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의 고난과 인내(약5;7-12)
1.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5:7-9)
(1) 인내의 지혜
타락한 인간들은 대개 성장하여 철이 들고 생각이 깊어지면서부터 점차 조급하게 살아간다. 인간이 조급하다는 것은 뭔가 불안하다는 의미이며 무엇인가로부터 쫓기고 있다는 말과도 같다. 보통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불안하지 않고 쫓기지 않는다면 나름대로 여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는가 하는 점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따라서 도덕군자들은 그런 삶을 추구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지상의 성도들에게는 세상적인 것을 통해 그럴 만한 여유를 부리기에 적합하지 않다.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평안한 삶을 누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은 타락한 세상에서 핍박을 받으며 그것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게 주님의 재림 때까지 길이 참으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이는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달리 대처할 방안이 없다는 말과도 통한다. 단지 앞으로 이루어지게 될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을 소망하며 인내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야고보는 이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 열매를 수확하는 추수 때를 기다리는 농부를 예로 들고 있다. 농부들은 귀한 열매를 얻기 위해 땀 흘려 수고할 뿐 아니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며 곡식이 자라고 여물어가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다.
야고보는 그에 관한 예를 들면서 성도들을 향해 마음을 굳건하게 하여 오래 참고 기다리도록 요구했다. 주님의 심판의 날이 점차 가까워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모진 환란이 닥친다 할지라도 주님이 오시기까지 길이 참고 인내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야고보가 예수님의 재림과 그로 인한 심판을 열매 맺는 결실에 연관 지어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것은 모든 것들의 완성을 의미하며 성숙과 성취를 의미하고 있다. 그 결실이 확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서의 모든 수고와 고통을 거뜬히 견디며 이겨나갈 수 있게 된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이 유일한 소망과 결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인간들은 주님의 재림이 눈앞에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아무런 인식이 없다. 나아가 기독교 내부에 스며들어온 배도자들은 2천년이 다된 지금까지 예수님이 재림하시지 않은 사실을 핑계 삼아 억지 반론을 펼지 모른다. 그러나 야고보는 임박한 재림 사실을 통해 성도들에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북돋워주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배도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실제적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해석한다. 그들은 세상의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 온갖 힘을 쏟으며 어린 교인들을 미혹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런 가운데서 믿음을 굳건히 지켜야 한다. 따라서 사도 베드로 역시 그의 서신 가운데, 주님의 재림 시에 일어나게 될 상황에 대해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3:9,10)
불신자들은 주님의 재림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배도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떠나 의도적으로 그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한다. 하지만 베드로는 주님의 재림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어떤 조급한 사람들은 재림이 더디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주님께서 택하신 모든 백성들이 회개하여 주께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의 재림이 늦추어지고 있다.
베드로가,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하신 백성들 가운데 마지막 한 사람이 구원되면 재림하시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고 있는 것은 자기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의 날은 도적같이 임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거부하고 전혀 감지하지 못할 때 주님께서 재림하신다. 그 날에는 처음 창조되었던 하늘과 땅이 근본부터 크게 흔들린다. 하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뜨거운 불에 풀어져 사라지며, 땅에서 일어난 모든 악한 일들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2) 주님의 재림에 대한 성도의 자세
야고보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음을 강조해 말하고 있다. 이는 재림의 시기가 곧 도래하게 될 실제적인 사건이 되리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어리석은 자들 가운데는 주님의 재림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재림을 믿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시게 되는 것이다(행1:11).
경험적인 인간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여태껏 눈으로 직접 본적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 임하게 될 사건을 막연하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제까지 오시지 않은 주님께서 오늘 갑자기 오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의 판단여부와는 상관없이 주님의 재림의 시기는 점차 가까워져 오고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 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롬13:11)
예수님의 재림은 다른 모든 하나님의 사역과 마찬가지로 인간들과 논의한 결과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루어진다. 대다수 인간들이 주님의 재림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그가 강림하신다. 예수님의 재림은 결코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무시하는 인간들에게는 갑자기 일어나게 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리라는 사실을 전혀 예기치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재림이 갑자기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성도들의 궁극적인 소망은 이 땅에 있지 않고 영원한 천국과 주님의 재림에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그의 재림을 간절하게 소망하는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기독교는 예수님의 재림 신앙을 철저히 관념화 하고 있다. 인간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 그의 재림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관념적으로만 믿는다.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는 하겠지만 당장 오늘밤이나 내일은 절대로 오시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것은 어리석은 믿음이 되어 내주, 내달, 내년 안으로는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으며 앞으로 수년 내 혹은 자기 생애 중에는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게 한다.
그런 자들은 마치 긴 장대를 앞으로 내밀며 그 장대 끝에 달린 재림사상은 자기와는 실제적으로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상상하게 된다. 그것을 우리는 ‘관념화된 재림사상’으로 칭할 수 있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을 지닌 성숙한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이 바로 눈앞에 임박해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참된 신앙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현재와, 막연하게 미래로 밀려난 재림 사이의 기간에 인간의 욕망이 가득 채워지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내일, 혹은 내주, 내달, 내년에 오실 수 있다는 긴박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면 세상에 대한 불필요한 욕망이 끼어들 자리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장 소중한 소망이 된다. 모든 성도들이 그런 믿음을 굳건히 가지게 될 때 비로소 세상에 대한 욕망을 멀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서로 원망하지 말라”
야고보는 성도들 간에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무엇을 원망하지 말라는 것인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역하는 악행이 발생한다 해도 아무런 감정적인 대응 없이 넘어가라는 의미인가? 우리는 이 말이 단순히 윤리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 가운데는 주관적인 원망과 불평이 있어서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인간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원망에 연관되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이름만을 가진 종교적 집단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의 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것은 감히 하나님께 저항한다는 말과도 통하는 무서운 말이다.
그런데 무지한 인간들의 역사 가운데는 그런 일들이 빈번히 일어났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원망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저들에게 참된 재림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임박한 재림과 그로 인한 궁극적인 심판이 눈앞에 놓여있음을 깨닫는다면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세를 언급하며 그에 관한 기록을 하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후 시내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던 사건을 되새기며 그와 같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권면했다. 불신앙으로 가득 찬 저들의 악한 소행을 따르는 것은 멸망을 재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10:10,11)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다양한 기적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께 직접 원망한 것이 아니라 저들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낸 모세를 원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배도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관적인 욕망과 현실적인 불만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의 배도행위를 신약시대 성도들의 거울로 삼도록 당부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을 원망하는 행위는 하나님께 저항하는 악행이 된다. 이는 결국 무서운 심판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야고보가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요구했을 때 그 편지를 처음 받은 사도교회 시대의 성도들은 시내광야에서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머리에 떠올렸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역시 그와 같은 사건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말세를 당한 우리는 이에 관해 여간 신중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4) 심판주가 문밖에 서 계심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까이 바짝 다가와 문밖에 서 계신다. 야고보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그 점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 가까이 서 계시니 세상에서의 환란과 고통을 인내함으로써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성도들에게 있어서의 신앙적인 삶은 자기 자신에게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문 앞에 서 계시는 심판주를 온전히 바라보며 의지하는 것이다.
구세주와 심판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자(人子)가 문 앞에 이른 때를 분별하도록 요구하고 계신다. 이는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게 될 역사상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을 때 그에 대한 온전한 깨달음이 있는 자들이 진정으로 복된 자들이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막13:28,2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긴 겨울을 지나 봄이 되어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워온 줄 알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친근한 무화과나무를 통해 그에 대한 원리를 볼 수 있듯이 주님의 재림도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개념자체가 없다. 배도자들은 그 사실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저들의 실제적인 삶 가운데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마치 잎이 떨어져 가지만 앙상한 채 긴 겨울을 지나는 나무가 생명을 지니고 있는데도 사람들이 그것을 멸시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말세에 처한 하나님의 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더욱 민감한 자세로 기다리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제멋대로 대행하려는 과학주의자들의 행동은 세상의 끝이 가까워졌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두뇌를 자랑하는 자들은 교회에 속한 성도들마저 극단의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신학자들의 배도행위 역시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배도에 빠진 상당수의 신학자들은 영원한 천상의 나라와 그에 속한 진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땅에 맞추어진 신학을 추구하기에 급급하며, 주님의 재림을 역사의 마지막에 실제적으로 일어날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 배악한 현실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종말의 때가 가까워졌음을 더욱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사도 요한 또한 종말에 연관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는 라오디게아교회에 보낸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 가운데 그와 연관된 기록이 나타난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육체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항상 우리 옆에서 때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숙한 신앙인들은 항상 문밖에 계시는 주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즉 인간들 편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들에 주된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문밖에서 두드리며 메시지를 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계시된 말씀을 통해 들을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배도자들은 주님의 음성으로부터 귀를 막고 애써 이 땅의 것들을 추구하며 그에 집착하는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저들에게는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 있으며 그것을 위해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고 있다. 그런 태도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으로서 결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속한 참된 성도들은 문밖에 서계시는 주님을 온전히 기억하며 그의 뜻에 따르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요한은 문을 여는 자들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자에게는 주님께서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식탁을 나누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는 주님과 함께 교제하며 살게 되는 영원한 삶에 대한 약속을 의미하고 있다.
2. “선지자들을 본으로 삼으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5:10,11)
(1) 고난을 참은 선지자들
성경에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어린 교인들은 그들이 유명하게 됨으로써 매우 큰 영예를 얻은 것으로 여긴다. 물론 믿음의 안목으로 볼 때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듯 세상적인 영예를 얻은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로부터 특별한 선택과 임무를 부여 받았지만 세상에서 명예를 얻어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는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엄청난 고난을 받아야만 했다.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환란과 고통을 동반했으며 그에 대해 인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음으로 인해 세상에서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에 관한 예들을 언급하면서 참된 믿음을 소유한 신약시대의 사도들과 교회 역시 그와 동일한 삶 속에 놓여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6-38)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시대 믿음의 선배들이 엄청난 핍박을 받은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들이 모진 핍박을 받았던 것은 단순히 ‘정의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증거했기 때문이다. 배도자들 앞에서 진리를 선포할 때 핍박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신약시대의 사도들과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증거한다는 이유로 배도한 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한다 해도 전혀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되므로 도리어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 저들에게는 이 세상에서는 어느 것과도 비교되지 않는 놀라운 상급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다면 오늘날 우리 역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타락한 세상과 배도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뿐 아니라 그를 증거하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극도로 멸시하며 박해했다. 그런 세상이라면 오늘날 그의 백성들 역시 그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타락한 세상의 속성을 올바르게 깨달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2) 성도들의 본이 되는 선지자들
세상 사람들은 저들의 취향에 맞는 영웅들을 수없이 많이 만들어두고 있다. 그들은 그런 자들의 인생을 부러워하며 자기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인생을 추구한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 세상에서 성공적인 인생을 획득한 사람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을 희망으로 생각하며 그런 인생을 이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점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명예를 얻은 자들이 성도들의 본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에서 성공한 자들도 성도들의 본이 될 수 없다. 설령 윤리적으로 인정받을 만하고 세상적으로 영예로운 지위를 차지한 기독교인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본받으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남의 부러움을 사는 그들의 성공은 일시적일 뿐 아니라 도리어 인생에 방해역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인물은 온전한 믿음의 선배들이다. 구약시대의 여러 선지자들과 신약시대의 사도들이 우리의 본이 될만한 인물들인 것이다. 특히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은 우리의 본이 되는 분들이다. 신약시대의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선배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들의 실제적인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세상적으로 부러워할만한 내용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 가운데는 믿음으로 인해 모진 박해를 받은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끔찍한 죽음에 처해진 인물들도 있다. 그들은 행복하고 안락한 가정생활을 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이 세상을 살았다. 그들은 비 진리에 저항해 맞서 싸웠으며 거짓 교사들에 대항해 피를 흘리기까지 투쟁했다. 그들의 몸은 이 세상에 있었으나 세상의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않았다. 당시에도 세상에서 성공하여 세력을 펼치던 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의 삶을 본받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 역시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본받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도리어 저들의 삶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본이 될 수 있는 인물들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신약시대의 사도들, 그리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며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았던 교회시대의 믿음의 선배들이다. 그들 이외에 우리의 본이 될만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3) 진정으로 복된 자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서 저주 아래 놓여있음을 증언해 준다. 그들에게는 인생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 무지한 형편에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최상의 값어치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저들의 삶 전체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의 목적을 추구하며 인생의 복락을 누리는 것을 최상의 복인 양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복이 아니라 잠시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모조품(模造品)에 지나지 않는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것을 경험하며 스스로 속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 모든 진리를 알아가게 된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인생의 본질과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도들은 그것이 곧 진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한다. 진정으로 복이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성공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들이다. 시편 기자는 그에 대해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시편 기자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여 영화를 누리는 사람을 복 있는 자라 규정짓지 않는다. 나아가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두고 복된 자라 말하지도 않는다. 복 있는 사람은 그런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성도들이다.
그러므로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어리석은 지혜를 좇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꾀 많은 지혜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은 죄인의 길에 참여하지 않으며 그들의 그럴듯한 자리에 앉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성도들은 항상 여호와의 율법을 진실로 즐거워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율법 없이 진리에 연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심오한 뜻을 알아가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성도들은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 그런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복된 자들인 것이다.
(4) 욥의 인내와 결말
구약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욥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이었다. 그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주장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운 자로 인정하셨다(욥1:1, 참조). 또한 욥은 동방의 왕과 같은 지위에 있던 부유한 자로서 백성들로부터도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나아가 그는 아내와 많은 자녀들을 두고 있음으로 인해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욥은 사탄의 간계에 의해 심한 고난을 당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특별한 구속사적인 사건과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특별한 구속사적 의미를 알려주시고자 했던 것이다.
욥은 엄청난 고난과 더불어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잃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훨씬 더 많은 것으로 받았다. 지위와 재산뿐 아니라 자녀들의 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욥에게 베풀어진 일반적인 축복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사 가운데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가운데는 욥과 그의 인내 및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기록되어 있다. 야고보는 어려운 고난을 인내하며 견딘 욥에게 최종적으로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말했던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야고보가 교회와 성도들에게 욥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저들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서 여전히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알기에 넉넉히 이겨나갈 수 있는 것이다.
3. “맹세하지 말라”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약5:12)
(1) 맹세하기에 부족한 인간
완전히 타락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이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아무 것도 행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의 능력을 배경으로 하여 무언가 맹세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만일 인간에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교만한 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절대 맹세하지 말도록 요구하셨다. 구약성경에는 헛맹세를 하지 말고 합당한 맹세를 하면서 그것을 지키라고 명령했지만 주님께서는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는 역사적인 재림과 심판의 날을 소망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율법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앞에서 인간들이 가진 모든 능력을 내려놓도록 요구하신 것이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3-37)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무능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상태에서는 진정한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그런 상태에서 자기의 능력을 배경으로 하여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다는 것은 교만함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더구나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에 연관된 것을 걸고 반드시 실행하겠다고 맹세하는 행위를 금지시키셨다. 하늘과 땅은 물론 예루살렘이나 자기 머리로 맹세하는 것도 못하도록 하셨다. 머리카락 하나 희고 검게 할 수 없는 무능한 인간이자,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무지에 빠진 인간이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그에 대한 맹세를 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아가 자신의 신앙심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맹세한다면 지극히 유치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진리를 받아들여 순종하며 비 진리를 강하게 거부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소중하다. 그것을 넘어 인간적인 능력을 의지하고 다른 대상물을 빗대어 맹세하는 것은 교만한 마음에서 발생하는 악한 행동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교회적인 중요한 절차 가운데 하나인 공적 고백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서약’이다. 즉 교회에서는 종종 공적인 서약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목사, 장로, 집사 등 직분을 받게 될 때 교회 앞에서 서약한다. 교회가 맡긴 직분을 자기의 욕망에 따라 행하지 않고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직분을 감당하겠다는 고백적인 선언이다.
또한 세례와 유아세례를 받을 때도 공적인 서약이 이루어진다. 세례를 받은 자로서, 혹은 유아세례를 받은 자녀의 부모와 성도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겠다는 공적인 고백이다. 우리는 그러한 교회적인 서약을 맹세와 다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교회에서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서약은 개인의 맹세와 달리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로서 자신을 잘 지켜 보존하기 위한 방편이 된다. 이는 맹세가 개인적인 욕망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라면, 서약은 교회적인 질서 가운데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의미를 지닌다.
(2) 주관적 판단과 하나님의 정죄
인간들은 본성상 자기중심적이며 주관적 판단을 한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보편 이성을 가진 인간은 때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기도 한다. 그것은 주로 가정과 가족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즉 가족을 위해 대신 생명을 내어놓고 진심으로 자기보다 가족을 아끼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자신의 욕망과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정제되지 않은 타락한 인간들의 모든 주관적 판단과 행위는 욕망의 발산일 따름이다. 죄악이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익힌 인간의 이성과 경험은 하나님을 위한 아무것도 생성해 내지 못한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 이외에 의지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3:5-7);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2:22)
잠언서 기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의지할 뿐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을 의지하지 말도록 당부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를 믿고 순종할 때 그가 선한 길로 인도하시게 된다.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신의 지혜를 배경으로 하여 주관적인 판단을 내리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은 곧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 말미암는 죄악이다.
그러므로 잠언서 기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인간의 그런 악한 심산으로부터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를 따르도록 요구하고 있다. 모든 믿음의 선배들 또한 그와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타락한 인간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그런 인생을 의지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신뢰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4. 시대를 분별해야 할 교회
21세기의 현대는 세상이 끝나가는 종말의 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이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건실한 교회와 성도들은 마지막 심판과 연관되는 하나님의 날을 고대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인간들은 그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 설령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 해도 인간의 지혜를 빗대어 비웃을 따름이다. 눈부신 첨단과학으로 인한 문명의 이기들과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풍요로움으로 인해 더욱 세상의 욕망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인간들에게 다행스럽거나 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해가 되며 저주가 된다. 이는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더욱 멀리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재림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앞으로 임하게 될 주님의 강림과 심판이 임하게 되면 상상을 초월하는 당황스러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재림에 대한 아무런 인식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알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내부에 들어와 종교 지도자 행세를 하는 사악한 배도자들이다. 그들은 배도의 길에 빠져 교회를 혼란케 하면서도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 충성스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들의 가장 무서운 범죄행위는 순진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소경이 인도자가 된 비유로써 그에 대한 분명한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마15:13,14)
악한 지도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이 임하게 된다.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적인 많은 용어들을 익히고 더 큰 소리로 하나님을 위해 살자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어리석고 연약한 자들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속아 잘못된 길을 가게 된다. 이는 저들이 하나님의 의지를 짓밟고 있는 실상을 보여준다.
오늘날도 우리 주변의 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는 그와 같은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런 자들은 마치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지도자들과 같다.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과 서기관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종교적인 기득권층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린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형틀에 내어 주었으며 그를 따르는 백성들을 핍박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것이 마치 하나님을 위한 충성에 의한 행위인 양 착각하고 있었다. 나아가 그런 자들은 연약한 자들에게 거짓 가르침으로 선전하며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초림하실 때 발생했던 그와 같은 양상은 그의 재림을 앞두고 유사한 모습으로 발생하게 된다. 이럴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과 배도자들로부터의 핍박을 각오해야 하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의지해야 한다.
종말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욕망에 집착하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며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지 분명한 응답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비단 개인적인 입장에서뿐 아니라 교회적인 관점에서 정리되어야 할 본질적인 문제이다. 인간들의 이성과 경험에 대한 의존도가 극에 달한 시대에 처한 교회는, 그에 대한 문제점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인간들은 결코 이성과 종교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오직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며 경배할 수 있게 된다. 주님의 재림을 눈앞에 두고 있는 교회는 성도들 간에 욕망에 따른 불필요한 원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 원망은 세상의 가치관들을 기준으로 하며 그것을 추구하고자 함으로써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인간의 관념에 가두지 않고 실제로 기다린다면 어떤 어려움이 당한다 할지라도 능히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이를 위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말세에 처한 하나님의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신앙이다.
이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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