 것을 봅니다. 형제간에도 그런 것을 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옆에 앉아 있는 형제들까지도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앙금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이런 사람이라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봐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평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감정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서로가 좀 심한 다툼도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피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나는 절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나는 절대 어떤 사람에게도 상처 주는 일이 없을 것이다.' 누가 그렇게 장담하면서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피해를 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피해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다 감정이 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친했다가 내일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 약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의 왕이 내 가슴이 항상 살아 계셔서 그분이 주시는 은혜를 가지고 무조건 백번이고 천번이고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해야 될 사람입니다. 용서함으로써 그들과 평화를 누림으로 우리가 평화의 왕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임을 세상이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합니까? 묵은 감정을 가지고 계속 그를 접대합니까? 그렇다면 한 가지만 알아두십시오. 주기도문을 통해서 날마다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준 것같이 하나님이여 나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보십시오. 내가 형제를 사랑하고 형제를 용서하고 평화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내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을 보류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하고 있고 마음에 증오가 있으면 누가 손해를 봅니까?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이 손해 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손해는 내가 보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 기도가 잘 안됩니다. 영적으로 점점 더 병이 들어갑니다. 자기도 모르게 병이 들어갑니다. 병이 들어가면 은혜와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입습니다. 그것이 심해지면 육신까지 병이 납니다. 누가 손해를 봅니까? 평화의 왕을 모시고 있다면서 모순된 삶을 사는 사람이 손해를 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새천년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평화의 왕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과 평화 하였다고 하면서 형제와 불화하면 안됩니다. 뒤의 것을 잊어버리십시오. 20세기를 잊어버리십시오.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 갈 자세를 다시 가다듬으십시오. 과거의 묵은 감정이나 원한, 피해의식을 다 묻어 버리십시오. 다시 말하면 과거에 대해서 문을 닫고 못질을 해 버리십시오. 자물통을 잠가 버리고 다시 보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용서하면서 새로운 2000년을 맞이해야 합니다. 평화의 왕 예수님이 나를 지배하시어 내가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으로서, 가는 곳마다 이 평화의 왕이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되어 미움이 있는 곳에 진정한 사랑이 꽃 필 수 있도록 하는 평화의 사신이 되어야 합니다.
10년 전에 이 강단에서 어느 자매가 한 세례 간증을 제가 기억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있었을 때 그는 생활이 넉넉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간염이 걸려서 고생을 하고 되었습니다. 사업을 하는 남편은 그런대로 수입이 좋고 잘 사니까 마음이 다른 데로 갔나 봅니다. 투병 생활을 하는 아내를 돌볼 생각은 안하고 바깥으로 돌면서 마음을 다른 데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얼마나 그 가슴이 찢어지겠습니까?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잠을 못 자고 고민하는데 이웃에 있던 우리 교회 순장이 가서 전도를 했답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님 믿으면 다 이길 수 있어요.' 새가족반에 나왔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그날 말씀을 배웠습니다. 무조건 믿기만 하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의 구주가 되시고 내 마음에 계신다고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다락방에도 열심히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점점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그 놀라운 평화가 자기 마음에 밀물처럼 밀려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렇게 불안하고 용서하지 못해서 갈등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치유함을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평화의 왕, 살아계신 주님이 그 자매의 마음에 오셔서 좌정하시고 다스리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평화의 주님이 그 마음을 다스리니까 평화를 해치는 모든 것들이 다 쓸려 나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자기도 모르게 남편을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을 다 용서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항상 최고가 아니면 안된다는 강박 관념으로 자녀들을 들볶으며 그들에 대해 항상 상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마음도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아이들이 연약한 그대로, 못난 그대로 얼마나 감사하게 여겨지는지 몰랐습니다. 그러자 애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집안의 분위기가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치유를 받으니까 얼마 후에 간염까지도 깨끗이 고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끝으로 이렇게 간증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마음의 평안이 있기에 인생의 거센 파도를 두려움 없이 타고 넘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평화의 왕이 오셨습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 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분을 내 마음에 모시고 우리는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평화의 사신으로, 평화의 대사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평화 합시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직장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였음을 선포합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 평화를 통해서 새로워지는 은혜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주님이 다스리시는 새 역사가 창조되는 것을 우리 모두가 목격하면서 사는 내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 프란시스의 기도를 다시 한 번 기억합시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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