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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탄생의 진정한 의미,구세주로 오신 예수님 [성탄절설교]

구원의 계획 2011. 12. 25. 19:09

예수 탄생의 진정한 의미[성탄절설교]

 

새 천년의 첫 성탄절에 성탄의 기쁨이 온누리에 가득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러나 마냥 성탄의 기쁨을 나누고 기원하기에는 너무나 어수선한 난국이다. 새천년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떠들썩하던 새해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온통 위기의 징후 뿐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안과 실의, 냉소와 비관이 우리를 더욱 어둡게 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는 고통분담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통하여 구조조정을 이루어내고 새로운 도약을 이루어야 할 기회를 놓치고 있다. 대신에 고질적인 집단이기주의로 인해 경제상황은 다시 악화되고 사회적 신뢰체계는 무너져 내리고 있다. 제 2의 경제위기론이 더 무성하게 난무하고 있는 형편이다. 국민의 60% 이상이 경제위기의 재발에 대한 위기의식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는 통계가 나오고, 경제불황으로 내년에는 실업자가 100만명 이상 될 것이라는 반갑지 않은 예측도 들린다.

 

현재의 경제위기를 극복할 사회적 동기부여를 발견하기는커녕 저마다 자기 몫 챙기기에 혈안인 형국이다. 저마다 책임과 의무를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하다. 생활현장에서 강제로 내몰린 희생자들에게는 사회의 보살핌과 든든한 유대, 그리고 회복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경제적 위기를 극복할 사회적 신뢰체계의 구축은 더욱 요원하게 보인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서로 돕는 공동체의 지혜가 절실히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경쟁이념만이 대안인양 호도되고 있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진정한 위기는 만연된 불신에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총체적 위기 속에서 성탄과 교회의 존재의미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이 시대를 향한 교회의 사명과 역할을 물어야 한다. 교회는 성탄의 기쁨에 들떠 축하하기 전에 이천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위에 오신 참된 의미를 되새기며 교회의 본질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포로되고 눌리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소외된 삶의 현장 한가운데로 오셨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셨다. 그들을 회복시키셨다. 교회는 예수님의 성육신의 모범을 따라 우리 사회의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경제가 무너져 내리고 사회적 신뢰체계가 허물어지는 가운데 고통당할 이웃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교회에는 희망이다. 그들을 위해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흑암의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본받아 교회는 고통당하는 이웃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치유하는 회복의 보루로 거듭나야 한다. 이것이 무너지고 있는 교회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고 우리 사회에 희망을 주는 길이다. 지금 사회가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경쟁에 살아남기 위한 비범한 능력이 아니다. 겸허히 이웃의 고난 가운데 동참하는 교회이다. 거기에 신뢰회복이 있고 사랑이 있고 소망이 있다. 구조조정으로 소외당한 이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섬기며 보살피자! 이것이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뜻이고 교회가 감당할 몫이다. 이것이 새천년 첫해의 예수 탄생의 진정한 의미이다.

 

방은 많은데…

 

지난 한 세기 동안 인류는 여러 분야에서 많은 진보를 추구해 왔지만 특히 생활의 변화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영상과 음향 기술의 발전일 것이다.거기다가 정보 통신의 기술까지 결합되어 사람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TV,VTR,컴퓨터 등의 화면을 들여다보며 살고 있다.늘 화면만을 들여다보며 살다보니 실제로 사람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간이 줄어들게 마련이다.즉 집안의 가족 관계에서부터 사회의 친구나 동료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 관계가 소원해지고 있다.

 

군중 속에서의 고독을 절감하는 사람들이 동창회 모임을 자주 갖고 군대나 단체의 동기생 모임 또는 등산이나 낚시의 동호인 모임도 만들어 모이지만 이미 영상 문화 속에서 살게 된 21세기의 인류는 점점 개인으로 흩어져서 밀실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그래서 오히려 고독한 사람들을 위한 밀실 문화가 등장했다.게임방 토크방 노래방 등 ■■방의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도 ■■방의 문화■■는 있었다.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떠나서 보이는 신들을 섬기던 사람들은 인간을 어둡고 무서운 신전 속으로 몰아넣었다.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부하던 예루살렘 사람들까지도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전을 장사꾼들의 거래소로 만들고 있었다.예수께서는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고 너희가 이 성전을 헐면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모든 밀실로부터 끌어내셨다.그분은 갈릴리의 바닷가에서 또는 들판이나 거리에서 또는 산에서 천국의 복음을 전하셨다.그분은 사람을 가두는 모든 밀실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던 것이다.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거리에서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즉 사람은 하나님을 조용히 모셔들여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 골방을 준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인류가 마련한 모든 방에는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자리가 없다.몸부림치는 영상과 떠들어대는 음향들로 가득한 그 방들은 이미 하나님의 자리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2000년 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들어갈 방이 없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이제 다시 그분이 세상에 오신다 해도 방의 이름을 가진 곳은 많으나 그분을 모실만한 방은 없을 것 같다.그렇다면 오늘날의 교회들은 과연 그분을 모셔들일 만한 방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지난날의 예루살렘 성전처럼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로 가득하여 다시 오신 예수께서 발을 들여놓으실 틈도 없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면밀하게 살펴볼 일이다.■■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누가복음 9:58)

 

올해는 성탄절이 유난히 조용하다고 한다.캐럴도 들리지 않고 오가는 선물도 줄어든 채 조용하다 못해 썰렁하다는 푸념이 들린다.물론 어려운 경제사정의 반영일 것이다.그러나 올해야말로 진정한 성탄절의 의미를 되새기기에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흥청망청 소란한 속에서 산타와 크리스마스 트리, 선물꾸러미를 바라보느라 잊어버렸던 성탄의 뜻을 마음에 다시 새기는 시간으로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어려운 경제사정만 빼고 성탄절은 이렇게 조용했으면 좋겠다.로이 스미스의 말처럼 ■■자기의 마음속에 크리스마스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그것을 나무 밑에서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언제나 문제가 많고 어려움이 많고 고통이 많기 마련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올 겨울이야말로 가장 추운 겨울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다 터져 나온 것과 같습니다.

 

경제부흥의 뒤안길에서 육신의 생명을 위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정신적으로 핍박을 받고 고민하는 사람들, 영적으로 참 빛을 받지 못하고 어둠의 그늘에서 헤매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에서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시기 위해 주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21세기를 바라보는 이 시점에서 우리 민족은 분단의 아픔을 치료하는 일들을 하나씩 전개해 나가는 이 시점에서 구주 성탄을 맞게 되었으니 올해의 성탄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그 의미가 다른 때보다 더 크다고 하겠습니다.

 

주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위엄을 갖추고 가장 화려하게 오실 수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가장 비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는 가장 비천한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시고, 그들에게 새 힘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오셔서 사실 때에 당시 가장 멸시를 받는 갈릴리 지역에서 사셨고, 스스로 갈릴리 사람이 되셨고, 처음 일꾼들을 갈릴리 사람들 가운데서 선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이 있었기에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할 수가 있었고, 그 결과 부자로 행세할 수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은혜 받은 사람들이 자원하여 바치는 헌금으로 어렵게 생활하였습니다. 이는 성실하게 사는 사람을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평범한 시민으로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이해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들을 이해하였고, 회개하기를 원했습니다. 갈릴리에서 조용히 비치기 시작한 이 빛은 점점 주변을 밝히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로마제국에 이 빛을 가득히 채웠으며, 온 세계로 향해 비쳐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빛을 받고 있습니다.

 

최초의 성탄에 천군 천사들의 축하 찬양이 하늘에서 있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는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성탄은 그 의미를 올바로 되새길 줄 아는 사람들에게 기쁨이요 평화입니다. 다가오는 21세기는 모든 피조물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성탄을 의미있게 맞는다면 새로운 세기를 맞이해서도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어둠에 비추는 빛으로 오셨고, 그 빛을 받는 사람의 마음은 감동을 받았고, 그 밝은 빛은 지금도 계속해서 비추고 있습니다. 구주 성탄에 전국 교회와 온 성도들에게 성탄을 통해서 주시는 바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미국의 소설가 오 헨리의 작품 ■■크리스마스 선물■■이 생각난다.한 도시에 가난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부부 짐과 델라가 살았다.성탄절이 다가오자 두 사람은 각각 걱정이 되었다.서로에게 선물은 하고 싶은데 너무 가난했기 때문이다.그러나 남편 짐은 아내의 긴 머리에 꽂을 머리핀을 사기로 마음먹고 갖고 있던 시계를 팔기로 결정했다.아내 델라는 남편에게 시계줄을 선물하기로 하고 자신의 긴 머리를 잘라 팔았다.

 

두 사람은 시장으로 나가 선물을 구입했다.짐과 델라는 서로를 기쁘게 할 마음으로 거의 같은 시간 집에 도착했다.짐은 머리핀을 들고 아내의 머리에 꽂아 주려고 했으나 아내의 머리는 이미 짧게 깎여 있었다.델라 역시 시계줄을 들고 있었으나 남편에겐 이미 그 시계가 없었다.준비된 선물은 쓸모없게 됐지만 둘은 곧 부둥켜 안고 행복의 눈물을 흘렸다.사랑은 추위를 녹인다.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넘치게 나누는 성탄절이 되길 기도하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 (누가복음 2장 41~52절) [성탄절설교]

 

예수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에는 예루살렙에 갔다. 예수가 열두살이 되는 해에도 그들은 절기 관습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러 올라갔다. 그런데 그들이 절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소년 예수를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그의 부모는 이것을 모르고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다음에 비로소 그들의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그를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은 그를 찾으려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사흘 뒤에야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는데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 그의 부노는 예수를 보고 놀랐다. 어머니가 예수에게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하고 말하였다.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내려가 나사렛에서 돌아와서 부모에게 순종하면서 지냈다. 예수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어제 우리는 성탄을 맞이했습니다. 이 성탄 트리는 종교 개혁을 한 마르틴 루터가 성탄 트리를 만들었다는 공식 기록이 있습니다. 루터는 종교 개혁을 하기도 했지만 신부의 옷을 벗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미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12월 25일은 돌아오는데 어떻게 가족과 함께 성탄을 집에서 맞이할까 곰곰히 생각한 끝에 전나무가 우거진 숲 속에 갔습니다.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성탄 선물은 살 수가 없고 한 밤 중에 숲 속에 가보았더니 그 날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성탄 트리가 있는 그 숲 속의 나무들이 눈에 완전히 뒤덮였답니다. 그런데 그 날 마침 눈이 많이 와서 달빛이 너무 환하게 빛나더랍니다. 그래서 루터는 눈이 쌓인 나무가 달빛에 너무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아기 예수의 빛이 그의 마음 속에 그렇게 빛나고 있다고 감탄하였습니다. 그리고 조그만 전나무 하나를 베어서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달빛에 빛나던 아기 예수의 밝음을 보고 집에 돌아와서 눈을 다 털어낸 다음 독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은 촛대를 꽂아서 빛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성탄의 밤을 가족과 함께 즐겼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 트리의 연원입니다.

 

달밤에 눈속에 비친 하늘의 빛남, 방에 들어와 꽂아놓은 촛불의 빛남, 그 빛의 주인공이 아기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축하의 마음을 어제 예배 때에 같이 드렸습니다. 빛이 태어났습니다. 언제부터인가 12월 25일을 성탄절이라고 해서 전세계가 같이 지킵니다. 그런데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몇몇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정교회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외에 정교회가 있습니다. 동서 로마가 갈라졌을 때, 동쪽 로마인 비잔틴 제국에서는 교회 이름을 정교회라고 했습니다. 서쪽 로마에 속하던 교회 이름이 로만 카톨릭입니다. 종교 개혁은 서쪽 로마인 천주교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미 동쪽 비잔틴 문화권에 속했던 정교회는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현재 동구라파 지역을 비롯해서 북아프리카, 남인도까지 중동 쪽에 퍼져 있는 큰 교회 이름이 정교회입니다. 정교회에서는 예수께서 태어나신 것은 분명한데 천지 창조 때에 6일째 되는 날에 사람을 만드셨고 첫째 아담도 신학적으로 보면 6일째 되는 날 만드셨으므로 둘째 아담이라 이름하는 예수도 아마 새해 6일날 만드셨을 것이라고 보고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킵니다. 그런데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에서는 로마 제국의 기록에 따라 로마 달력으로 첫해 25일 되는 날, 즉 12월 25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을 하셨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12월 25일이 성탄절로 확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든,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키든 중요한 것은 메시아 아기 예수가 빛으로 우리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으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요한 복음 1장 14절의 말씀입니다. 12월 25일이 첫 인류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사실 우리 신앙의 역사는 어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 역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실 성탄절은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성탄절은 어제였습니다. 아기가 세상에 하늘의 이름으로 태어난 날이 12월 25일 첫 성탄입니다. 아기 예수로 태어난 메시아가 십자가 못박혀 돌아가시면서 첫 번째 성탄은 극치에 달합니다. 두 번째 성탄은 첫 번째 성탄이 마감하는 그 순간에 두 번째 성탄이 시작합니다. 십자가로 첫 번째 성탄이 극치에 올라서 완성을 이루고 부활절 아침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시면서 제 2의 성탄이 시작됩니다. 제 1의 성탄을 금년에 드리고 제 2의 성탄은 내년 부활절에 송축합니다. 그때는 영원한 우리 가슴 속을 비출 것입니다. 마지막 성탄은 아무도 누릴 수는 없습니다.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마감 날에 재림하셔서 주님께 모든 사람이 다 끌어올림을 받아서 주님이 우리 모두를 가슴으로 끌어안아서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재림할 때 세 번째이자 마지막 성탄이 옵니다. 어제 우리는 인생의 시작, 희망의 시작, 신앙의 시작, 믿음의 시작, 사랑의 시작을 축하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축하된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여기 성경 본문에 보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12살 된 아들 예수를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어디를 들추어보아도 30에서 33살까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셔서 그에 관한 기록이 쓰여 있는데 한 살부터 30살까지는 예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아무 기록이 없습니다. 단 한가지 기록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누가 복음 2장 41절에서 52절, 이 말씀에만 30세 이전의 예수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12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장과 서기장과 율법학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토론하고 구약의 말씀도 같이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유일한 예수 생애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과거 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의 30년에 걸친 예수 생애에 관한 기록이 없으니 역사적 예수는 알 길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30년간의 예수의 생애가 아니라 3년간의 공생애입니다.

 

우리는 어제 새 역사를 시작했지만 유대교의 역사는 우리와 조금 계산법이 다릅니다. 유대 사람들은 우리가 부활절을 맞을 즈음에 유월절을 시작합니다. 유월절은 과거 애굽 땅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모세를 통해서 출애굽을 해서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 땅에 입성을 하던 기록, 소위 엑소더스의 시작입니다. 그러니까 유월절의 뜻은 '파샤'라는 말로 설명됩니다. 이 말은 출애굽하기 바로 전날 밤, 해방을 맞기 바로 전날 밤 양을 잡아서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 그러면 그 집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것이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여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영어에서는 Pass Over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달력으로는 부활절이 있는 3월 혹은 4월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합니다. 유월절이 되면 유대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성지 순례를 했습니다. 예수도 유월절에 성지 순례를 했습니다. 또 그로부터 50일이 지난 오순절에, 우리로 말하면 5,6월 정도에 성지순례를 합니다. 오순절의 시작은 유대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날은 농사지은 첫 수확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리고 감사하자는 뜻에서 유대 사람들은 반드시 성지순례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7월 15일부터 일주일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집을 짓고 살았던 것을 기억해서 집 앞에 장막이나 초막을 짓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일주일을 삽니다. 광야 생활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날을 수확절, 장막절, 또는 첫 배를 바친다고 해서 수장절이라고 부릅니다. 유월절에 역사가 시작하고 오순절에 감사를 드리고 초막절에 헌물을 바칩니다. 이 세 절기에는 반드시 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6살이 되면 엄청난 예식을 회당에서 거행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이 만드신 우리는 근원이 같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합니다. 성탄절의 의미는 하나님과 우리가 근원이, 출발이 같다는 것입니다. 어제 하늘과 땅이 만났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을 품고 살고 땅에서 하늘을 심고 기르며 삽니다. 하늘과 땅의 축복이 같습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성탄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과 하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땅이 자라서 하늘로 상달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땅과 하늘이 함께 시작하는 날, 오늘 하나님께 진지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하늘과 땅이 함께 하는 것으로 새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