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고 있는가(신28;1-6)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1-6)
두 부류의 사람
이스라엘은 광야를 40년간 방황하는 형벌을 마쳤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르기 직전에 모세는 새로운 세대에게 율법을 다시 가르쳤는데 이제 결론을 맺는 단계에 이르렀다. 율법을 준수하라고 강력히 권면하는 신명기 28장은 “축복과 저주의 장”으로 익히 배워왔다.
모세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각 여섯 지파씩 두 산에 나눠세웠다. 그 중간의 평야에는 레위 지파가 서있게 했다. 그리심 산에 세운 여섯 지파를 향해 율법에 순종하면 하나님께 받을 축복을 선포했다. 에발 산에 세운 여섯 지파를 향해선 율법에 불순종하면 받게 될 저주를 선포했다.
각각의 지파들에게 그런 축복과 저주가 실제로 임할 것이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원리를 실감나게 가시적인 모습으로 상징화시킨 의식을 거행한 것이다. 이렇게 둘로 나눈 하나님의 첫 번째 뜻은 당신께선 모든 인간을 당신께 순종하는 사람과 불순종하는 사람의 두 부류로만 나누신다는 것이다. 그 중간의 회색분자는 없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스라엘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고 있었다. 이방 족속들과는 구별하여서 따로 불러내어 첫째 부류인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었다. 따라서 기존의 신자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면 실제로 풍요롭게 된다는 것이고 불순종하면 실제로 고난이 닥친다는 것이다. 당신만이 인생사의 모든 복과 모든 화를 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나안에 들어가 그 땅 거민들의 삶이 혹시라도 풍요롭게 보일지라도 그들의 우상숭배에 오염 되지 말라는 것이다. 당신의 계명을 순종하면 당신께서 모든 복을 풍성히 주시는데 구태여 다른 신을 섬길 필요나 이유가 전혀 없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당신께만 충성 헌신을 서약토록 한 것이다. 하나님만이 인생의 생사화복의 주관자라는 절대적 진리를 이런 가시적이고도 상징적인 의식을 통해 실감나게 재확인한 것이다.
모든 인생의 최대 과제
오래 전 한국이 경제적으로 아주 궁핍했었던 시대에는 집의 안팎에 복(福)이라는 글자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대문에는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 입춘대길(立春大吉) 등의 문구를 크게 써 붙였다. 이불, 베개, 밥그릇, 숟가락 등에도 복자를 새겨 넣었다.
아침저녁으로 우리의 어머님과 할머님들은 장독대에 찬물 한 그릇 떠다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면서 손이 닳도록 빌었다. 집안에 흉사를 막아주고 길사만 생기도록 천지신명에게 간구했다. 모든 이에게 인생살이가 너무나 고달프고 매일의 끼니를 때우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는 실은 훨씬 더 궁핍했다.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이 인생의 최대 중대사였다. 누구나 가장 먼저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였다. 광야 사십년을 방황하는 동안에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였다는 것은 그런 면에서 너무나 엄청난 은혜다. 이백만이 되는 사람들의 인생최대 과제를 아무 어려움 없이 해결해 준 것만큼 더 큰 은혜가 어디 있는가?
그러니 더더욱 가나안에서 다른 우상들에게 흔들릴 필요가 없었다. 또 이스라엘이 그 풍성하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만큼 큰 죄도 없었다. 그래서 28장 후반부에 너무나 처참하고 잔인한 저주의 선포가 그토록 많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 정반대로 28장 전반부는 성읍과 들에도, 자녀와 토지소산과 가축의 새끼에도, 심지어 광주리와 떡 반죽에도,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주신다고 한다. 이만큼 고대 이스라엘은 물론 오늘날의 신자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이 없다.
그런데 이 말씀들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인 반응이 있다. 먼저 문자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여서 신자들이 자동차나 새로운 가구를 구입하면 안수하며 하나님께 복을 비는 사람이 있다. 다른 한 쪽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영적인 것이지 현실적 축복이 아니기에 본문 말씀에서 단순히 상징적 의미만 찾으면 된다고 한다.
둘 다 성경 해석상의 오류이다. 전자는 믿음은 순전해야하므로 기록된 말씀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면서 문자적 의미에만 너무 집착했다. 후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경건하고 심오한 진리이므로 기록된 대로가 아니라 그 배경의 영적의미를 추구하는 데만 집착했다.
성경은 인간의 말로 기록된 책이다. 어차피 모든 구절의 문자적 의미부터 정확히 해석하면서 접근해야 한다. 그 정확히 해석한 바탕에서 하나님이 정작 계시하고자 하는 영적 진리까지 탐구해 들어가야 한다. 요컨대 기록된 문자적 의미만 고집해서도 무시해서도 안 된다.
들어가도 나가도...
축복의 장이라고 해서 단순히 먹고 마실 것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복을 받는 대상을 의도적으로 특정 단어를 선택해서 병렬(竝列)시켜 놓았다. 먼저 그런 대조의 의미부터 살펴야 한다.
첫째는 복을 받는 곳으로 성읍과 들로 대조하고 있다. 거주하는 장소와 일터로 나눈 것이다.
자녀와 토지소산과 가축의 새끼까지 북을 주신다고 한다. 신자가 소유한 모든 것이며 또 그 것들을 활용하여 생산 성취해내는 모든 것이다.
광주리와 떡 반죽에도 복을 주신다고 했다. 광주리와 떡 반죽은 일상생활의 도구다 신자의 삶을 영위하는 모든 수단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주신다고 한다. 언뜻 처음의 성읍과 들처럼 거주 장소와 일터로 나눈 것 같다. 그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나가는 것은 일을 해야 하는 낮 동안이고, 들어가는 것은 일을 마치고 쉬고 잠을 자는 밤 동안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렇게 기록된 문자적 의미를 정확히 살폈더니 자연스레 그 영적인 진리도 도출된다.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움 통치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물건과 사람은 물론 시간과 공간도 그러하다. 신자가 처한 여건과 겪게 되는 사건과 또 모든 일들의 흐름을 거룩하신 그분만이 주관하신다.
인간은 물리적으로 연약하고 일시적인 육신을 갖고 있다. 시공간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능력과 자질과 자원에서 부족하기 짝이 없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을 활용하여 신자에게 가장 적합하고 유익과 선이 되도록 통치하신다. 일 년 365일, 하루 24 시간을 통 털어 신자가 그분의 섭리에 벗어나는 순간은 일초도 없다.
하나님이 신자의 시공간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과 신자 자신을 주관하는 것은 결국 신자에게 복을 주시려는 목적이다. 우리 선조들 온 집의 안과 밖에 복자로 도배한 것이나 오늘날의 신자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 소망하고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결코 잘못이 아니다. 아니 선하고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일이다. 문제는 복을 얻을 수 있는 자격과 조건과 그 통로이다.
축복과 저주의 장에서 주목할 단어는?
이 유명한 축복과 저주의 장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단어가 하나 있다.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를 찾으면 된다. 하나님이 그만큼 강조하신다는 뜻이다. 바로 ‘모든’이라는 단어다.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라고 했다.
따라서 모세가 선포한 모든 복을 받으려면 그분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것이 절대적 과제다. 신명기 28장의 해석의 열쇠는 바로 이 1절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선하게 다스리니 신자도 그에 따라 모든 면에서 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는 여러 면에서 원시적이고 미개한 사회였다. 농경, 목축, 상업 등이 초보적 수준에 머물었고 인간 사회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모세의 율법으로 충분히 모든 문제의 해결이 가능했다. 명문화된 규정이 없는 구체적 사안이 발생할 수도 있으나 율법에 계시 된 하나님의 원리, 율법의 구문보다 정신에 초점을 맞추면 해결되지 못할 일이 없었다.
십일조를 성실히 납부하고 안식년 희년의 규정을 철저히 지켜서 구제에 힘써야 한다. 저울을 속이지 말아야 하고 사회적 약자인 과부 고아 병자들을 잘 돌보아야 한다. 그럼 공평과 정의가 세워지고 핍박 받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가난해지는 사람이 그 사회에 생길 리 없다. 또 그런 정의로운 사회에 하나님의 보호는 물론 권능과 축복을 안 부어줄 리도 없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 특별히 안식년과 희년의 규정을 무시하고 가난한 자를 외면했다. 대신에 종교적 정치적 권력을 악용해서 도리어 가난하고 비천하고 소외된 자들을 멸시 핍박 수탈해서 자기들의 배만 채웠다. 성경의 규정을 자기들 편리한대로 골라서 자기 유익을 위해 일부만 지켰다. 나아가 이 땅의 현실적 풍요와 쾌락을 위해서 우상숭배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들이 율법에 규정된 대로 매일의 상번제, 안식일, 월삭과 절기를 지켜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자기들 죄를 씻어 거룩하게 되어 제사장 나라 소명을 다하겠다는 회개와 헌신이 실종되었다. 신명기 28장의 전반의 복만 내려 주고 후반의 화는 거두어달라는 뜻이었다. 그들은 모든 명령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죄만 지었으니 28장 후반부의 철두철미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통치를 제한하는 현대 교회
물론 율법의 모든 규정을 어느 누구도 온전히 다 지킬 수는 없다. 그럴 수 있다면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로마서에 바울이 말한 대로 율법은 모든 인간으로 죄의 저주 아래 있게 해서 십자가 복음의 은혜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율법에 인간 사회의 모든 문제가 다 망라되어 있지 않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문제들은 복잡해진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미치지 않는 시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모세 시대에 통용되는 그분의 원리라면 오늘날에도 앞으로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영원히 적용 가능한 절대적 진리이다.
율법의 구문보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정신과 원리를 따라야 한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범사를 그분이 주관하신다. 신자가 속한 모든 시공간이 그분의 은혜에 붙들려 있다. 그렇지 않는 예외란 단 하나도 없다.
그래서 신자가 된 첫째 자격은 범사에서 그분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느냐 여부다. 나아가 그분을 힘과 뜻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그분의 사랑을 범사에서 받아 누려야 하고 그 사랑을 이웃과 나눠야 한다.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하게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럼 그 사회에는 가난과 불의와 불공평은 자연히 사라진다.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이에겐 가장 먼저 그 분을 알게 해주어야 한다.
지금 옛 이스라엘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신자와 교회가 이스라엘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하나님을 열심히 뜨겁게 믿으라고 권한다. 그럼 하나님께 넘치도록 복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교회 생활에 성실히 임하고 담임 목사에게 충성하는 것에만 집중토록 하니까 문제다. 그럼 하나님이 범사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통치하는 시공간은 교회라는 한정된 장소와 주일날 몇 시간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되는가? 신자들이 교회 안에선 모든 계명을 지키므로 분명 경건하고 선하다. 그래야 복을 받는다고 하니까 열심히 지킨다. 그러나 교회 밖으로 나가선 모든 계명을 지키지 않으니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 아니다. 교회 안에 신자는 많은데 막상 변화된 삶을 사는 신자는 드문 까닭이다. 교회 생활만 성실히 해선 결코 복을 받을 수 없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그치면 천만다행이다. 문제는 28장 후반부에 선포한 그 처참하고 잔인한 저주가 그들에게 임하지 않을까 두려울 따름이다.
박 신(본명-박진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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