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명: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십자가, 5가지 놀라운 구원의 비밀
- 글 / 하용조 목사
예수 그리스도에게 행해진 십자가 처형 확정 판결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아이러니하고 모순투성이인 불법 재판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 처형이 확정되기까지 빌라도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법으로 재판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처형을 패배가 아닌 승리로 보시고 축복의 도구로 바꾸십니다.
역사는 항상 권력자의 편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 죄가 없어도 힘이 없는 예수님에게 십자가 처형이라는 극형이 선고됩니다. 역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기운 것 같고, 하나님께서 눈을 가린 것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십자가 처형이 선고된 후부터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그 기간에 다섯 가지 놀라운 구원의 드라마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구원의 드라마를 하나씩 발견해 봅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십자가 처형에 적극 임하신 예수님
첫째,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처형에 대해 적극적으로 임하신 것입니다. 즉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다가왔을 때 회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속히 회개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고쳐야 합니다. 그러면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얻게 됩니다.
“예수를 맡으매”라는 구절에서 ‘맡으매’는 원어로 요한복음 1장 12절의 ‘영접하다’와 같은 동사입니다. 즉 ‘환영하다’, ‘영접하다’, ‘맞이하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지만, 그 대신에 예수님을 처형하는 일은 환영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빌라도에게서 예수님을 넘겨받자마자 즉시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골고다까지 데리고 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신 고난의 그 길을 우리는 ‘비아 돌로로사’(십자가의 길)라고 부릅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항의하고 거부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에 대해 부정하거나 거부하시지 않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십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떼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립니다.
또 요한복음 10장 17, 18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빼앗기신 게 아니라 스스로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양떼를 위해,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처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굉장히 놀랍고 신기한 구원의 드라마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 일들을 구원의 사건으로 바꿔야 합니다. 사업 부도, 각종 질병, 자녀 문제 등도 구원의 사건으로 바꿔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고난도 구원의 사건으로 바꿔야 합니다. 남북 문제, 독도 문제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구원의 드라마를 연출하시는 것입니다. 18절 말씀을 읽습니다.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두 강도와 같이 취급당하신 예수님
둘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독특한 사건 한 가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홀로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양 옆에 두 명의 강도가 함께 십자가에 달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두 사람을 ‘강도’, ‘행악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누가 봐도 십자가 처형을 받을 만한 흉악범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 강도 사이에 세우고 처형하는 교묘한 술수를 부립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흉악범들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리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해골’이라 하는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것은 온 인류의 영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구원자,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중앙에 있고 왼편에 회개하지 않은 강도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면서 저주하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그를 오른편의 강도가 꾸짖습니다. ‘너와 나는 죽을 죄를 지었지만, 이 분은 무슨 죄가 있느냐’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회개한 오른편 강도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상대방을 향해 함부로 ‘구원 받았다, 못 받았다’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성경 몇 구절로 우리가 판단할 문제는 결코 아닙니다.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구원 문제를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영혼에 대해 함부로 단정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오만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19~22절 말씀을 읽습니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죄명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셋째, 빌라도가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푯말을 써 붙인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해 굉장히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는 세 번이나 무죄를 선언하면서 예수님을 놓으려고 애썼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재판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때로 권력에, 압력에 의해 본인이 원치 않는 일을 행했을 때 양심에서 정의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 위에 죄명을 붙이는 자리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이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정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쓸 것을 썼다면서 거절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구원의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뿐 아니라 온 인류의 왕이심을 말해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현장은 예루살렘 성에서 가깝고 그때 세계 도처에서 온 유대인들이 모두 읽을 수 있도록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을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썼습니다. 이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된 사실은 온 우주를 포함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이심을 십자가 푯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매우 놀라운 푯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23, 24절 말씀입니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구약의 성취 ‘옷을 나누고 제비뽑기’
넷째,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고 제비뽑기한 사건입니다. 이는 표면적으로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지만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겉옷과 속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그때 군병들 사이에 예수님의 옷 쟁탈전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십자가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겉옷과 속옷마저 빼앗기며 모든 것을 착취당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소유하려고 합니다.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많이 배우고 금력과 권력을 더 가지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속옷까지도 빼앗기시며 철저히 무소유가 되십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속옷마저 빼앗기는 현장을 보고 굉장한 충격을 받습니다. 즉 시편 22편 18절에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라는 말씀이 문자적으로 그대로 응답되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5~27절 말씀을 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구원의 대 드라마 ‘가상칠언’(架上七言)
다섯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침묵하시면서도 그 유명한 ‘가상칠언’을 남기십니다. 그 말씀 안에 구원의 대 드라마가 전부 농축돼 있습니다.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남기신 일곱 가지 말씀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용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힌 채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그 고통은 가히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럴 때 누구나 순간적으로 혈기가 나고 복수심이 끓어오르게 됩니다. 요즘 제가 깨닫는 것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란 죄를 짓지 않는 게 아니라, 죄를 짓되 회개하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하시는 순간에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과 같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신을 조롱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복이 되겠습니까? 우리에게 예수님의 마음이 주어진다면 세상은 새롭게 달라질 것입니다.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마 5:39),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눅 6:29)는 말씀은 모두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열정이 아닌 성품입니다. 공산당도 열정이 있고, 돈 버는 사람들도 열정이 있습니다. 새벽 기도가 아닌 골프치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는 열정이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밤을 새우는 열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참 믿음은 열정이 아니라 좋은 성품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시며 고통이 심화되는 중에도 자신에게 긍휼을 구하는 한 영혼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예전에 우리 교회의 집사님 한 분이 암 덩어리가 서너 개 발견돼 수원의 어느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소식을 듣고 중환자실로 심방을 갔을 때, 마침 그 분이 눈을 떴습니다.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찬송가 “내 영혼이 은총 입어”(495장)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저는 말했습니다. “자매님이 할 일이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계신 의사나 간호사들에게 전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매님은 전도할 수 있습니다. ‘나는 곧 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합니다. 나는 천국에 갈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 간호사님, 예수님을 믿으세요’라고 말씀하십시오.” 그러자 집사님이 눈을 반짝이며 그렇게 해보겠다는 의사 표시를 했습니다. 그 후에 그 집사님은 일반 병실로 옮겼다고 연락해 왔습니다. 저는 사람에게 살아야 할 이유, 희망만 있어도 무서운 질병에서 회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순간에도 전도하셨듯이, 우리도 죽음을 전도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효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인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 19:26~2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마지막 순간에도 효도하셨습니다. 곧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에게 전화 한 통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유명하고 공사다망(公私多忙)한 사람이라도 항상 부모님을 기억하고 보살펴 드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부모님을 향한 효도의 마음이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네 번째로 절규의 말씀입니다.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시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계속 된 상태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며 큰 소리로 절규하셨습니다.
다섯 번째로 고통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요 19: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죽음이 임박했음을 의미합니다.
여섯 번째로 완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구원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일곱 번째로 위탁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눅 23:46).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도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때 예수님의 가상칠언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묵상에 대한 3가지 과제
다음의 성경 구절 세 가지를 모두 함께 읽으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깊이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하나, 베드로전서 2장 24절 말씀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온 인류를 치유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둘, 베드로전서 3장 18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이 말씀을 자꾸 읽으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와 믿음을 갖게 하고 많은 능력을 나타내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읽으면 정보가 되지만, 자꾸 읽고 묵상하면 피가 되고 살이 되며 능력이 됩니다.
셋, 로마서 5장 6~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지금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위로와 용기를 주시며, 구원과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며 찬양하고 모든 영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지만, 우리에게 영광스런 승리를 안겨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묵상하고 찬양하며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게 됩니다. 세상에 대해 넉넉히 승리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십니다.
기도합시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모든 성도님들에게 십자가의 능력을 허락하셔서 세상을 넉넉히 이기고도 남게 하옵소서.
개선가를 부르게 하옵소서. 건강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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