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적 은사인 사랑(고전13: 1-13)
1. 고린도전서 13장에 언급된 은사로서의 사랑
많은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3장을 소위 ‘사랑장(章)’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상당수 교인들은 전체 내용을 외워 암송하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이 사랑에 대한 가장 감명 깊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사랑을 이야기할 때 흔히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를 언급한다. 심지어는 결혼식장에서 신랑신부의 사랑을 축하하는 노래가사로서 성경본문이 그대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조차도 그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고린도전서 13장에 언급된 사랑을 일반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본문 말씀에 기록된 사랑은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류의 사랑과는 전혀 다르다. 그 사랑은 타락한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과 다른 내용으로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허락하신 특별한 은사로서의 사랑이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은사로서의 사랑이라는 말은 교회 안에는 존재하지만 교회 밖에는 그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3장 맨 마지막 부분에 언급하고 있는 믿음, 소망,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연관되는 용어로서 불신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도 일반적으로 회자(膾炙)되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단어를 잘 알고 있으며 나름대로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드러나는 형식은 유사할지 모르지만 본질은 전혀 다르다. 즉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믿음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진정한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몸 된 교회 안에만 존재한다. 교회 안과 밖에서 동일한 용어가 사용되지만 그 본질적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다양한 소망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정한 소망’은 오직 교회 안에만 존재한다. 우리 주변에는 세속적인 형태의 다양한 믿음과 소망이 있듯이 다양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영원 불변한 ‘진정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교회 안에만 존재한다.
따라서 교회 밖에 있는 갖가지 형태의 사랑은 그것이 아무리 고상하고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들의 감정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일 뿐 영원한 것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상의 사랑 가운데는 이기적이지 않은 지고지순(至高至順)한 사랑이 있으며 결코 끊어질 수 없는 진정한 사랑이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지만,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들의 사랑이란 일시적이며 이기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랑은 결코 영원하지 않으며 극단적인 형편에 다다르게 되면 환경과 조건의 변화와 더불어 언제든지 변질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락된 교회 안에 존재하는 진정한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 사랑은 세상의 조건과 상관없이 영원 불변한 본질을 소유하고 있다. 그 사랑은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들로부터 생성된 것과는 전혀 다르다. 나아가 그것은 인간들의 신앙심에서 생성된 종교적 산물이 아니다. 은사로서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락된 특별한 사랑인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까지 교회에 허락된 은사에 연관된 소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12장과 14장 사이에 끼어있는 13장에서 언급한 사랑은 교회에 특별히 허락된 은사로서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사랑이 인간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이성과 경험에 기초한 사랑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2. 사랑의 중요성 (1-3)
바울은 앞에서 언급한 방언의 은사에 관한 내용과 더불어 진정한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사로서 ‘사람의 방언’(tongues of men)과 ‘천사의 말’(tongues of angels)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 자체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내용들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님을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방언’이란 다른 지역의 종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은사로서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순절 성령께서 강림하셨을 때 예루살렘에는 절기를 지키기 위해 당시 전 세계의 각지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 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출신 지역에 따라 다양한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오순절 날 임하게 된 성령을 통해 방언의 은사를 받은 성도들은 다른 이방 지역의 언어를 사용하는 무리에게 저들의 언어로써 ‘하나님의 큰일’을 선포했다(행2:5-12). 그 때 많은 성도들은 이방 지역의 종족들이 사용하는 다른 언어들을 학습하여 배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그 언어를 구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천사의 말’이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아닌 천상에서 계시된 신비한 언어를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말을 일부 성도들에게 특별한 은사로 주셨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방언이 일반적인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그 방언을 말하는 당사자들도 대개 그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 즉 입술에서 나오는 말을 지껄이면서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채 지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방언을 통역할 수 있도록 다른 어떤 성도들에게 특별한 통변의 은사를 주셨다. 그는 그 방언을 말할 줄은 모른다 해도 그 말을 듣고 완벽하게 통변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방언과 통변의 은사를 허락하시고, 성도들로 하여금 그것을 말하고 통역하게 함으로써 신약성경 27권이 완성되기 전 교회에 특별한 계시의 말씀을 주셨던 것이다. 따라서 방언과 통변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바울은 그 은사들에 연관된 사실을 언급하면서 자기가 그 중요한 은사를 가지고 설령 교회 가운데 엄청난 유익을 끼친다고 할지라도 진정한 사랑이 없다면 자신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말했다. 즉 방언의 은사를 받아 교회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지 모르지만 진정한 사랑이 결여되었다면 그 방언은 ‘소리 나는 구리’(sounding brass)와 ‘울리는 꽹과리’(tinkling cymbal)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고전13: 1).
여기서 우리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해야만 한다. 이 말은 그런 방언은 그 자체로서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다. 즉 바울은 그것에 대한 언급을 하며 사랑이 없는 자의 방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방언은 교회 가운데서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것을 말하는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 받아 전달하는 예언(prophecy)의 은사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을 때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됨을 언급했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비밀을 깨닫고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랑이 없다면 그것 자체로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설령 산을 옮길만한 엄청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교회를 위한 의미로 작용하기 어렵다.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도 앞에서 언급한 방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은사 자체가 무의미하지는 않다. 그것은 교회를 위해 커다란 유익이 되었지만 참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한 그 은사를 행하는 당사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는 모든 은사는 개인의 유익을 넘어 교회의 유익에 연관됨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소유한 모든 재산으로 가난한 이웃을 찾아 구제하고 자기의 몸을 아낌없이 불사르게 내어줄 만큼 희생한다고 해도 진정한 사랑이 결여된 채 인간의 이기심에 기인한 것이라면 자기에게 값어치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무관한 상태라면 설령 일시적인 만족감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아무런 실제적인 유익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해하기 쉽지 않은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된다. 교회에 허락된 일반적인 은사를 행함에 있어서 사랑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은사를 행하는 자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비교적 쉽게 이해할만하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으로써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며,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그 자체가 벌써 ‘사랑’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에 연관된 인간들의 이기적이고 죄 된 본성에 대해 예리한 언급을 하고 있다. 설령 그것이 외관상 이웃을 위한 헌신적인 사랑의 표현인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사랑과는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3. 사랑의 특성 (4-7)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 즉 교회와 다른 성도들을 위해 존재한다. 참 사랑은 사람의 마음으로 느끼게 되는 뿌듯하고 감미로운 감정을 말하지 않는다. 나아가 인간의 도리에 따라 조건 없이 베푸는 혈연에 기초한 사랑 역시 영원한 사랑일 수 없다.
도리어 사랑은 이웃을 배려하며 겸손한 자세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 윤리적인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 된 모습을 분명히 깨달아 인식할 때 드러나게 된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될 따름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교회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사랑은 자신의 감정을 충족시키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며, 신앙적인 삶을 통해 이웃을 위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물론 그 이웃이란 주변에 살고 있는 일반적인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속해 살아가는 성도들을 의미한다.
참 사랑은 기본적으로 오래 참고 인내하는 성질을 지니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의 삶 가운데 상당한 갈등과 어려움을 겪게 될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참고 인내함으로써 진정한 사랑을 드러내게 된다.
또한 진정한 사랑은 항상 온유하고 겸비한 자세를 유지하도록 한다. 이는 세상의 유능하고 잘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태도와 전혀 다르다. 사랑은 결코 달콤하거나 겉보기에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즉 인간들이 가지는 감미로운 감성을 두고 진정한 사랑이라 말할 수 없다. 참 사랑은 도리어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낮추고 인내하는 자세를 가지게 된다.
나아가 성도들이 소유해야 하는 진정한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으며 자신의 것을 자랑하거나 남에게 교만한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이 말은 사랑이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방편이 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 앞에 내세워 자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지 않는다. 다른 이웃보다 자신이 낫다는 천박한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한 진정한 사랑을 드러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소유한 자라면 결코 세속적인 것을 통해 유치한 자기중심적인 자랑을 하거나 교만에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은 다른 이웃들 앞에서 무례하게 행하지 않으며 개인의 욕심을 추구하지 않는다. 또한 이기적인 욕망에 근거하여 무분별하게 남을 판단하거나 강압적인 요구를 하지 않는다. 여기서 무례하다고 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착각으로 인해 교만에 빠진 오만함을 의미한다.
참 사랑은 결코 하나님의 몸 된 교회 가운데서 잘못된 차별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정한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면 개인의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일에 치중할 수 없다. 거기에는 항상 신앙으로 포장된 종교적인 욕망이 포함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진정한 사랑을 소유한 성도들은 주관적인 판단과 목적에 어긋난다고 해서 쉽게 화를 내지 않는다. 그 근원을 찾아 마땅히 분노해야 할 때가 되면 교회와 이웃을 위해 성숙한 분노를 하게 될 따름이다. 따라서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이웃에게 앙심을 품거나 복수를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에서 발산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은 악한(evil) 것을 생각지 않으며 불의(righteousness)를 기뻐하지 않는다. 이는 일반적인 윤리에 연관된 악과 불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거룩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세상에 속한 것들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한 성도들은 그런 것들을 버림으로써 영원한 진리와 더불어 기뻐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고 바라며 견딘다.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한 성도라면 세상의 불의를 추구하며 그것으로 인해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진리와 더불어 기뻐한다. 그것은 타락한 세상에서 생성되는 경험적인 만족과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환난과 핍박을 동반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지 않을 수 없다. 참 사랑을 소유한 성숙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믿고 오로지 천상의 나라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4. 사도시대의 특징적 은사들 (8-10)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사랑은 이 세상에서 한시적이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 그 사랑은 시대와 형편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교회를 거쳐 보편교회가 세워져 가는 가운데도 그 사랑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나아가 이 땅에서는 물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그 사랑은 소중한 역할을 한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공히 존재해 왔다. 구약성경의 노아홍수 시대, 아브라함 시대, 모세 시대, 다윗왕국 시대와 그 이후 시대를 거치면서 구속사적인 상당한 특색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존재했었다. 신약시대에 있어서도 사도교회와 보편교회 시대의 상이한 특성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대로 존속했다.
이처럼 역사상의 다양한 시대적 형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그 사랑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온전히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그 사랑의 영원성을 언급하며 사도시대의 많은 특별한 은사들이 한시적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앞으로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게 될 때가 오리라는 사실을 언급했던 것이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 8-10)
신학자들 가운데는 이 말을 인류의 최종적인 종말과 연관되는 것으로 주장하는 자들이 상당수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영원한 천국에 연관된 것이라면 굳이 여기서 이런 언급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우리는 우선 바울이 무엇 때문에 그런 특별한 은사들인 예언이 폐지되고 방언이 그치며 지식도 폐하게 된다는 말을 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물론 이 말은 종료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완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사도교회 시대의 특별한 은사들을 배경으로 하여, 모든 것이 그보다 성숙된 보편교회 시대가 조만간 도래하게 된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사도교회 시대의 성도들이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사도들과 특별한 은사를 받은 성도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사도시대 당시 전 로마제국에 흩어진 교회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부분적으로 계시되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산발적으로 예언되었으며 기록된 계시로 남지 않았다.
설령 어떤 사람이 그 모든 내용들을 글로 기록해 남겼다 할지라도 그 자체가 온전한 성경이 될 수는 없었다. 아무도 그 내용을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받아 적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록된 성경 계시가 완성되기 전에는 지역과 형편에 따라 교회를 세우기 위한 다양한 은사들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교회들 가운데 특별한 은사로써 사도시대에 계시된 은사적인 내용들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되었을 따름이다.
그렇지만 바울은 장래에 ‘온전한 것’(the perfect)이 오게 되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언급했다. 온전한 것이 올 때(when the perfect comes)는 사도시대 여러 지역에 흩어진 교회들 가운데 특별한 은사들을 통해 부분적으로 예언되던 일들이 끝나고 교회는 성경을 통해 온전한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온전한 것이 오게 되는 시점은 최종심판을 위해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AD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연관되는 내용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이방인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됨으로써 유대인들이 패망하여 뿔뿔이 흩어지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복음이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보편교회의 기초가 놓여지던 시기였던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더불어 사도교회 시대가 끝남과 동시에, 지역과 형편에 따라 한시적으로 계시되던 특별한 은사들이 종료되었다. 대신 이방인들의 세계와 더불어 보편교회시대가 시작된 후부터는, 완성된 계시의 말씀과 더불어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교회 가운데 역사하시게 되었다.
우리는 이 의미와 함께 바울이 말한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the partial will be done away)는 말의 의미를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는 굳이 앞 시대에 예비적으로 주어졌던 중요한 은사들을 폐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강조해 말하고 있다. 이는 사도시대에 뒤따라 이어지는 또 다른 특별한 교회시대를 예고하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부인 새로운 보편교회 시대로의 변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5. 온전한 지식의 시대 (11, 12)
사도바울은 교회와 성도들의 구속사적인 발전과정에 관한 설명을 하면서 인간의 성장과정을 예로 들고 있다. 그가 어린아이였을 때와 장성한 자가 되었을 때의 차이와 연속성을 말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와 영원한 천국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구분한 말이 아니었다.
바울은 사도교회 시대를 어린아이의 때로 비유하면서 보편교회 시대를 장성한 사람이 되었을 시기로 설명하고 있다. 만일 이 말이 지상의 교회 시대와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임하게 될 영원한 천국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굳이 어린아이 때의 유치함을 버리고 성숙하게 되는 사실과 연관 지어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어렸을 때는 어린아이처럼 미숙한 말을 했으며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어른으로 장성한 후에는 더 이상 어린 아이와 같이 말하거나 사고하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그는 어른이 되고 나서는 어린 아이 때의 모든 일들을 버리게 되었음을 말했다.
우리는 바울이 한 그 말 가운데서 의미심장한 중요한 내용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는 과거 어린아이 때의 모든 것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폄하 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과거의 어린 시절을 거쳐 어른으로 성장했으며 어른이 된 후에는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행동할 필요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중요한 사실은 어린 시절이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배경이 된다는 점이다.
이처럼 방언과 예언 등의 은사들에 있어서도 그와 같다. 사도시대에는 그런 특별한 은사들이 교회 가운데 산발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더불어 그에 대한 의미가 확실히 드러나게 되어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모습을 지닌 보편교회 시대가 도래하게 되면 더 이상 그런 방법이 아니라 더 성숙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는 사도시대에 방언, 예언, 부분적으로 예언된 말씀에 대한 지식 등 특별한 은사들을 통해 교회의 기초가 확립되었으나, 때가 되면 완성된 말씀과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드러나게 되며 그 가운데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시대가 이르게 됨을 말해준다.
그 때가 이르면 사도교회 시대와 달리 초자연적인 현상을 동반한 은사들을 통해서 교회가 세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도시대의 특별한 은사들이 보편교회를 위한 충분한 기초의 역할을 감당했음을 말해준다. 그 대신 보편교회 시대에는 성도들이 완성된 계시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게 된다. 따라서 더 이상 과거에 있었던 특별한 은사들에 집착하거나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바울은 이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과거에는 마치 청동거울을 통해 보듯이 희미하게 볼 수 있었다면 앞으로 때가 이르면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했다. 즉 사도교회 시대에는 로마제국 전 지역에 흩어진 여러 교회들 가운데 다양하게 드러난 은사들과 그 내용을 기억하는 지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부분적으로 알아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사도교회 시대를 마감하고 보편교회 시대가 이르게 되면 하나님에 대해 온전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인간들의 이성과 경험을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 27권의 완성된 기록 계시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한 진리로 알고 있는 개혁교회에서는 신구약성경 66권의 완전성과 충족성을 고백하고 있다. 이는 기록된 계시로 허락된 성경말씀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온전히 알아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불건전한 은사주의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은 우리 시대에도 초자연적이며 특별한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더 구체적으로 알아갈 수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을 통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를 초자연적인 방편을 통해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는 내용과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기록된 계시로 주어진 성경 자체로서 완벽하며 성경에 대한 보조기능을 할 수 있는 다른 무엇인가를 추구하거나 기대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태도라는 것이다.
우리는 방언과 예언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인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그 의미는 사실상 오늘날 교회와 예배 가운데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방언이란 인간들이 자의에 의해 말하는 언어가 아닌 천상으로부터 허락된 언어이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신 특별한 언어인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경에 계시된 천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어디에 살든지 동일한 천상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역사 가운데 살았던 과거의 모든 믿음의 선배들뿐 아니라 현재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아메리카 대륙 등 우리와 멀리 떨어져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조차도 참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록된 성경의 천상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고 있을 때 서로 간 대화가 통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동일한 지역, 동일한 민족에 속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성경에 기록된 천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과 지상에서 익힌 경험상의 언어만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서로 간 영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날마다 얼굴을 마주하는 바로 옆집에 사는 이웃관계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언의 은사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다. 예언은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에 대한 말(prediction)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에 전달하는 은사(prophecy)이다. 성도들은 기록된 성경을 통해 교회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드러내야 한다. 특히 교회의 교사로 세움을 받은 목사가 공 예배 시간에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은 곧 예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도교회 시대에 있었던 방언과 예언의 특별한 은사들은 종료되었지만 그 의미는 여전히 보편교회 가운데 존속한다. 과거 사도교회 시대에 부분적으로 행해지던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가 이제는 교회 가운데 기록된 말씀과 더불어 상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보편교회 시대에는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분명하게 깨달아 알게 된다.
6. 믿음, 소망, 사랑
타락한 인간들의 본성은 원초적으로 이기적이다. 사랑에 있어서도 자기감정 여하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고 누리고자 한다. 사랑의 감정이 활발하게 일어나면 기분이 들뜨고 그렇지 않을 때는 전혀 사랑과 무관한 반응을 보인다면 우리는 그것을 진정한 사랑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참된 사랑은 인간들이 경험하는 감미로운 감정과 구분된다. 그에 대한 온전한 깨달음이 곧 이기적인 인간 내면의 감정을 넘어서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알아가는 한 방편이 된다. 이는 일반적인 경우에도 형식상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부부간의 사랑, 부모 자식 간의 사랑, 형제간의 우애, 친구 사의의 우정, 민족과 종족에 대한 사랑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랑은 한시적이며 조건적인 것들이다. 인간들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벌이고 있는 이기적이며 천박한 사랑이 아니라 외형상 윤리적이고 아름다워 보이는 사랑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일반적인 경우, 인간들의 모든 사랑에는 나름대로 조건이 붙는다. 어떤 형식으로든 자기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될 만한 무엇인가 남아있을 때 사랑하고자 하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현실적이며 감정적인 사랑을 넘어설 때 진정한 사랑이 드러난다.
부부간의 사랑을 예로 들어 보자. 부부간의 애정의 감정만으로는 영원한 사랑이라 말하기 어렵다. 남녀 사이에 애정으로 표현되는 그 사랑은 언제든지 변질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부간에는 일반적으로 서로 돕는 관계에 놓여있다. 그것이 물리적인 도움이든지 정신적인 도움이든지 간에 부부는 서로 도움을 주며 의지하는 가운데 살아간다. 이는 상호 유익을 끼치며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그런데 만일 부부 가운데 한 쪽이 도움을 줄만한 모든 것들을 상실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를 들어 부부 중 한 사람이 심한 중병이나 치매가 걸려 겉보기의 아름다운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가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분명한 점은 그런 경우에 조차도 부부관계에 의한 사랑은 여전히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바는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게 되면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감미로운 애정은 남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중병에 걸려 앙상한 몰골을 하고 있는 배우자로부터 도움을 바라기는커녕 도움을 줄 일만 남아 있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대개 암담한 상황에 부닥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통 당하는 배우자를 기억하며 부부의 관계를 온전히 지속하는 것이 사랑이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을 소유한 자에게는 그 사랑이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타락한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이미 자신을 위한 감정적인 사랑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참 사랑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기초한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넘어서야 한다. 물론 이런 경우라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에서는 여전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말하는 은사로서의 사랑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더불어 이웃을 기억하는 사랑이다. 즉 진정한 사랑은 느낌이나 감정, 그리고 일반적인 현실을 넘어선 개념인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사랑의 은사는 바로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제 우리가 주의 깊게 깨달아야 할 점은 참된 믿음, 소망, 사랑은 하나님의 몸 된 교회 가운데 본질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마지막 부분에서 그 세 가지 가운데 사랑이 제일이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여기서 서열적 개념에서 사랑이 믿음과 소망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말했던 것인가? 단순히 그런 의미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믿음, 소망, 사랑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와 골로새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믿음, 소망, 사랑에 관해 더욱 구체적인 기록을 하고 있다. 그는 교회와 성도들로 말미암아 감사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기도할 때마다 저들이 소유한 믿음, 사랑, 소망에 관한 내용을 기억한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1: 2-4);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1:3-5)
바울이 기록한 위의 말씀 가운데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역사’, ‘성도들에 대한 사랑의 수고’, ‘하늘에 쌓아둔 소망으로 인한 인내’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 셋은 별개인 것 같지만 하나로 엮어져 존재하는 특성을 지닌다. 즉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마땅히 소유하고 보존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은사들은 단순히 개인의 신앙생활에 연관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한 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사도교회 시대에 특별히 허락된 은사들이었던 방언, 예언 등이 폐지된 것과 비교된다. 즉 이러한 은사들은 보편교회 시대에 있어서도 여전히 성도들 가운데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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