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7:24)
로마서 7장 말씀을 봅시다. 로마서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 바로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인데, 여기서 말하는 "나"는 누구이며,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이 로마서 주석이나 설교에서 제일 논쟁거리입니다. 이 구절을 여러가지로 이해할 수는 있으나 바울이 무슨 의도로 했느냐는 계속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를 모르는 불신자의 양심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고 믿는 사람의 갈등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 둘 사이에서 우리의 경험이 어느 한 쪽만 편들 수 없는 넓은 과정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그 두 경험을 다 쓴 것이냐를 생각해 볼 때, 여기서 사도 바을의 일생을 잠깐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권면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당시 빌립보 교회 안에는 율법주의나 영지주의 같은 이단이 계속 불거져 등장합니다. 율법주의는 도덕적으로 늘 깨끗하고 흠 없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를 확고하게 하려는 그런 움직임이며, 영지주의는 사변으로 하나님을 좇아 올라가려는 철학적 움직임 또는 오늘날 영성이라고 하는 뉴에이지 정신이나 불교와 힌두교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적인 열심을 갖고서 하나님께로 도달하려는 이단입니다. 1절부터 봅시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뭄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빌 3:1~2)
이 말씀에서 "몸을 상해하는 일"이란 할례를 의미합니다. 할례가 무슨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인데, 이를 현대식으로 바꿔보면, "성령 받고 금식하면 최고인 것처럼"이라고 표현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금식하고 성령 받는 게 잘못이 아니라 이것만이 유일한 내용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허락된 여러 경험과 여러 과정 중의 하나다. 그것이 근거이거나 핵심이거나 전 내용이 아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1)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빌 3:3~4)
은혜와 용서를 주장하고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믿음을 이야기하면, 이제 예수 믿는 사람에게서 당장 나오는 이야기는 바로 무법주의입니다. 용서와 은혜를 구하면 되지, 우리가 책임질 일은 없지 않느냐고 하자 바울은 우리가 무법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바울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보라고 합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
바울은 자기 자신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어떤 종교적인 헌신과 경지의 끝까지 가 본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이런 내용입니다. 바울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율법을 지키고 또 지켜서 어디로 갔냐 하면, 예수 믿는자 들을 박해하는 곳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믿는 자들을 박해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서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데 바울은 충성과 헌신으로 하나님의 이 일을 방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을은 이점에 놀라게 됩니다. 율법이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 교제, 신앙생활의 유익을 위한 안내서인데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를 몰고 갔을까에 놀란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박해하던 시절의 자신의 모습으로 율법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게 로마서 7장입니다. 그럼 율법이 죄냐? 우리로 죄를 짓게 했다는 말이냐? 아니다. 율법은 선한 것이고, 율법은 법이다. 그냥 법이다. 하나의 물건같이 하나의 규칙같이 누가 잡든지 하면 그만인 것이다. 법은 자기 자신에게 의지가 있거나 선택권이 있는 인격이 아닙니다. 따라서 비록 율법이 하나님의 뜻과 성품과 목적을 갖고 있을지라도 우리가 그 율법을 사용할 때 죄가 우리를 붙잡고 있고 우리가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죄가 율법을 왜곡하더라는 겁니다. 어떤 왜곡입니까? 율법에 등장하는 윤리와 도덕에 대한 왜곡입니다. 옳은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가는 길이 방해받더라는 것입니다. 옳은데 어떻게 방해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바울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지키고 선조에게서 받은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바울은 예수믿는 자들을 잡아 죽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할례를 받을 필요도 없고, 율법을 지킬 필요도 없고, 히브리인일 필요도 없고, 예수만 믿으면 된다에 바울은 벌컥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할례받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인데 왜 바울은 율법을 해로 여긴다고 했습니까?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서 멀어지면서도 본인이 죄인이라는 생각을 안하니까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라는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목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자신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영혼의 갈증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정체성과 만족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찾을 필요도 없고 예수가 오셔서 우리를 죄인이라고 지적하시는 말에 "아멘"할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게 왜 잘못입니까? 이게 하나님이 목적하신 인간이 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다르게는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의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가 아무리 예뻐도 자녀가 강아지 같기를 바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개와 사람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이 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예수 이외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는 의미는, 예수께서 보이신 그러한 인간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 그런 말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보복하시고,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보상해주시는 그런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이 원래 지으셨던 인간의 영광을 완성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공급받지 않고 그 자리에 갈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목적하신 것을 예수 안에서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에게 원래 목적하신 모습이 바로 예수입니다. 자비로운 예수, 용서하는 예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예수,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자기 증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품과 인격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영광되게 증거 하는 예수로 우리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힘든 겁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고통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무얼 더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어디까지 하면 하나님이 내 고통을 멈추도록 허락하시겠습니까?" 이게 우리의 모든 기도죠. 그러나 신앙이란 더 가고, 더 가고, 더 가는 것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삶이며 죽도록 충성하며 가는 길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의 의미는 저 끝까지 가라는 치열하고 지극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자가 될 때까지 하나님이 놓아 주지 않는 존재요, 인생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옳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안에서 허락된 하나님의 뜻과 그 은혜로 공급받고 채워지고 완성되는 목적지로 가는 길을 율법이 방해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과 거룩하심을 증거하고 인간에게 그 길을 걷게 하는 이정표로 충분한데 죄가 인간을 막고 붙들고 있어서 바울로 하여금 그 길을 좇지 못하게 하고, 죄가 옳은 길로 교묘하게 하나님을 대신하게 했더라는 것입니다.
옳은 게 문제입니다. 옳으면 잘못이다 그런 말은 물론 아닙니다. 이 말은 자기의 옳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고 은혜를 구할 필요가 없으면 그 옳음은 틀린 거라는 그런 뜻입니다. 성경의 의는 빌립보서 3장에서 보듯이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요, 하나님의 의"입니다. 의, 하나님의 의입니다. 의는 옳을 의(義)자를 쓰니까 이렇게 개념화되어서 옳고 그른 것이 되어버렸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로마서의 주제입니다. 구원이 주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주제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의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의로운 분입니다. 어떤 면에서 의로우십니까? 하나님은 "여호화로라 여호와로라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의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살다 보면, 맞고 틀리는 문제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게 됩니다. 자녀를 기르다 보면 "너는 왜 이렇게 철이 안들어?"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철이 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옳고 그름이 다만 법적인 문제이거나 경우의 문제가 아니라 속깊은 차원을 지니라는 요구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속깊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어디까지 깊어져야 합니까? 하나님의 속 깊음까지 깊어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옳고 그른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신앙 단계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과 감격이라는 관계적이고 감성적인 경험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마시고, 그것이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목적하시고 , 무엇을 이루어가시기 위하여 예수를 보내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는 이렇게 단편적으로 어느 한 순간, 한 단면을 잘라내어 그 때 옳은 자리에 섰느냐, 틀린 자리에 섰느냐?를 평가하는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어 그로 그의 인생을 살게 하사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이루신 것 같이,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완성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매 년 다릅니다. 그렇게 커나가는 겁니다. 기도가 최고였던 순간이 있고, 전도가 최고였던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닌 자리에 또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때 그 열심이 쓸데없는 짓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돌아보면, 그 때 많이 자란 것을 깨닫습니다.
대부분 그렇듯이 제 영어 실력은 고3 때 중단되었습니다. 입시 때 공부한 것이 끝입니다. 제가 성경을 언제 많이 봤냐 하면, 대학 때 많이 보았습니다. 대학 4년동안 줄잡아 50독 했습니다. 그 때는 정말 미친 듯이 통독했습니다. 구약에서 신약까지 한 달에 한 번씩 통독했습니다. 그 때 읽은 것으로 여태까지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믿음 그러면, "아! 정말, 믿음과 관계되는 구절이 어디 있었지." 비슷하게 그 그림이 그려집니다. 그 때는 제 눈에 성경 안 읽고 딴 거 하는 사람은 사람 같지 않게 보였습니다. 성경이 너무 달고 재미있으니까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이 이해되지 않았던 겁니다. 그 때는 "뭐해? 성경 봐. 기도 짧게 해." 당연히 그렇게 이야기 했을 겁니다. 이게 다 필요한 일이지만 이게 전부라고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게 전부가 되면, 율법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노력하고 성취한 것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보내신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이 배제되게 됩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청년부가 미니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거기서 젊은이들이 율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에 확 닿는 생각이 "맞다. 우리가 이 애들을 기르지 않았다. 하나님이 기르셨다. 어떻게 저렇게 잘 컸을까?"였습니다. 여러분 자녀를 다 키워봐서 알잖아요. 이게 뭐, 말을 듣는 자녀는 없습니다. 사람은 강아지가 아니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도록 되어 있지만, 생각한다고 바로 답을 얻는 게 아니고 , 갈등하고, 방황하고, 먹먹한 과정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부모는 정답을 아니까 자꾸 자녀를 다그치는 겁니다. "지금 우물쭈물 할 시간이 어디 있어? 한 시간이라도 앉아서 공부 한 자라도 더 해" 우리는 다 아는 결론이지만 자식은 반발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그 갈등으로 허비한 시간을 하나님이 그냥 그렇게 흘려보내게 놔두지 않고 자라게 만드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만드십니다. 우리 현실이 경쟁과 승리를 요구하고, 실패하고 무능하면 지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구장에 가보면 별 사람이 다 와서 당구를 칩니다. 그 별사람이라는 말을 이해하시겠죠? 당구칠 능력이 없는데 와서 치고 노는 사람입니다. 당구칠 능력이 없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생을 살 실력이 없는 겁니다. 봐도 뻔합니다. 그런데도 당구를 치러 잘 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은 아마 그러시겠죠. "에구, 그러니까 저렇게 살지" 여러분 그러지 좀 마십시오. 당구도 돈 내고 치는 겁니다. 무능하면 와서 당구도 칠 수 없습니다. 돈 낼 실력이 있어야 와서 당구도 치는 겁니다. 그 별사람이 아무 수입도, 살아남을 조건도 없어 보이는데 당구를 치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습니다. 아니 왜 야유를 보내십니까? 너무 그러지들 마세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을 가지세요. 거기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말씀은 바울이 돌아보니까 예전에 그가 맞다고 생각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에 전혀 방해가 되었더라 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내용은 지금 우리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위해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어떤 때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방해하는 길일 수 있습니다. 거의 그렇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합니까?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결국 따져보십시오. 우리가 자식에게 하는 이야기는 "너 그렇게 해서 어떻게 먹고 살래?" 가 대부분입니다. 아니, 공중 나는 새는 다 어디로 간겁니까? 들에 핀 백합화는 다 어디로 간 겁니까? 이런 말은 사실 지난 30년간 경제 성장 속에서 돈의 위력을 우리가 많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더 신앙적이지 않은 부모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 예수 믿어서 이렇게 살아왔다. 그러니 너도 예수 믿어라"가 아니라 "너 지면 안된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 믿는 이야기가 왜 그리로 갔습니까? 예수 믿으면 갖게 되는 최고의 덕목은 넉넉함입니다. 그 넉넉함이 없으면 용서가 있을 수 없습니다. 기다려 줄 수 없고, 겸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자랑과 승리 속에서 나오는 겸손과 용서는 감춰진 오만이고 경멸이고 동정일 뿐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신앙인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열심히 예수를 믿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거슬러 가고 있지 않은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로마서 10장에 가면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꾸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 10:1~2)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렇죠? 우리가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기도라는 방법으로, 자기를 증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예전에 설교하면서 김혜자씨의 이야기를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김혜자씨가 나이가 들고 이제 혼자가 되었는데 유명했던 국민 배우가 씁쓸하고 허탈하게 지내게 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프리카 어린이를 돕는 기회가 생겼답니다. 김혜자씨가 남을 도와보니까 자기 자신이 정말 행복한 겁니다. 천원이면 아이 한 명을 한 달간 먹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후렴처럼 "인생이 별거 아니에요, 인생 별거 아니에요."라고 덧붙였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 이야기를 그렇게 한 겁니다. "인생이 별거 아니에요, 인생 별거 아니에요." 무슨 뜻일 것 같습니까? 그냥 들으면 김혜자씨는 막 가는 사람 같습니다. 허탈해진 불자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그렇구나, 아무것도 아니구나. 뭐 그렇게 아둥바둥 사느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지금 그 이야기가 아니고 이 표현은 김혜자씨가 신앙인으로써 하는 간증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은 보상이 없습니다. 의미가 없습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남을 위해서 사세요. 예수 믿는 대로 사세요. 그게 인생입니다." 유명해지고 성공하고 부유해지는 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젊었을 때는 아마 못 알아 들을 겁니다. 그 때는 당연히 열심히 살아야 하는 때입니다. 그런데 나이 들면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렇죠? 나이 들면 알아 들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주력 부대가 바로 육십대입니다. 육십대 후반이면 이 넉넉한 표정을 지어야 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열두 사도가 바울에게서 느꼈던 것을 우리 자녀가 우리를 보고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그 열두 사도가 바울에게 한 수 접어주는 겁니다. 바울은 열두 사도에 못 끼었을 뿐만 아니라 반대파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열두 사도가 일한 것보다 바울이 일한 게 훨씬 성경적입니다. 우리는 제자훈련을 하고 예수님과 가깝게 지내는 방법론으론 자꾸 쓰는데 하나님은 언제나 다른 데서 불러옵니다. 열두 제자는 무엇을 했습니까? 맛디아는 뽑힌 그 다음에는 그 이름이 성경에 다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을 쓰느라고 등장해도 나머지 제자는 이름이 거론되지 않습니다. 물론 당연히 자기 일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바울이 합니다. 하나님은 아닌 자를 들어 쓰십니다. 자기 의를 근거로 해서는 기독교 신앙과 병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우리는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쓰고 진실한 소원을 품고 예수를 부릅니다. 바울이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이 갈등을 아는가? 내가 가진 의가 나에게 무엇을 만들어 냈는지 아는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필요 없는 자가 되게 했더라. 율법이 하나님이 되었더라. 그것만 지키면 괜찮은 사람이 된줄 알았는데......놀라게 된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제일 힘들어 하는 게 무엇입니까? 짐을 지는 일입니다. 인생에는 여러가지 짐이 있습니다. 생존 경쟁의 짐이 있고, 자존심의 짐도 있고, 의미와 보람이라는 짐도 있습니다. 개인이라고 해서 자기 하나의 짐만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희한하게 우리는 타인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혈육이 있습니다. 자식이 잘못되면 내가 아무리 성공한 사람이라도 자녀와 같이 자존심과 낙망의 길을 같이 지게 됩니다. 나 개인이 괜찮더라도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망신을 당하면 함께 져야 하는, 이런 그물망처럼 연결된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렇죠? 이 짐을 질 수 있게 해 주는 것, 하나님과 세상의 역사의 주인이시며, 선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모르면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이를 배우는데 아마 우리 전 인생이 소모될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손해보지 않는 길입니다.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천국을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우리 안에 하시는 일이고 우리 인생이 갖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빨리 성취하여 쉬려고 합니다. 짐을 벗어 던지고 보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 이후로 미루라고 하십니다. 살아있는 짐을 지라고 하십니다. 억울한 짐, 버거운 짐, 막막한 짐을 지라고 하십니다. 그 이상의 짐은 없을 겁니다. 무겁고, 억울하고, 버겁고, 막막한 고통이라는 짐이 있습니다. 육체적 고통, 짐을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예전에 장 유착으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아침마다 배를 쨌는데 그걸 하게 되면 기침을 잘 못하게 됩니다. 복근이 당겨서 기침을 못하게 되니까 폐에 물이 차게 되면 기침을 잘 못하게 됩니다. 복근이 당겨서 기침을 못하게 되니까 폐에 물이 차게 되면 폐렴이 될 위험이 있다고 매일 아침에 의사가 와서 진공청소기 같은 것으로 뽑아냅니다. 의사들이 쓰는 전문용어가 있을 겁니다만 아무튼 저는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석션(suction)이라고 기억되는데 그 진공청소기 같은 것을 들고서 우리 환자 8명이 누워있는 병실에 들어와서 한 바퀴 돕니다. 그러면서 의사가 묻습니다. "기침 많이 하죠?" "많이 했습니다." 석션(suction) 안하려고 다들 거짓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의사가 "많이 하셨군요."하고 뽑아냅니다. 그러면 막 안하려고 다들 뒷걸음치는데 저는 언제나 제일 먼저 손을 들고는 "저부터 하시죠."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의사 놀랍니다. "그 참 이상한 환자다." 이런 눈으로 저를 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하는 걸 지켜보고 맨 끝에 하는 게 사실 제일 힘듭니다. 어차피 해야 할 거라면, 그걸 해야 그날이 지나간다면 빨리 받는 게 낫습니다. 먼저 맞는 매가 낫습니다. 사실 먼저 매를 맞으면 힘껏 맞는다고 하니까 힘 빠진 다음에 맞아야 한다고 하는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짐을 져야 합니다. 그 짐을 지는 일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대한 보상, 거대한 통치, 거대한 항복이 없으면 짐을 질 수가 없습니다. 이 짐을 지는 것과 못 지는 것의 가장 큰 차이가 표정에서 나타납니다. 표정이 나쁩니다. 힘이 들어서 표정이 나쁜게 아니라 짜증이 나고 억울해서 나쁩니다. 그래서 건들면 터집니다. 내년부터는 교회에 위원회를 하나 만들려고 합니다. 바로 <폭탄 제거반>위원회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인생과 불만을 다른 데에다 자꾸 터트리려고 합니다. 자꾸 이봉창, 이준 같은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적을 몰아내고 환경을 바꾸어서 만족을 얻는 게 신앙인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직면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의 답을 얻어 내야 합니다. 그 답을 얻는 것이 어느 순간, 어떤 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서 만들어진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시간 속에서 일하신다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시간을 사용해서 하나씩 하나씩 하십니다. 큰 감격이 있는데도 그 감격이 끝이 아닙니다. 첩첩산중입니다. 층층이 있습니다. 깊고, 높고, 울창하고, 두텁고, 부요하고, 풍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바울이 고백하는 바로 이 문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목적과 약속 아래 있는 존재요, 운명임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한, 우리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또한 예수를 알지 못할 때는 그럴 수 밖에 없는 한, 우리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조건과 환경을 바꾸는 싸움으로 가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로우심과 신실하심에 맡기는 사람이 되어 표정 좋은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교회 이름을 바꾸려고 그럽니다. "표정 좋은 교회" 이 이름 어떻습니까? 그런 신앙을 살고, 인생을 믿음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나누어 주고, 짐을 나누어 져주고, 웃어 주는 행복한 인생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의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의 의는 나를 보호하고, 모두에게 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내가 필요로 할 때는 너 오지 않았느냐는 고함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이는 참으로 가난한 인생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부르사 아무 때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도 되는 복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버지께서 먼저 아신다는 지위와 약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도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돌보아 주시옵소서. 예수를 주셨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났으니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이 믿음, 이 확신, 이 넉넉함, 우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사 세상 앞에 교회가 무엇인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하시고 우리를 보고 감탄하는 인생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영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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