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하지도 받지도 않는 신앙(갈라디아서 1장 6∼10절) 2017.6.17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신앙을 살펴보면 주도적이기보다는 타의에 의해 끌려가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을 ‘강요당하는 신앙’이라고 하는데 믿지 않는데 믿는 척 한다든지, 누군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는 걸 말합니다.
신앙의 진정성은 자발성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자발성이 없다면 그건 가짜 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은혜가 근간입니다. 은혜는 개인적이고 상대적인 경험이기에 결코 보편화·절대화 돼선 안 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성도들은 은연중에 만들어진 규정이나 가치, 또는 분위기에 의해 신앙의 보편화와 절대화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성도들이 연구실의 개구리처럼 그 사실조차 감지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도 이런 문제, 즉 신앙을 강요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 즉 믿음이 구원의 절대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과 더불어 할례나 율법의 규례 또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에 의한 구원을 ‘조건적 구원’으로 변질시켜버린 것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바울 사도의 자격까지 의심케 만들었습니다.
바울이 떠난 갈라디아 교회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복음의 본질이 변질됐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조건적 복음으로 변질시킨 것이지요. 또한 그들의 더 큰 오류는 구원의 조건에 관한 한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신성모독 행위를 했을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심판자가 됐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갈라디아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신들이 세운 신앙적 기준에 따라 성도들의 신앙을 마음대로 재단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기준에 부합하는 신앙행위를 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결국 갈라디아교회를 이 지경에 빠뜨린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복음의 참된 가치를 저버리고 다른 복음에 취한 성도들은 사도 바울로부터 저주와 책망을 받았습니다.
특정인이나 조직 혹은 외부적 환경으로부터 ‘강요된 신앙’의 위험성은 실로 대단합니다. 강요된 신앙행위의 마지막은 구원의 길이 아닌 멸망의 길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 누구도 자신의 기준으로 ‘강요하거나 당해서는’ 안 됩니다. 명심할 것은 신앙적 강요는 꼭 직접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해선 안 됩니다. 자신은 하고 싶지 않은데 안하면 안 될 상황으로 내몰린다든지, 교회에서의 헌신의 정도가 신앙 유무의 판단기준이 되는 분위기 같은 간접적인 요소도 ‘강요당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속의 위대한 신앙인들, 즉 아브라함과 예레미야 같은 이들은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에서 주도적인 신앙생활을 함으로 승리의 삶을 살았으나 반대로 조직이나 분위기에 타협하거나 편승했던 신앙인들, 즉 발람 같은 이들은 실패의 길을 걸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예레미야 같이 승리의 신앙인이 되길 원한다면 결코 신앙을 강요당하지 말고 주도적인 신앙의 삶을 살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태헌 목사(제주 산방산이 보이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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