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양식/오늘의 설교

내가 살아있음이 그대에게 자랑이 되길(빌립보서 1장 20∼30절)

구원의 계획 2018. 3. 29. 22:46

내가 살아있음이 그대에게 자랑이 되길(빌립보서 12030) 2018.3.29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살면서 복을 달라고 합니다. 내가 복을 받아서 남에게 주려고 해야지, 나 혼자만 누리려면 복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유스 코스타에서 강의할 때 해외에서 공부하는 청소년들에게 공부해서 남 주자고,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기 위해 공부하라고 얘기합니다. 청소년들에게 공부해야 할 목적이 있어야 하듯, 어른들에겐 돈 버는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건강해야 하는 이유, 돈을 버는 목적, 교회 다니는 목적은 과연 무엇입니까. 고난을 통과해 복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복음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대천덕 신부님의 책에는 부끄러운 구원에 대해 설명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가령 목욕탕에 불이 나면 사람들이 발가벗은 채 뛰어나옵니다. 살긴 살았지만 벗은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이런 사람들처럼 땅에서 쌓은 공적이 없으면 창피하게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발가벗어도 창피하지 않은 사람은 어린아이뿐입니다. 신앙생활 5060년 했는데 하늘나라에 가서 세 살짜리가 된다고 하면 충격이지 않을까요.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복음 외에 없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아무 일에든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은데 인생이 참 힘듭니다. 아내도 없고, 두들겨 맞고,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되고, 감옥에 들어가고, 배고프며 궁핍하고 외롭습니다.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23)는 고백은 이렇게 이 땅에서 사느니 빨리 하나님 곁으로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28절에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은 가난하지만 모든 것이 협력해서 곧 부자가 될 거야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여러 고난도, 곧 복음의 통로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곤고해봐야 곤고한 사람에게 복음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형통함, 합력해 선을 이룬다는 것에 대한 올바른 의미입니다.

 

바울은 삶이 고달프고 그래서 당장 그리스도와 함께하고 싶지만, 자신이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해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내가 살아 있어서 이웃의 믿음이 퇴보하는 게 아니라 진보한다고, 이웃의 삶이 기뻐진다고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소금을 먹으면 갈증이 납니다. 기독교인은 내 이웃이 나를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 삶이 무엇인지 궁금하고 갈증을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늘 기쁠까’, ‘성경이 뭐길래 저렇게 열심히 읽을까등 나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우리는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이웃을 섬기려면 고난이 따릅니다. 우리가 손해를 안 보려고 하면 남을 섬기기가 힘듭니다. 손해도 보고 때론 억울하기도 해야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사람의 믿음의 진보를 위해 모욕이나 수치를 참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 고난도 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해야합니다.

 

여기서 고난은 복음을 증거하고 남을 돕다가 당하는 것입니다. 결코 내가 욕심 부리고 미혹당해 받는 고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고난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난은 변장한 축복입니다. 내가 고난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복음의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따르더라도 내 이웃을, 함께 있는 사람들을 잘 섬겨야 합니다. 오래 참고 온유하고, 손해보고 봉사하고 도우면서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이자 고난을 통해 주시는 축복입니다.

 

임은미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