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가 됩시다(요한복음 11장 40∼44절) 2017.6.26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감춰진 사실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죽은 나사로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엉뚱한 메시지를 얻게 됩니다.
예수께서 오히려 그의 죽음을 기다리셨던 사실을 아십니까. 그가 죽기 전 그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새 생명을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에 관심을 두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살펴보면 우리는 복음의 진의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며 오직 그분으로서 참 생명과 부활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말씀 안에는 육신의 생명이 아닌 진짜 생명이 무엇인지, 또 생명의 영원함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일입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의 진리적 의미는 나사로 한 사람에 국한된 특이한 사건이 아닌, 훗날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히 적용되고 계속되는 일입니다. 이것을 진리의 영원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를 살리신 이는 의원이나 선지자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나사로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죽어 있는 존재라는 걸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죽음과 잠은 같은 의미입니다.
영원한 시간 속으로 진입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깨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죽은 영혼을 불러내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췄습니다. 나사로 부활 사건으로 영생과 참 생명의 실체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가 일어난 후 달라졌습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단순히 육신의 생명이 연장된 것이 변화한 것일까요. 다시 살아난 나사로는 늘 예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전에는 죽은 자였는데 이제는 살아있는 자,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 있는 자로 섰습니다.
나사로는 이제 예수님을 입으로 증언하지 않더라도 그를 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드러나게 됐습니다. 성경은 이를 두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2)라고 했습니다. 즉 그는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나머지 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기는 곧 우리를 살리는 생기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생명이 있고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고 그 말씀에 우리가 거하면 말씀과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에 지배 받아서 살아간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귀를 허탄한 세상 이야기를 듣는데 쏟아붓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세상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영광과 기쁨과 자아의 성공 스토리를 듣고 말하는 걸 더욱 즐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시 살아난 나사로는 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했습니다. 과거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서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닌, 주님의 도구로서 남은 생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홍성구 목사(일산 말씀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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