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양식/오늘의 설교

그는 나보다 옳도다(창세기 38장 26절)

구원의 계획 2018. 1. 23. 01:08

그는 나보다 옳도다(창세기 3826) 2018.1.23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인간은 저마다 선과 악의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국가마다 선과 악의 기준이 다릅니다. 이 세상 임금이 세운 기준은 오늘의 선이 내일의 악이 되기도 하고, 오늘의 악이 내일의 선이 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한 나라의 정권만 바뀌어도 세상이 어수선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 한 사람이 나아와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8:19)

 

주님의 모든 행하심에는 반드시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말씀하신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5:19).”

 

이렇게 진정한 선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영역에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날 아담과 하와 이후 타락해 부패한 인간들은 스스로가 판단하고 행동하는 독립적 존재가 됐습니다. 이렇게 무엇이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인 것, 즉 내가 스스로 하나님 없이 결정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그것이 바로 죄이며 악입니다.

 

예를 들어 성전 건축도 크게 짓는다고 무조건 그것이 악이 아닙니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면 그것이 곧 악이고 죄였습니다. 왜냐고요? 하나님께서 그에게 건축을 명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과 또 광야에서 죽었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가면 따라 가고 그것이 멈추면 같이 멈추었던 것을 배워야 합니다. 성령 강림 후 사도들과 교회는 오직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기 시작했고, 그가 세우는 사람을 세웠고, 그가 허락하지 않는 것은 행하지 않았고, 그가 이끄시는 바를 따라 행하였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현대교회는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이름의 뜻과 같이다수(多數)’의 생각이 곧 선이고 정의라는 것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반드시 주님의 심판대에서 자기들의 그 정의와 선이 틀렸다는 것으로 인해 큰 충격과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 문밖에 내쳐진 그들은 도대체 왜 내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주님의 말씀에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난날 유다의 자부 다말의 행위나 헌신이 마리아의 헌신과 같은 노선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라합은요? 룻은요? 밧세바는요? 당신의 인간적 평가 잣대를 내려놓으십시오. 예수님의 족보에 나타난 복음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당신의 그릇된 이해를 재구성하십시오. 다말과 라합과 룻과 밧세바와 마리아는 모두 주님의 오심을 위하여 자신을 그분의 통로로 헌신했으며 의롭고 선하게 믿음으로 살아간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여인들이 복음보다 율법주의적 잣대가 더 강해진 요즘 현대교회에 존재한다면 얼마나 많은 핍박과 조롱을 겪을까요? 지금의 SNS 등을 통해 얼마나 많은 악플이 달리는 경험을 하게 될까요? ()과 의()는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지금 당신의 불끈 쥔 그 주먹을 펴십시오. 지금 그 손에 쥐고 있는 정죄와 판단의 돌을 내려놓으십시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그는 나보다 옳도다가 있어야 할 때입니다.

 

배익환 목사(인천 제자감리교회)