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 자료/메아리

변절한 목사들과 맹신도들

구원의 계획 2010. 10. 12. 10:14

목사를 동역자로 세우는 교회

'직분'이 우상화되면 '계급'이 된다

입력 : 2010년 10월 01일 (금) 08:26:16 [조회수 : 1345] 신성남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여러 교회 주보나 홈페이지에서 '평신도를 동역자로 세우는 교회'라는 구호를 자주 봅니다. 이 '평신도'란 용어 자체는 중세 교회처럼 계급적인 표현이기에 문제가 있지만, 어쨌든 신도들을 동역자로 세운다는 면에서 일단은 그 의도를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를 목사님을 포함한 '모든 신도를 동역자로 세우는 교회'로 하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교회에서 일어나는 실상은 이런 취지를 아주 무색하게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신도들을 동역자로 세운다며 적당한 직분을 맡긴 후에, 실제로는 그들 위에 군림하며 동역자라기보다는 그저 '도우미'처럼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을 길들이는 그 비법은 의외로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사람들은 계속 가까이 중용하고, 까다로운 사람들은 멀리하거나 한직으로 보내면 됩니다. 결국 나중에는 목사에게 쉽게 순종하는 사람들이 주로 중요한 요직에 남게 됩니다. 일부 목사님들이 애용하는 이런 수법은 한마디로 말하면 '잔수'이고, 두 마디로 말하자면 '잔머리 굴리기'입니다.

하여튼 이런 속된 방법으로 목사 주변의 제직들은 말로만 동역자이지, 사실상 명령에 잘 순종하는 시녀처럼 '어용화'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물론 이들 중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열심히 봉사를 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순수함이 맹신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바른 지식보다는 '감성에 치우친' 신앙생활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맹신으로 위장된 동역

요즘 여러 교회에서 자주 들려오는 목사님들의 비양심적이며 무법적인 행태는 이런 구조적 취약점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에 순진한 신도들은 목사에 대한 무비판적 맹종을 순종으로 착각하며 매우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름만 동역자이지 사실은 거의 '맹신' 수준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매우 큽니다. 달리 표현하면, 여러 교회에서 추구하는 '평신도 동역'이 언제든지 '맹신도 동역'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다행히 담임목사가 사심이 없는 목회자일 때는 별 탈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는 심각한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목사의 독주와 월권이 시작되며, 결국은 '교회의 사유화' 현상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이처럼 목사들이 자신에게 맹종하는 교인들을 천거하여 직분자로 세우고, 실제로는 권위주의적 독재를 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교회법을 명백하게 역행하는 간악한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이는 교권주의자들이 매우 즐기는 고전적이며 상투적인 수법입니다. 겉으로는 여러 신도들과 동역하는 것처럼 구색을 갖추고 있으나 이는 눈가림을 위한 모양새일 뿐이며, 내부적으로는 언제나 목사 마음대로 맹신화된 직분자들을 조종하며 교권을 흔들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총체적 난국은 이런 '위장된 동역'에 큰 원인이 있습니다. 맹신도들이 동역을 빙자하여 목사의 월권과 독재에 합법적인 명분을 제공하고, 심지어는 목사의 비리까지도 눈감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불가사의한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담임목사가 교회 공금을 횡령하거나 간통을 해도 그저 좋게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조직이 비대해지는 중대형 교회로 갈수록 더욱 극심합니다.

대부분의 맹신도들은 자신들의 교회가 '외견상' 말씀을 잘 전하고, 장엄한 예배를 드리고, 새벽 기도회에 열심을 내고, 교육에 투자하고, 선교에 힘쓰고, 그리고 구제와 봉사도 하고 있으니 스스로 매우 좋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러한 열심과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사람과 세력과 돈을 모으기 위한 '고도의 겉치장' 수법이며 눈가림이 될 수도 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만일 어떤 교회가 노골적으로 거짓을 가르치고 부도덕한 일을 한다면, 누가 그런 교회에 출석을 하겠습니까. 귀족 목사님들도 이런 사실을 매우 잘 압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최대한 순수하고 경건한 목회자로 위장을 합니다. 당연히 설교도 멋지게 잘하고, 기도도 뜨겁게 하고, 그리고 남을 돕는 일도 앞장서서 합니다.

따라서 일반 신도들은 진실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단지 이 종교 귀족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어김없이 자신들의 이권을 조용히 챙기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 세습이나 고액의 집회 강사료 그리고 공금 유용 등이 그러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맹신이 무서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도들 대부분은 순수한 열정으로 사역을 하지만, 부패한 목사들은 이를 악용하여 언제든지 빈틈만 보이면 자신의 사욕을 실속 있게 채우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부유한 목사'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절대 다수인 작은 교회 목회자들의 경제적 고통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고가의 주택과 고급 승용차를 즐기는 사치스러운 중대형 교회 목사들이 주변에 널렸습니다. 몇 년 만에 수억 원을 가볍게 모으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거룩한 교회 내에서 거룩하신 목사들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정말 한심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선적인 목사님들은 신도들과의 동역에서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동료 교역자들 사이의 동역도 바르게 하고 있지 못합니다. 즉 부목사나 전도사 등 다른 부교역자들을 대등한 동역자로 예우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마치 상전이라도 된 듯, 부하 직원처럼 함부로 대하며 교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일반 신자로서도 해서는 안 될 부끄러운 행동입니다.

교회가 꾸준히 변질되고 온갖 악습들이 일반화되다 보니, 일부 목사들은 정말 안하무인입니다. 이런 나쁜 관습을 개선하려면, 교회 정관에 교역자들 사이의 업무 구분을 명확히 하고 서로 존중하며 월권을 못하게 해야 합니다. 또한 가능하면 부교역자 청빙 시 담임목사의 추천을 배제하고, 당회가 직접 주관하여 공채로 적임자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여튼 위와 같은 일련의 사태들은 목회자들의 변절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도들의 책임 역시 작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 교인들은 목사님 앞에만 서면 그렇게 작아지는지 그 이유를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목사직을 지나치게 존대하는 개신교 고유의 전통과 아울러 목사를 선지자나 제사장 또는 사도로 오해하는 잘못된 인식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목사직은 '가르치는 장로'나 '교사'로서 존중을 받을 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즉 다스리는 장로나 집사 등 다른 직분과 대등합니다. 따라서 일부 목사들이 스스로 '주의 종' 또는 '주의 사자'라고 하며 자신을 높이고, 마치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은 분수를 모르는 무지한 처신입니다.

개혁 교회는 하나님과 신자들 사이에 어떠한 대리자나 중보자도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목사직은 교회의 대표직도 아니며, 특별히 높은 자리도 결코 아닙니다. 목사도 다른 직분과 마찬가지로 당회의 관리와 치리를 받아야 하는 하나의 지체일 뿐입니다.

한국교회 부패의 쌍축

이미 한국교회는 신뢰를 잃고 세인들의 비웃음거리가 된 지 오래입니다. 한국교회를 부패시키는 쌍축이라 할 수 있는 '변절한 목사들'과 '맹신화한 신도들'이 사이좋게 나란히 과속으로 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변변한 제동 장치 하나 제대로 없이 '돈과 복'이라는 우상을 향해 마냥 달리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경고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변절한 교권주의자들은 맹신도들을 방패 삼아 소통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부정과 부패를 제거하라는 교회 안팎의 요구도 소귀에 경 읽기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도를 넘어 물욕과 권력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자폐 증상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작금의 사태가 더욱 심각한 이유는 상당수의 중대형 교회들이 이들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는 현실에 있습니다. 교회의 단물을 빠는 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사유화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여론의 눈치라도 조금 보는 듯했으나, 요즘은 아예 노골적입니다. 탐욕에 눈이 먼 데다가, 신도들의 맹신화와 교권 장악이 사실상 거의 마무리되었다는 자신감 때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는 지금 지난 30년간 뿌린 '변질된 복음'의 열매를 고스란히 심은 대로 거두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제대로 전한 것이 아니라, 저급한 '기복 신앙'을 열심히 퍼트린 결과입니다. 목회자들의 급격한 부정과 부패 역시 물질적인 복을 추구하여 교회에 돈이 쌓이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속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맹신으로 길들여진 신도들은 '비나이다 신앙'으로 오로지 세속적인 복에 명운을 걸고 있고, 타락한 목사들은 메뚜기가 제철을 만난 듯 날뛰며 맘몬적 부에 탐닉하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소위 노회니 연회니 총회니 하는 곳도 교권에 중독된 종교업자들이 기생충처럼 서식하며 불법을 행하고, 오히려 양심적인 신자들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미 자정 능력을 잃었다고 말을 합니다. 따라서 이제는 비상하고도 특별한 자구책이 별도로 없는 한, 극심한 물질 숭배 속에서 탈선과 부패와 타락의 내리막길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오죽하면 일각에서 부패 척결을 위한 '종교 특별법'이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나올까요.

최근에도 어떤 형제님이 탄식을 하시더군요. 어렵게 새 신자를 전도해도 주변에 안심하고 추천할 만한 교회가 드물다고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제자의 길을 버리고, 목사를 사장으로 하는 사기업처럼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이처럼 교회가 도리어 전도의 문을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실망하거나 낙심해선 안 됩니다. 부패로 썩어 망해야 할 교회는 당연히 망할 것이며, 반면에 그루터기처럼 끝까지 믿음의 순결을 지킨 교회는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가 보여준 진실이며 교훈입니다. 교회의 외형적 크기나 숫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얼마나 제자된 도리를 바르게 실천하며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과 잘 나눌 수 있는지가 큰 과제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한국교회는 목사님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기대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어느 목회자가 실족이라도 하면, 마치 모세가 홍해 바다에라도 빠진 듯 호들갑을 떱니다. 특정 직분을 지나치게 높이거나 신성시하면, 결국에는 우리 스스로 맹신의 함정에 빠지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신도들의 잘못이 매우 큽니다. 그리고 신도들의 깊은 자성이 필요합니다.

중세적 특권 의식을 버려야

앞으로의 시대는 '성속의 구분'이 더욱 없어질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무슨 평범한 신도가 별도로 있고, 반대로 성스러운 신도가 따로 있겠습니까. 직분에 관계없이 모든 신자가 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이런 면에서 모든 신자가 다 '성직자'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개혁 교회 내에서는 목사와 일반 신도들을 '계급적으로' 구별하고 차별할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라고 해서 과거처럼 특별한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는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자신이 무슨 특별한 '영적 우월권'이라도 지닌 것처럼 신도들을 기만하며 허풍을 떠는 것도 삼가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 내에서 다른 직분들과 '평등하게' 동역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차라리 목회할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이런 결연한 각오 없이 하는 목회는 개인에게 불행이 되고, 동시에 교회에도 독이 됩니다.

이제 목사님들은 정말 개도 안 물어 갈 그 '특권 의식'을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특히 중대형 교회 목사들이 마치 재벌 기업처럼 교회 내 직분을 수직화하고 계급화하는 일은 크게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기이하게도, 한국교회는 중세 교회가 하던 악습들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기가 막히게 잘 챙겨서 답습하고 있습니다. 정말 연구 대상입니다.

목사직도 교회 내 다양한 기능을 가진 여러 직분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직분 자체가 사람을 높이거나 거룩하게 해 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 신자들은 모두 다 주님 앞에서 평등한 형제자매이며, 직업이나 직분에 관계없이 세상 속에서 경건하게 살아야 하는 '성직자'들입니다. 따라서 목사만이 성직이라는 생각도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목수나 세탁소도 다 고상한 성직입니다.

신도들을 동역자로 세우는 일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시급한 일은 목사님들이 먼저 새로워져야 합니다. 자신들의 말대로 종이라면 종답게 처신을 해야지, '목사 왕국'을 만들어 군림하는 목회는 지양되어야 합니다. 더구나 종이 주제넘게 그 어줍지 않은 '목회 철학'을 내세우며, '주인의 자녀들'에게 이를 강요하는 시건방진 버릇도 아울러 고쳐야 합니다. 시키지도 않은 일에 한눈팔지 마시고, 가르치는 사역에만 전념을 하시라는 뜻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함께 평등하게 동역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목사 홀로 성직자라는 '중세적 착각' 속에서 혼자 기획하고, 혼자 독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항상 말로는 신도들을 동역자로 세운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십일조나 꼬박꼬박 바치게 하고 교회 내 온갖 궂은일과 주방 설거지나 시키며 노역자로 부리면 되겠습니까.

신도들은 동역자이지, 노역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목사님들이 서야 할 바른 자리는 권력을 휘두르는 높은 자리가 아니라, 신도들의 호흡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그들의 '옆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목사직은 외롭고 힘들기만 한 자리가 아니라, 따뜻하게 위로받고 격려받는 '소중한 직분'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미 '목사교'라는 부끄러운 오명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습니다. 목사님들이 제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목사직은 동역하는 직분이지, 독주하거나 독재하는 지위가 아닙니다. 따라서 개혁 교회는 다른 신도들뿐만이 아니라 목사도 진정한 동역자로 세우는 제자다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부르심에 합당한 올바른 사역입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담임목사님들께 묻고 싶습니다. '직분'이 우상화되면 결국은 '계급'이 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일부에서는 그 '담임'라는 직분이 언제부터인가 오만한 계급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중세적 계급화가 오늘날 교회를 깊이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당장 성경 어디에도 없는 그 담임이라는 '변질된 계급'을 스스로 내려놓고, 가르치는 장로나 교사 본연의 직분으로 돌아올 수는 없는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롬 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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